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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03.28 11:02수정 2018.03.30 15:18
1968년 하버드대학 심리학과 로버트 로젠탈(Robert Rosenthal) 교수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초등학교 학생 20%를 무작위로 뽑아 담임교사에게 명단을 전달하며 이 아이들의 지능지수가 높다고 말했다. 8개월 뒤 명단에 있던 학생의 성적이 실제로 올랐다. 담임교사가 해당 학생들에게 관심과 기대를 보였고, 그들이 이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성적이 향상된 것이다. 이를 '로젠탈 효과'라고 한다.


1989년 아내와 결혼했다. 다른 것은 모르겠다. 분명한 것 하나는 아내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다. 아내도 글 쓰는 일을 하고 있다. 아내가 같은 일을 해서 도움이 됐다. 나의 첫 번째 책이자 스스로 글쓰기 책의 전범(典範)이라고 우기는 <대통령의 글쓰기> 최초 독자도 아내였다. <대통령의 글쓰기> 마지막 꼭지는 원래 그 자리가 아니었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옮기라고 했다. 그 꼭지가 맨 끝에 위치한 것이 화룡점정이었다고 많은 독자가 말한다. 

아내 덕분이라는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아내는 늘 칭찬한다. 내가 아는 나는 60점에 불과하다. 아내는 나를 80점이라고 한다. 당신은 할 수 있다고, 지레 겁먹었을 뿐이라고, 그만큼 노력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나를 60점으로 평가하는 사람을 보면 아내는 화를 낸다. '강원국을 뭐로 아느냐, 얻다 대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처음엔 꿍꿍이로 알았다. 그래야 내가 움직일 테니까. 그러나 30년이다. 일관되게 속일 순 없다. 진심이란 걸 5~6년 전에 알았다. 아내 친구를 만났는데, '자기 남편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친구는 처음이었다'며 나보고 좋겠단다. 아내는 나를 진짜 80점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직장에서 글 잘 쓰는 법을 물으면 나는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이렇게 답한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세요." 진심이다. 잘 쓰고 싶으면 '잘 쓰는 사람'이 되면 된다. 글솜씨와 관계없이, 저 친구는 글 좀 쓴다고 소문나는 게 중요하다. "저 친구는 글 좀 써"라는 입소문이 나면 시비 걸지 않는다. 그 사람이 쓴 글에 대한 지적이 줄어들고 반응이 좋으면 자신도 그런 평판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결과적으로 글을 잘 쓰게 된다.

반대로, '나는 글을 못 쓴다, 글쓰기가 싫다'고 앓는 소리를 하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격이다. 그런 사람의 글은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한다. 지적해줘야 할 것 같은 사명감에 불탄다. 글 쓴 사람은 결국 자신감을 잃고 실제로 글을 못 쓰는 사람이 된다.

긍정과 부정의 비율이 3:1일 때 좋은 결과


글은 칭찬을 먹고 자란다. 두 가지 경우를 대비해보자. 나보다 글쓰기 실력이 좋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글쓰기 가르침을 받았을 때 어느 쪽이 더 큰 성장을 이룰 수 있을까. 내 경험으로는 뒤의 경우다. 뛰어난 상사를 만난 적이 있다. 매일 가르침을 받았다. 하루하루 링에 오르는 심정이었다. 한 대도 때리지 못했다. 실력이 모자라니까. 집에 가서 피를 닦고 다음 날은 한 대라도 때리겠다는 각오로 링에 오른다. 내가 다섯 가지를 말하면 그는 여섯, 일곱 가지를 내놨다. 바위에 계란 치기였다.

그는 종이 한 장에 내가 써야 할 글을 그림으로 그렸다. 글의 설계도였다. 나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글을 쓰면서 수없이 지적받으면서 만신창이가 된다. 글이 완성됐고 그가 됐다고 했다. 그때 비로소 처음에 그가 제시한 그림이 무슨 의미였는지 알았다. 나는 다음 글을 쓸 의욕을 잃었다.

이에 반해 신입사원 시절 그분을 만난 것은 내 글쓰기 인생 최대 행운이었다. 그분은 항상 "어떻게 이렇게 잘 쓰느냐"고 놀랐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 내용대로 해보자." 때로는 내용조차 보지 않았다. "자네가 썼으면 오죽 잘 썼을라고." 그에게 그런 소리를 듣기 위해 밤새워 썼다. 나를 믿고 검토조차 하지 않는 그가 더 윗사람에게 꾸지람 듣지 않도록 열심히 썼다. 어떻게 써야 그가 놀랄까 생각하며 썼다. 놀랄 거리를 찾았을 때 흥분했다. 그것을 찾는 과정이 즐거웠다. 나의 직장생활은 그에게 인정받고, 그를 통해 나를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잘 쓰는 사람은 자신이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고, 글쓰기를 즐기며, 글을 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직장에서는 질책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질책과 칭찬 비율이 9대 1 또는 8대 2, 적어도 7대 3 정도 된다. 지적이 상사의 의무라는 생각으로, 가르치겠다는 마음으로, 혹시라도 더 윗사람에게 지적받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문제점을 찾는다. 결과는 어떠한가. 부하 직원은 주눅이 들고 손이 얼어붙는다. 칭찬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혼나지 않기 위해 일한다. 접근 동기가 아니라 회피 동기로 임한다. 창의는 고사하고 무기력과 무력감만 학습하게 된다.

