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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코스 정도는 해줘야 진짜 뛰어봤다 할 수 있는 거지."

2년 전, 매일 아침 10km씩 뛴다는 내 말에 누군가 던진 말이다. 처음엔 무슨 풀코스 같은 소리냐며 흘려들었지만, 결국 그 말이 씨가 됐다. 지난 2월 25일, 풀코스(42.195km)를 완주하고 왔다. 그것도 일본 도쿄에서.

 2018 도쿄 세계마라톤 참가 후기
 2018 도쿄 세계마라톤 참가 후기
ⓒ 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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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아파트 주민 센터 내 피트니스센터였다. 아침마다 30분씩 뛰었다. 살 빼려고.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매일매일 뛰다 보니 조금씩 뛰는 것 자체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이어폰으로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가슴이 터지기 직전까지 뛰는 그 순간이 좋았다. 30분은 1시간으로 늘었고, 시속은 평균 7~8km에서 10~11km로 빨라졌다. 뛰는 것이 운동이 아니라 일상이 되어가던 시점에, 누군가가 내게 마라톤 풀코스 한 번 뛰어보라는 말을 꺼냈다.

흘려듣는 척했지만, 사실 솔깃했다. 괜스레 오기도 생겼다. 그래서 12.195km를 시작으로, 15km, 21km까지 정복해갔다. 하프를 완주한 이후, 그제야 풀코스에 대한 용기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뛴 지 자그마치 4년 후의 일이다.

 2018 도쿄 세계국제마라톤 공식 로고
 월드 마라톤 메이저스 중 하나인 2018 도쿄마라톤 공식 로고
ⓒ 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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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도쿄마라톤을 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를) 첫 풀코스인데 특별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까리하게(멋지게라는 뜻)' 세계급으로!
2. '세계 6대 마라톤'으로 불리는 '월드 마라톤 메이저스(WMM)'는 해외에서 열린다.
3. 나는 돈이 없는 사회 초년생이다. 장기 투숙은 그림의 떡.
4. 그러니 시차가 커서도 안 된다. 체류기간이 짧을 테니, 바로 가서 뛸 수 있어야만 한다.

월드 마라톤 메이저스는 보스턴, 런던, 뉴욕, 베를린, 시애틀, 도쿄에서 열린다. 그렇다면 이 중에 시차도 적고, 품도 많이 들이지 않고 뛸 수 있는 곳은? 답은 명료하다. 바로 도쿄다. 하지만 정작 찾아보니 국내 대회처럼 무작정 뛰고 싶다고 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려 참가 경쟁률만 10:1이 넘는단다. 그래서 사실 안 될 거라 생각하고 넣었다. 설마 내가 10명 중 한 명이 되겠어?

 2018 도쿄 세계국제마라톤 참가자 확정 메일
 2018 도쿄마라톤 참가자 확정 메일
ⓒ 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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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맞았다. 내가 된 거다. 대회 일은 2월 25일. 그 날부터 d-day가 시작됐다.

금주, 식이조절

사실 d-day를 세웠다 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 평소대로 전날 술을 마셨든, 그래서 늦잠을 잤든 매일 아침 10km를 달리는 일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래도 풀코스를 뛰는 만큼 적어도 대회가 있는 2월에는 좀 더 관리를 해줘야만 할 것 같았다. 해서 달력에 저 두 단어를 큼지막하게 적어놨다.

그래서 잘 지켰냐고? 일종의 신년 다짐 같은 계륵이었다. 심지어 마라톤을 위해 일본으로 가기 직전까지, 아니, 마라톤 직전 날까지도 맥주와 함께했다. 결국, 금주와 식이조절이 아닌, 맥주를 포함한 식이 유지를 한 셈이다.

준비물 : 약, 에너지 젤, 노래

 2018 도쿄 세계마라톤 참가 후기
 2018 도쿄 세계마라톤 참가 후기
ⓒ 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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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다 약이다. 노래도 만인이 인정한 '합법적 마약' 아닌가. 먼저 마라톤 당일 아침에 아미노산에 타우린, 카페인까지 모두 때려 넣고 달려나갔다.

그래도 불안해서 주머니에 에너지 젤 두 개를 챙겼다. 에너지 젤은 뛸 때 먹는 용도다. 체력을 다시 끌어올려 준단다. 한 번도 먹어본 적은 없었지만 풀코스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가라앉히기 위해선 반드시 챙겨야만 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핸드폰 플레이리스트에는 bpm 한껏 끌어올릴 수 있을 법한 노래로 엄선했다. 내 천군만마들이다.

 2018 도쿄 세계국제마라톤
 2018 도쿄마라톤. 출발 지점의 모습이다.
ⓒ 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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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선~20km

아침에 쏟아부은 각성제들 덕분일까, 아니면 어제 눈 딱 감고 마신 맥주 한 잔의 위력일까. 평소엔 10km 달리고 나면 헉헉대던 내 폐가 18km 지점에서도 정상적인 호흡을 유지하고 있었다. 몸 상태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이 정도면 첫 마라톤에서 완전 선방하겠는데?

하지만 이런 건방진 생각은, 5분도 안 돼서 와장창 깨지고 만다.

