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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나는 그야말로 게으름이 몸에 밴 아이였다. 오죽하면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엄마에게 내가 하루에 딱 세 번, 등교할 때와 화장실을 사용할 때 그리고 집으로 갈 때를 제외하곤 움직이지 않는다고 농담을 할 정도였을까. 그래서인지 그 시절 나는 팔 다리는 가늘지만 배는 볼록한 흔히 말하는 '마른 비만'인 체형을 가지고 있었다.

부모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나의 깊은 게으름은 결국 먹는 것조차 귀찮게 여기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혼자 살게 된 20대 이후 '나는 있으면 먹고 없으면 말고'라는 생활 방식을 고수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여서 나온 배를 어떻게 했으면 하던 주변의 안타까움이 일거에 해결된 셈이다.

아무튼 지금의 나는 대한비만학회의 기준에 따르자면 저체중 상태다. 흔히 말하는 마른 몸을 가진 셈이다. 한국 사회는 유독 몸과 외모에 대한 사람들의 간섭이 심한 곳이다. 사실 그런 말들은 대부분 살이 있는 몸을 향하기에 딱히 괴로울 게 없으리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성에게 마른 체형이 표준이자 이상이라면 남성에게 같은 몸은 일탈을 의미한다. 요즘 힘든 일이 있냐는 질문은 예사다. 아예 대놓고 어디 아프냐는 사람들도 종종 마주친다. 사실 이정도야 나를 아끼는 마음에서 비롯된 걱정이라는 점에서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하지만 '너무 마르면 여자들이 별로 안 좋아 한다'는 식의 이야기부터는 거슬리기 시작한다. 그러길 원한 적도 없는데?

몸에 대해 이야기 하기가 씁쓸한 이유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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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규정하는 '뚱뚱한 몸'을 지닌 사람에게 비할 것은 못되지만 어쨌든 나 역시도 내 몸에 대해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인 인식을 많이 접해왔다. 이를테면 남성인 친구들은 나에게 '몸집이 너무 작아서 여자애 같다'는 식의 농담(?)을 던지곤 한다. 반면 여성인 친구들은 나를 보며 너처럼 마를 수 있다면 좋겠다는 한탄을 늘어놓는다.

솔직히 어느 쪽도 딱히 좋지는 않다. 동성 친구들에게 나는 어딘가 부족한 몸을 가진 사람이 되고, 거꾸로 이성 친구들에겐 그들이 느끼는 결핍을 환기시키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보다 마음이 아픈 쪽은 후자다. 결국은 이 모든 게 여성에게 부과된 '날씬한 몸'에 대한 규범 탓이긴 하겠지만,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자괴감을 표하는 친구들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심란하다.

이런 이유로 나는 내 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 부정하는 표현을 많이 쓰게 되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아프지 않아요. 제가 작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그래서 더 큰 몸집을 가지고 싶지 않아요. 넘어져도 안 부러져요 등등. 사실 나는 꾸미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자기 만족을 위해서고 그래서 다른 사람의 시선에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를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

그것은 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 나는 내 체형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내 몸을 둘러싼 말이 온통 부정과 부인뿐인 것은 씁쓸하기 그지없다. 마치 규정 위반 딱지를 온 몸에 덕지덕지 붙이거나 거대한 해명문을 망토처럼 둘러 쓴 느낌이다. 내가 내 몸에 대한 자긍심 같은 걸 얻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다못해 지금과는 다른 말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을까?

<채식주의자>에서 발견한 생각지 못한 문장

엉뚱한 이야기지만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읽다 그런 문장을 발견했다. 모종의 이유로 육식을 거부하게 된 소설의 주인공은 야위어 가는 자신의 몸을 이야기 하며 이런 표현을 쓴다.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한편으로는 이런 말도 한다. '왜 나는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독백이 등장한 맥락과는 별개로 내게 이 문장은 무척이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크다, 작다, 예쁘다, 못 생겼다가 아닌 자신의 몸을 설명하는 새로운 방식. 아무것도 죽일 수 없는 몸, 날카로운 몸과 같은 표현들. 분명 화자는 무거운 감정으로 그 말들을 했겠지만 나는 그 순간에 유레카를 외쳤다. 여기에 언어가 있다.

나는 요즘 나의 몸을 '작다고 생각하지 않아'나 '마른 게 싫지 않아'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 한다. 이를테면 너무 왜소한 게 아니냐는 사람에게 나의 몸은 큰 공간을 차지하지 않아서 좋다고 답하는 식이다. 대중교통을 탈 때에 상대적으로 편하다고 너스레를 떤다. 때로는 나의 몸이 위협적이지 않고 그래서 마주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 있어서 마음에 든다고도 말한다.

피골이 상접했다, 아파 보인다는 사람을 만나면 이제는 그만큼 나는 단단하다고 이야기 한다. 물론 듣는 사람들은 갸우뚱할 만큼 생소한 표현들이긴 하다. 하지만 결핍과 부정 이외에 내 몸을 이야기할 다른 말이 있다는 건 내게 너무 소중하다.

몸을 이야기 하는 새로운 말들을 찾을 수 있기를

사회에는 몸에 대한 많은 말들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언어가 그렇듯 이들은 사람들의 신체에 대한 인식을 구축한다. 그게 좋다면 상관없겠지만 대부분은 편견에 갇혀 있다는 게 문제다. 나보다 살이 있고 굴곡이 있는 몸매를 지닌 한 친구는 춤을 사랑한다. 그녀는 나풀나풀 나비가 날아가듯 스텝을 밟는다.

하지만 겉만 보는 사람들, 몸매에 대한 편견을 가진 사람들은 그 친구가 나보다 가볍게 점프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평생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만 보고 내가 약하며 몸을 쓰는데 젬병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내가 운동에 취미가 있다는 것은 예상치 못한다. 나는 수영을 하며 물살을 가르거나 클라이밍을 하며 매달리고 오르고 뛰는 것을 좋아함에도 말이다.

이 같은 편견은 누군가의 몸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도 그렇겠지만 그러한 체형을 가지고 살아가는 당사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특정한 활동이나 의상, 성격이 어떤 몸에만 어울리리라 여겨지는 인식은 그렇지 않은 몸을 지닌 사람들의 잠재력을 억누른다. 충분히 민첩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이들이 이미 자신은 느리다고 생각해버리거나 스스로의 개성을 더 두드러지게 만들 옷을 선택하지 않고 체형을 '보완'하는 의상을 입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이상적인 규범을 벗어난 몸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다양한 표현들이 더욱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가장 긍정적인 결말은 그냥 몸에 대한 말들이 모두 사라지고 사람들이 서로의 외형에 대해 신경을 꺼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기가 오기 전까지는, 자신의 몸에 대해 쓸 수 있는 말이라곤 변명뿐인 사람들에게 새로운 언어는 무척이나 절실하다.


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창비(2007)


태그:#몸, #채식주의자, #한강,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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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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