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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면 당연히 도시에서 살 거라 생각하던 시골소년이 서울의 삶을 두고 다시 시골로 갔습니다. 소유의 땅도 집도 없고 가족이나 친척도 없는 강원도 홍천에서 짝꿍과 함께 자연농과 시골살이를 배우고 있습니다. 현실과 부딪치고 방황하는 젊은 부부의 작고 솔직한 시골 사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편집자말]
 나는 어쩌다 서울에 애써 얻은 신혼집까지 버리고 강원도 홍천으로 오게 됐을까?
 나는 어쩌다 서울에 애써 얻은 신혼집까지 버리고 강원도 홍천으로 오게 됐을까?
ⓒ 영화사 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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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개봉한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봤다. 이미 같은 이름의 일본 영화 두 편을 다 봤지만 아무래도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우리말을 쓰는 사람들이 나오니 느낌이 달랐다. 일본 영화를 볼 때는 서울에 살 때이기도 했고 외국이라는 거리감도 있어서인지 그저 맛있어 보이는 요리와 멋진 풍경을 즐겼는데, 이번엔 만감이 교차했다.

내가 서울에 살다 홍천으로 온 지 어느새 1년이 됐다. 나는 어쩌다 서울에 애써 얻은 신혼집까지 버리고 강원도 홍천으로 오게 됐을까?

따지고 보면 도시에서 그리 오래 살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중학생 시절까지는 강릉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자랐다. 그땐 어른이 되면 당연히 도시에 살 거라 생각했다. 생각했던 대로 대도시에 살게 된 건 대학교에 들어가던 스무 살부터였다.

서울을 떠났을 때는 스물여덟이었는데, 군대에 다녀온 2년을 빼면 대도시에 산 기간은 6년 정도일 터다. 대학생일 때는 덜했지만 군대를 다녀온 뒤 생활비를 벌며 지냈던 4년은 도시의 삶에 지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우선 이사를 너무나도 자주 다녀야만 했다. 학생일 때는 학기마다, 학생이 아닐 때도 평균 1년에 한번은 집을 옮겼다. 갑자기 집에 물이 차서 퍼내고 벽에 곰팡이가 피는 걸 지켜보는 일이 두 번, 세 번 이어지자 몸도 마음도 쉴 곳을 잃었다. 살림이랄 것도 없는데 이사해보면 그래도 짐이 많다. 매번 집을 구하러 다니고 맘 졸이며 계약을 하고 짐을 옮기고 새 동네에 적응하는 게 참 피곤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시골로 왔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아직 땅주인도 집주인도 아니고 시골도 땅값이 많이 오르고 있어서 어찌 보면 고민을 더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월세 5만 원을 아끼기 위해 반지하나 옥탑방을 수십 개씩 둘러보며 돈 몇 푼에 햇빛과 곰팡이 사이를 저울질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다행스럽다.

이게 말로만 듣던 우울증인가

 시골로 오기 전 가장 지쳤던 건 사람이었던 것 같다
 시골로 오기 전 가장 지쳤던 건 사람이었던 것 같다
ⓒ 영화사 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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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로 오기 전 가장 지쳤던 건 사람이었던 것 같다. 서울엔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게다가 당시 하던 활동가 일의 특성상 아주 많은 사람을 만나야만 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한 적도 있는데 삼 년 뒤엔 웬만하면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 있고 싶어졌다.

기분만 그런 게 아니라 막판에는 불과 일주일 전에 만나서 서로 소개하고 같이 교육받은 사람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기억을 못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나를 기억하는데 나는 그의 이름도 하는 일도 언제 어디서 만났었는지도 하나도 기억나지 않으니 난감하고 미안했다. 내가 마음으로 챙길 수 있는 만큼의 사람들과만 관계를 맺고 살고 싶다는 바람이 그때 생겼다.

일하는 것도 점점 어려워졌다. 동시에 챙겨야 할 일이 일고여덟 가지씩 되었을 때는 이 일 하다 보면 '저건 어떡하지?' 저걸 하려다 보면 '그건 또 어떡하지?' 하다가 아무 일도 못하고 하루가 다 지나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이부자리에서 눈을 떴는데 몸이 일으켜지지가 않았다. 눈으로 시계만 겨우 확인하고 하염없이 누워있는데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이제 출발해야 늦지 않는 시간인데, 매일 바쁘게 집밖을 나서던 그 시간이 지났는데도 일어나지지가 않았다.

조금 늦더라도 가야지, 가야지 하다가 열두시가 다 되어갈 때야 겨우 옆에 있는 핸드폰을 들어 몸이 안 좋아서 오늘은 못 갈 것 같다는 문자만 한 통 보냈다. 그렇다고 특별히 몸의 어디에 통증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온몸의 근육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한참을 더 그렇게 누워있다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생각이 '이게 말로만 듣던 우울증인가?'였다. 이러다 진짜 무슨 일 생기는 거 아닌가 하니 정신이 좀 들어 병원에 갔더랬다. 의사 선생님께서 묻는 말에 내 상태와 기분과 상황들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떠들었다. 아직 우울증은 아니라고 하시면서 가벼운 초기 증상이니 약한 약을 주겠다고 먹어보고 다시 오라고 하셨다.

선생님이 우울증 아니라고 단호하게 얘기해주셔서 그런지 이런저런 얘기를 실컷 털어놓아서 그런지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기분이 좀 나아졌다. 어쩐지 약을 먹기 시작하면 우울한 기분이 들 때마다 약에 의존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싶어 결국 약도 먹지 않고 병원에도 다시 가지 않았지만 그 우울감과 무기력함은 지금까지도 종종 나를 찾아오고 있다.