20km~30km

21km에서 첫 반환점을 맞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첫 에너지 젤을 깠다. 까야만 했다. 분명 체감상 10km를 달린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고작 2km밖에 안 뛴 거다. 망했다는 생각과 함께 곧장 삼킨 에너지 젤.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짓말처럼 다리에 힘이 붙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힘든 게 사라질 리가 없다. 슬슬 신체 내 모든 장기들이 '작작 뛰라'는 신호를 보낸다. 마치 온몸을 얻어맞은 상태로 달리는 듯한 기분. 하지만 여기서 멈춰서도 안 된다. 그 순간 다리는 굳고, 완주는 불가능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2018 도쿄 세계국제마라톤
 2018 도쿄마라톤. 도쿄 마라톤의 특징은 코스프레를 하며 뛰는 이들이 종종 눈에 띈다는 점이다.
ⓒ 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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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km~35km

이쯤 되면 육체적 고통이 그나마 남았던 인내심마저 갉아먹는다. 무릎은 아려오고 다리는 모래주머니를 매단 것처럼 무겁다. 발에서 시작됐던 고통이 골반을 넘어 허리까지 퍼진다. 걸음마다 관절 하나하나에 모든 충격이 새어 들어오는 듯하다.

발로 땅을 구르는 것이 아니라, 무릎으로, 아니, 하반신 전체로 바닥을 내딛는 것 같았다. 해서 두 번째 에너지 젤을 투입했지만 역부족이었다. 1분, 1초의 흐름을 온몸으로 온전히 느끼게 되는 순간. 그렇게 죽을 힘을 다해 내디뎠던 수만 번의 걸음들. 마지막 40km대로 진입하며 들었던 기억이다.

그리고 마침내 42km

모순적이게도, 마지막 구간은 고통보단 벅차오름이 더 컸다. 결승점으로 가는 길목에 양옆을 가득 메우고 있던 수많은 관중들이 한몫했다. 내가 또 언제 이런 낯선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도쿄를 내달릴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과 한계치에 다다른 고통이 공존하던 순간, 저 멀리서 '피니시(finish)'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2018 도쿄 세계국제마라톤
 2018 도쿄마라톤 완주 후
ⓒ 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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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 먹던 힘이 이런 거라면, 내 체력적 전성기는 꼬꼬마 때였을 테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남아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미친 듯이 내달렸다. 그렇게 결승점에 발을 내디딘 후에도 믿기지 않았다. 내가 4시간을 넘게 내달렸다는 것도, 42km를 두 다리로 완주했다는 사실조차도. 살면서 스스로에게 감동받았던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랬다.

 2018 도쿄 세계국제마라톤
 2018 도쿄마라톤 풀코스(42.195km) 완주자들에게 주어지는 기념품이다.
ⓒ 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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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온몸에 아로새겨졌던 고통은 두루뭉술한 기억으로, 그 기억은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았다. '도쿄 마라톤 완주'라는 단어가 박힌 메달이 그 증거다. 오롯이 나만 알고 나만 기억하는, 4시간 35분간의 이야기다.

마라톤을 마친 후, 한동안 다리를 제대로 가누질 못했다. 퉁퉁 부은 다리를 끌고 계단을 내려갈 때면 근육이 찢기는 기분이었다. 이틀 뒤, 한국으로 복귀한 후에도 여전한 통증 탓에 일주일가량 온몸에 파스 냄새를 휘감고 다녀야 했다.

그럼에도 '사서 고생했다'는 생각은 든 적이 없다. 오히려 이후 새로운 목표가 하나 생겼다. 기회가 닿는 대로 다시 세계 6대 마라톤 무대를 찾는 것이다. 물론, 그때는 도쿄를 제외한 다른 대회의 출발선에 서 있을 것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 하나로 무작정 달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다 또다시 한동안 다리를 절룩거리며 돌아다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악조건'을 차치하고서라도 달리는 이유가 있다.

 세계 6대 마라톤 메달. 6개 도시 (보스턴, 런던, 뉴욕, 베를린, 시애틀, 도쿄)가 그려져있다.
 세계 6대 마라톤인 월드 마라톤 메이저스 메달. 6개 도시(보스턴, 런던, 뉴욕, 베를린, 시애틀, 도쿄)가 그려져있다.
ⓒ 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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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고 있는 동안은, 누구와도 얘기하지 않아도 괜찮고 누구의 얘기를 듣지 않아도 된다. 그저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면 되는 것이다.'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가 없으니, 마라톤 마니아로도 불리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빌려본다. 결국, 이유는 단순하다. 순전히 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 나를 옭아매던 모든 잡 생각을 떨친 채 나 자신의 내면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것.

완주 후에 스스로에게 느낄 수 있는 자부심과, 그때 들이키는 청량한 맥주 한 모금의 쾌감은 덤이다. 물론 이런 말을 들어도 뛰어보지 않은 이들에겐 여전히 남의 얘기처럼 들릴 것도 잘 안다. 그래서 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은, 무책임하게도 한 번 뛰어볼 것을 권유하는 것뿐이다.

거리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나가서 뛰어보면 안다. 무엇이 됐든, 뛴 후에야 경험할 수 있는 당신만의 세계가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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