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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이 땅의 평범한 여성들을 강제로 전쟁터에 끌고 가 위안부라는 이름 아래 성노예로 만든 일본의 인권 유린을 비판하고, 피해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졸속으로 체결한 한일위안부 합의의 폐기를 촉구하는 의미에서 전국 각지에 세워진-지금도 세워지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답사한다. 

이는 '국가'라는 이름 아래 조직적으로 전개된 여성 인권 유린과, 아직도 이를 공식 인정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필자만의 평화적인 방법이며, 부끄럽고 잘못된 과거를 바르게 청산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이 사회의 여러 노력에 작은 보탬이 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단, 그냥 찾아다니기만 해서는 의미가 적다고 보고, 가능하면 소녀상이 세워진 지역의 역사성과 소녀상 건립이 갖는 의미, 소녀상의 모습과 상징성 등을 다양하게 알아보고 그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다. (이는 단순한 평화의 소녀상 답사를 넘는 지역 답사의 의미도 갖게 됨을 의미한다) - 기자 말

우리나라의 수많은 소녀상들 중 가장 독특하고 창의적인 소녀상이다.
▲ 부천 평화의 소녀상 우리나라의 수많은 소녀상들 중 가장 독특하고 창의적인 소녀상이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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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로 성장한 이방인들의 도시, 부천

아침부터 푹푹 찌는 날씨였다. 목덜미는 이미 끈끈하게 젖어 있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옷에 밴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풍겨왔다. 지하생활자들만의 냄새였다. - 양귀자 소설 <원미동 사람들>의 <지하 생활자> 중

1980년대 원미동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연작 형식으로 펼쳐낸 소설집, <원미동 사람들>. 특별나고 거대한 사건은 없지만, 개개인에게는 큰 사건들이 당시 소시민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어떤 반응을 이끌어냈는지 담담하게 그려낸 이 소설은 단순히 원미동 사람들을 넘어선, 1970~1980년대 도시민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보편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하지만 그 후로 바뀐 세상처럼 이미 소설 속 원미동은 없다.

일찌감치 서울 중심부과 인천을 연결하는 경인선과 지하철 1호선 덕에 서울에서 살기 힘든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살았던 동네, 그래서 전철역을 중심으로 서울로 출퇴근하는 서민들이 유달리 많이 산 곳, 그러다보니 저마다 출신지도 다른 이방인들의 고장, 소설 <원미동 사람들>의 배경이 된 도시, 경기도 부천시이다.

지금 부천시는 같은 경기도의 성남과 안양처럼 원래 있던 거주지들 외에 신도시가 더 붙어 큰 도시로 성장한 고장으로, 원미구와 소사구, 오정구의 세 개 구로 이루어진, 인구 87만 명의 도시이다. 매년 인구가 늘고 있어 몇 년 지나면 90만 명을 넘길 것으로 추측된다.

비교적 근래에 형성된 중동, 상동 지역은 도로가 바둑판처럼 반듯하고 각종 빌딩과 아파트 단지가 많이 들어서 있는데 비해, 과거부터 있었던 원미동, 소사동, 역곡동 일대는 많이 바뀌긴 했지만, 아직 과거의 흔적을 품고 있다. 

1970년대 이후 본격적인 산업화로 인한 인구의 도시 집중, 수도권 과밀화, 신도시 개발 등 최근 50년간 우리 현대사의 빛과 그림자를 그대로 구현한 도시가 부천시다.

토박이들이 거의 없는 이방인들의 도시지만, 부천시는 자체적으로 부천시만의 고유성, 개성을 갖기 위해 많이 노력해 왔다. 특히,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관심으로, 저예산 및 독립영화의 메카를 지향하는 국제 판타스틱영화제의 개최, 일찍부터 한국 만화 영상 진흥원을 설립하고 만화 및 애니메이션의 고장을 지향한 국제 만화축제의 개최, 국내 정상급 교향악단 부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설립과 지원 등 많은 일을 했고, 성과도 거두고 있다. 이를 통해 보면 아마도 부천시의 지향은 '문화예술의 도시'인 듯하다.

한때 소시민과 지하 생활자들의 애환이 담긴 고장이었지만, 지금은 자체적인 동력으로 도시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부천시, 그곳에도 평화의 소녀상이 있다.

소녀상 뒤에는 위안부 기림비 건립 추진위원회에서 새긴 비석이 있다.
▲ 부천 평화의 소녀상 소녀상 뒤에는 위안부 기림비 건립 추진위원회에서 새긴 비석이 있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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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상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다

부천 평화의 소녀상은 중동 신도시 한복판 안중근공원 안에 있다.