견딜 수 없었던 서울의 일상들

 언제까지 누군가가 해준 밥을 먹고 살 수 없듯이, 언제까지 누군가가 키워준 먹을거리들을 먹고 살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언제까지 누군가가 해준 밥을 먹고 살 수 없듯이, 언제까지 누군가가 키워준 먹을거리들을 먹고 살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 영화사 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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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점점 견딜 수 없어졌던 서울의 일상들이 있다. 아무렇지도 않다가도 한 번씩 왜 이렇게 살고 있나 싶어지는 순간들 말이다. 출퇴근길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내가 찌그러지던 만원 지하철, 거기서 나와도 숨 한번 크게 들이쉬기도 싫은 미세먼지 가득한 공기가 그랬다.

또 하루종일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알 수 없는 것들만 그것도 비싼 돈을 줘가며 먹고 있을 때가 그랬다. 어릴 땐 돈가스, 피자 먹으러 가자고 조르던 아이였는데 서울에 몇 년 살다보니 할머니가 지겹도록 해주던 미나리, 가지, 오이, 옥수수, 감자 반찬이 얼마나 맛있는 것이었는지 알게 됐다. 집 앞에서 아침에 딴 가지로 할머니가 해주시던 가지볶음의 맛을 어떤 맛집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머나먼 사람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지고 알 수 없는 것들로 범벅된 것들을 소비하며 사는 것도 싫었다. 도시에 살면 어쩔 수 없이 그것들을 소비해야 하고, 그 구조가 유지되는 데 힘을 보태게 됐다. 그러지 않으려면 직접 뭔가를 만들어 내거나 적어도 그런 사람들 곁에 가서 사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 자취를 했을 때 내가 밑반찬은 고사하고 이십 년을 매일 먹던 밥조차도 제대로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충격 받았다. 살기 위해서 당연히 조금씩 요리를 배워나갔다.

이젠 농사도 비슷한 느낌이다. 내가 매일 먹는 쌀과 배추와 오이와 같은 것들을 조금쯤은 직접 키워서 먹을 줄도 알면 좋겠다. 언제까지 누군가가 해준 밥을 먹고 살 수 없듯이, 언제까지 누군가가 키워준 먹을거리들을 먹고 살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계속 그러자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데 그것보다 그 돈을 벌 노력과 시간을 좀 줄여서 직접 키우고 직접 해내는 데 쓰는 게 어쩌면 더 경제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짝꿍과 만난 것도 이 결정을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혼자서도 시골에 갈 이유를 쌓아가고는 있었지만, 언제 어디로 어떻게 갈지는 막연할 뿐이었다. 연애하던 시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둘 다 시골로 가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처음에 짝꿍은 서울에서 5년이나 10년은 더 돈을 벌어서 가야하는 것 아닐까 하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우리 둘이 버는 수입을 냉정하게 바라보았을 때 서울에 있으면서 생활비로 빠져나가는 돈이 만만치 않았다. 가파르게 오르는 땅값을 따라잡을 만큼 돈을 모으는 건 어려워 보였다.

짝꿍과 함께 '지구학교'에 가다

지구학교 모내기 지구학교에 참여한 첫 해에 처음 해본 손모내기
▲ 지구학교 모내기 지구학교에 참여한 첫 해에 처음 해본 손모내기
ⓒ 김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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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서울에서도 큰 돈 못 벌고 있는데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당장 하자고 설득했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가야 싫어지면 도로 서울로 돌아오든 처음 간 곳에서 다른 시골로 옮기든 농사를 한 해라도 더 배우든 할 수 있으니 더 좋을 거라고.

짝꿍도 내 이야기에 동의했지만 막상 당장 어디로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인연이 닿은 곳이 홍천이었다. 시작은 '지구학교'였다. 이런저런 곳에서 하는 귀농학교, 교육프로그램을 찾다가 짝꿍이 지구학교를 찾아낸 것이다.

지구학교는 한국에 자연농을 소개하고 실천하고 있는 최성현 선생님께서 한 달에 한 번씩 총 10번 모이는 1년 과정을 통해 자연농으로 농사짓는 방법을 알려주고 실습해보는 모임이다.

자연농은 지구를 살리는 지속가능한 농사 방법이면서도 땅만 있으면 기계나 자본 없이 할 수 있는 농사로, 모든 면에서 우리가 찾던 바로 그런 농사였다. 그걸 심지어 무료로 가르쳐준다니! 우린 당장 지구학교에 수강신청을 했다.

1년간 지구학교를 들으러 매달 한두 번씩 홍천엘 왔다갔다 했다. 대중교통으로 가다 보니 아침 9시까지 도착하기가 어려워 지각도 자주 했지만 갈 때마다 '개구리'(최성현 선생님은 본인을 개구리라 불러달라고 하신다)의 논밭에 펼쳐진 비닐도, 맨땅도 보이지 않는 풀과 작물들 풍경이 너무 좋았다. 논 위에 잠자리가 떼를 지어 날고 있는 모습을 보던 감동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지구학교에서 만난 개구리와 선배라고 할 수 있는 모래무지, 무당벌레 부부. 그리고 실제로 농사를 지으며 자연농을 더 배우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홍천 남면 시동리 고음실마을에 땅이 생겼다. 집도 가까운 농가주택을 얻고 싶었지만 적당한 집이 없었다.

시골에서 집 구하는 게 서울에서처럼 부동산 돌아다니면서 몇 달 만에 할 수 있는 일 아니었다. 거기 살면서 오랜 기간 주민들과 관계를 맺어야 할 수 있는 거였다. 그래서 일단 열 평 남짓한 원룸을 월세로 구했다. 그렇게 함께 서울을 떠나 부랴부랴 홍천으로 왔다. 한해 농사가 시작되던 지난해 3월 말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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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서울에서 이런저런 활동을 하다, 지금은 홍천에서 자연농을 배우고 있는 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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