물론 지적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칭찬과 지적 비율은 얼마만큼이 적정할까.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 긍정 심리학자 바바라 프레드릭슨(Barbara Fredrickson)은 "성공한 조직은 칭찬과 긍정이 부정적 반응보다 3배 정도 많다"고 한다. 긍정적인 말과 부정적 말의 비율이 3:1일 때 좋은 결과를 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율이 11:1을 넘어가면 긍정적 말은 도리어 득보다 실이 많다고 한다. 무조건적인 칭찬만이 능사는 아닌 것이다.

EBS TV 다큐멘터리 <공부하는 인간>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봤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등과 서울대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서양과 동양의 공부에 대한 생각 차이를 비교한 실험이다. 결론은 이렇다. 서양 학생은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때 더 열심히 한다. 동양 학생은 자신이 남보다 부진하다고 생각할 때 더 노력한다. 서양인은 더 잘하기 위해 힘쓰는 데 반해, 동양인은 못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글쎄 실제로 그러한지 모르겠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두 가지 점은 분명하다. 서양 학생보다 동양 학생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더 좋은 결과를 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내 경험으로는 그렇다.

지적이 글을 잘 쓰게 만들진 못한다

글에는 네 가지 반응이 따른다. 지적, 위로, 격려, 칭찬이다. 지적은 이렇게 고치라고 한다. 위로는 그 정도면 괜찮다고 한다. 격려는 다음에 잘하라고 한다. 칭찬은 잘했다고 한다. 이 모두 선한 가면을 쓰고 있지만, 글쓰기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역시 칭찬이다. 칭찬은 지적보다 어렵다.

뇌의 속성 탓이다. 칭찬은 뇌의 논리적 영역이 담당하고, 지적은 감정적 영역에서 처리한다. 논리적 근거를 대는 일은 귀찮고 복잡하다. 감정적 반응은 즉흥적이고 수월하다. 또한 뇌는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것에 신속히 반응한다. 그게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잘 쓴 글보다는 못쓴 글, 칭찬할 거리보다는 지적할 게 먼저 눈에 띈다. 논술이나 자기소개서는 잘 쓴 글을 뽑는 시험이 아니다. 지적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글이 뽑힌다. 지적할 빌미를 주지 않아야 한다.

분명한 것은 지적이 글을 잘 쓰게 만들진 못한다는 점이다. 지적은 못쓰지 않게 할 뿐이다. 잘 쓰게 하려면 칭찬해야 한다. 칭찬받는 방법은 세 가지다. 첫째, 우군을 만드는 것이다. 먼 길 함께 가는 글동무가 필요하다. 글을 보여주고 평가받을 최초의 독자가 있어야 한다. 허심탄회한 피드백도 좋지만, 기왕이면 내게 호의적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게 낫다. 가족, 친구, 회사 동료 누구든 좋다. 내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나를 믿고 지지해주는 그 한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그런 친구가 한 명 있다. 나를 잘 쓰는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친구다. 내가 힘들 때마다 그 친구는 늘 내 편이다. 그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자신감이 붙는다. 지속적으로 글을 쓰려면 그런 친구를 가졌는지, 그 친구가 누군지 생각해봐야 한다.

둘째, 남에게 칭찬받는 것에 기대지 않는다.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 잘 쓴다. 내 글의 가치를 남의 평가에서 찾지 말고 스스로 대견해 하자. 나를 믿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내 안의 나를 꺼내 쓸 수 있겠는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를 사랑하며 누구에게 관심이 있겠는가. 스스로 우쭐하며 자신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잘 쓸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잘 써지지 않을 때는 자신을 토닥토닥해야 한다. '그럴 수 있다. 누구나 그런다.' 그러다가 한 줄 내디디면 '잘하고 있어. 고생했어. 대단해. 지금 같이만 해. 잘할 수 있어.' 수시로 칭찬하고 고무하자. 뇌는 칭찬 받는 짜릿함을 기억해뒀다 다시 그것을 느끼기 위해 시도한다. 마치 술 취했을 때 기분 좋음을 다시 느끼기 위해 술을 마시듯. 난 그렇게 살기로 했다.

셋째, 체념하고 초탈한다. 글쓰기가 전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여러 세상일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쓰자. 남에게 도움이 되고 사회에 유익한 글을 쓰자고 마음먹자. 그러면 글쓰기가 편안해진다. 실제로 나의 글쓰기는 네 단계를 밟고 있다. 1단계 남에게 지적받지 않는 글을 쓰고 싶다. 2단계 남에게 칭찬받는 글을 쓰고 싶다. 3단계 스스로 만족하는 글을 쓰고 싶다. 4단계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 싶다. 지금은 3단계 어디쯤에서 서성이며 4단계를 지향하고 있다.

나의 인생 3락(樂)은 술 마시는 것, 또 술 마시는 것, 그리고 칭찬받는 것이다. 글쓰기에도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쓰다 막힌 곳이 뚫렸을 때, 다 썼을 때, 그리고 잘 썼다는 소리를 들을 때다. 그중 으뜸은 역시 잘 썼다는 칭찬받을 때다. 아내가 두고두고 칭찬하는 두 가지가 있다. 아들 이름을 하늘에서 내린 사람이란 뜻의 '하람'으로 지은 것과 <대통령의 글쓰기>를 쓴 것이다. <대통령의 글쓰기>는 인세 영향이 크겠지만, 아무튼 둘 다 글과 관련한 칭찬이다.

나는 오늘도 칭찬을 갈구하며 아내에게 글을 보여준다.
덧붙이는 글 필자 강원국은 청와대 연설비서관을 역임했으며 2014년 <대통령의 글쓰기> <회장님의 글쓰기>를 출간한 이후 글쓰기 관련 강연과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강원국의 글쓰기'는 3월 26일부터 매주 월·수·금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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