부천시는 20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 반입된 안중근 의사의 동상을 부천에 유치해 안중근 공원을 조성했다. 본래 안중근 동상은 2006년 하얼빈 시에 건립되었으나, 중국 중앙정부의 외국인 동상 건립 불허 방침에 따라 철거, 방치되어 있다가 2009년에 와서 부천시로 옮겨진 것이다.

부천시가 안중근 동상을 유치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미 1995년 부천시는 중국 하얼빈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교류해 왔기 때문이다. 안중근 공원에는 그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005년에 세운 기념비가 있다. 중국어와 한글, 두 개 국가의 언어로 같은 내용을 나란히 새겨놓았다.

안중근 공원에 있다. 안중근의 일생과 중요한 순간들이 부조로 표현되어 있어 그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 안중근 부조 벽화 안중근 공원에 있다. 안중근의 일생과 중요한 순간들이 부조로 표현되어 있어 그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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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동상 옆으로는 안중근의 일생과 그의 말과 글이 새겨진 조형물들이 만들어져 있다.  그의 유묵 22점을 조형물 혹은 기념비, 비석 등 다양한 형식으로 새겨 놓은 것도 인상적이다. 특히, 그의 일생과 중요한 순간들을 새긴 부조 벽화는 평면적이지 않고 역동적이다. 그냥 행정적인 절차에 의해 기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존경의 마음을 담아 상당히 공을 들였다는 느낌이다.

안중근 동상, 부조 벽화와는 약간 거리를 둔 공원 중간 부분에 평화의 소녀상이 있다. 이 평화의 소녀상은 2016년 2월 3일에 세워졌다. 본래 부천시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 건립 추진위원회는 2015년 3월에 이미 2540만 원을 모금해 소녀상을 제작했으나, 건립비용이 부족해 한국 여성지도자연합회 부천지부 사무실에 임시로 보관해 왔다. 

그러다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일본의 소녀상 이전 요구가 표면화되자 이에 대한 국민적 반발과 분노가 일었고, 이때 추진위원회가 건립비용 마련을 위해 다시 모금운동을 벌여 1560만 원의 건립비를 마련하였다.

소녀상 앞면은 모두 거울로 되어 있다. 얼굴 없는 소녀상인 셈. 앞 벽 조형물을 비추고 있지만, 그 앞에 사람이 서면 그 사람을 비춘다.
▲ 부천 평화의 소녀상 앞면 소녀상 앞면은 모두 거울로 되어 있다. 얼굴 없는 소녀상인 셈. 앞 벽 조형물을 비추고 있지만, 그 앞에 사람이 서면 그 사람을 비춘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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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세워진 부천 평화의 소녀상은 전국의 그 어떤 소녀상보다 독특하고 창의적이다. 기존 소녀상의 틀을 완전히 벗어났다.

전체적인 모양은 한 소녀가 그 앞에 세워진 직사각형의 벽 조형물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소녀상의 높이는 160cm이며, 뒷모습은 단정하게 땋은 머리에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버선을 신고 있다. 그런데 이 소녀의 앞면은 전체가 거울이다. 옆에서 보면 옆모습을 수직으로 잘라낸 단면이라 반쪽짜리 사람의 모습이다. 소녀상 앞면의 거울에는 그 앞의 벽이 그대로 비친다. 만약 소녀상 앞에 선다면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비쳐 보이는 것이다.

거울의 의미는 다양하다. 따로 설명해 놓지도 않았으니 보는 사람이 각자의 해석대로 판단하면 된다. 소녀상을 보며 현재의 자신을 되돌아보라는 반성의 의미이기도 하고, 지금의 내가 그 시절에 살았다면 위안부 피해자는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일본 정부와 과거 일본군이 그 앞에 서서 진정한 반성을 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거울은 항상 보는 사람을 비추는 것이니 보는 사람이 누구든 반성의 의미가 포함된 것이겠다.

그러고 보면 미투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요즘 상황에서는 정말 우리 자신을 비추어봐야 할지 모르겠다.

소녀상은 위안부 피해자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일차적으로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들을 가리키지만, 넓게는 부당한 권력과 억압에 희생당한 피해자들 모두를 지칭한다. 그래서 소녀상은 일제 강점기에 강제 동원된 위안부 피해자만이 아닌, 지금 이 시대 권력과 억압, 성폭력으로 고통받은 피해자들의 상징이기도 하다.

소녀상의 얼굴과 앞모습 대신 전면이 거울로 되어 있는 것은 이러한 진실을 용기있게 마주 대하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이제는 일제와 일본군이 아닌, 현재의 또 다른 억압과 권력에 의한 폭행을 바라봐야 한다. 이러니 이 소녀상은 끊임없이 현재의 우리를 비쳐보도록 하는 자화상의 역할을 한다. 때로는 우리의 치부까지도 남김없이 들춰내서 보여주는 거울인 것이다.

소녀상 옆면은 마치 세로로 깨끗하게 잘라낸 듯 반쪽짜리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 부천 평화의 소녀상 옆면 소녀상 옆면은 마치 세로로 깨끗하게 잘라낸 듯 반쪽짜리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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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소녀상 앞 벽 조형물 좌측 상단에는 큰 글씨로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고 새겨져 있다.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마음을 때린다. 정작 우리 자신은 어떤가.

벽 조형물에는 여러 명의 소녀가 똑같은 모습으로 뒷모습만 보이고 있다. 그들에게는 저마다 같은 길이의 그림자가 옆으로 누워 있다. 오른쪽 상단으로 걸어가는 이들 소녀의 걸음걸이는 끝나지 않는다. 벽에 새겨진 소녀는 여덟 명이지만, 누가 봐도 이건 여덟 명이 아니다. 숱한 소녀들의 끊임없는 발걸음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며, 또 다른 의미로 계속된다'는 뜻이다.

순간 소름이 끼친다. 마치 현재의 미투운동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하다.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는 글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똑같은 뒷모습이 소녀들이 우측 상단으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된다.
▲ 부천 평화의 소녀상 앞 벽 조형물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는 글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똑같은 뒷모습이 소녀들이 우측 상단으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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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과거 일본이 이 땅을 강제 점령하고 수많은 여성들을 전쟁터에 끌고 가 성노예로 삼았던 역사를 잊지 말고 일본으로부터 진정한 사과와 법적 배상을 받으며 진상을 규명하고 명예 회복을 해야겠지만, 우리 안에 있는 또 다른 종류의 성폭행과 억압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감추고 싶었던 불편한 진실까지도 소녀상 거울 앞에서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이 평화의 소녀상이 지향하는 진정한 의미의 평화로운 세상이 앞당겨질 것이다.

사실 여러 성폭행 가해자들의 태도를 보면서, 그들에게서 일본 정부가 지금까지 해온 발언, 태도와 비슷한 면을 보았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위안부가 성노예라는 증거는 없으며, 위안부는 그들이 원해서 한 것이다, 강제성이 없었다, 이 문제에 관해 이미 일본은 유감과 사죄를 표했다 등등 일본 정부나 그 관계자들이 했던 이 발언들이 우리 안에서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정말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제 소녀상에서 발길을 돌린다. 부천 평화의 소녀상에는 부조의 소녀까지 모두 아홉 명의 소녀가 있지만, 누구에게도 소녀의 얼굴은 없다. 잃어버린 그녀들의 얼굴을 되찾고 새로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현재 우리의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제 강점기 일제와 일본군, 그리고 지금의 일본 정부로부터, 그리고 현재 우리 내부의 고질화된 성폭력에서부터.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들어와 복숭아를 생산하기 시작해 복사골로도 불리고, 한때는 수원의 딸기, 안성의 포도와 함께 경기 3미(美)라고도 했던 복숭아의 고장, 산업화 이후 서민들의 집단 거주지였다가 신도시 개발 등 도시의 확장과 팽창으로 100만을 바라보는 대도시로 성장한 부천.

문화 도시로의 전망을 위해 영화와 만화를 집중 육성한 이 부천시에 무척 뜻 깊고 인상적인 소녀상이 있다는 것은 부천시의 시민 의식과 문화적 역량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된다. 아무쪼록 부천 평화의 소녀상이 부천시민들에 의해 오랫동안 잘 보존되기를 바란다.

안중근 공원의 안중근 동상 뒤에서 바라본 공원 풍경
▲ 부천 안중근 공원 안중근 공원의 안중근 동상 뒤에서 바라본 공원 풍경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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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정보

주소: 경기도 부천시 송내대로 236

* 서울 외곽순환도로 중동IC에서 나와 중동대로 사거리에서 우회전한 다음 첫 번째 U-턴 신호에서 유턴한 뒤 오른쪽 도로로 들어간다. 그리고 바로 좌회전하면 안중근공원 공영주차장이 있다. 이곳에 차를 세우고 공원에 들어간다.
* 대중교통으로는 지하철 7호선을 이용, 부천시청역 하차, 3번 출구로 나와 약 200m 걸어가면 안중근공원에 닿는다. 

* 안중근공원에서 상동호수공원이 멀지 않다. 평화의 소녀상을 답사한 다음 상동호수공원(지하철로는 7호선 삼산체육관역)으로 이동하여 호숫가를 걸어보는 것도 좋고, 공원 북쪽의 한국 만화박물관과 아인스월드에 한번 들러보는 것도 괜찮다. 아이들을 데리고 간 부모라면 아이들이 꽤 좋아할 곳들이니 겸사해서 가보면 좋다.


태그:#부천 평화의 소녀상, #안중근 공원 , #안중근 동상 ,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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