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지난 2월 22일 '스토킹·데이트폭력 피해방지 종합대책'을 발표하며 젠더폭력 근절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스토킹 처벌법'을 제정해 스토킹 행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데이트폭력의 경우, 피해 내용과 상습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적정 형량이 선고될 수 있도록 하는 기준을 마련하겠다는 내용이다.

보도에 따르면, 정부는 젠더폭력 관련 범죄 사실에 대한 직접적 처벌 강화뿐만 아니라 공적 차원에서의 예방 및 교육에도 집중할 예정이다. 정부의 '스토킹·데이트폭력 피해방지 종합대책' 관련 기사에서는, 스토킹과 데이트폭력에 관한 잘못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TV강연과 공익광고, 드라마 등 대중매체를 활용해 범죄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방안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중매체, 그중에서도 드라마 콘텐츠는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얼마나 성장했을까? "나랑 밥 먹을래, 나랑 잘래, 나랑 죽을래"라는 명대사로 회자되는 KBS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2004), 까칠한 재벌 2세 남자와 평범한 여자의 사랑을 담은 SBS <파리의 연인>(2004) 등은 2000년대 초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지금 보면 여성을 향한 데이트폭력으로 해석될 수 있는 장면들이 수차례 등장한 바 있다. 심지어 해당 장면들은 지금까지도 '명장면', '명대사'로 기억되며 '폭력의 낭만화'라는 결과를 낳았다.

 드라마 <또 오해영> 중 한 장면

드라마 <또 오해영> 중 한 장면 ⓒ tvN


이후 인기리에 방영된 KBS <꽃보다 남자>(2009)나 SBS <신사의 품격>(2012), 데이트폭력의 개념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난 뒤 선보였던 tvN <또 오해영> KBS <태양의 후예><함부로 애틋하게> SBS <우리 갑순이> 같은 최근작들에서도 폭력적인 장면은 빠짐없이 등장했다.

과연 한국 드라마는 폭력적인 장면을 소거하고는 로맨스 서사를 이어나갈 능력이 없는 걸까? 현재 방영 중인 세 편의 드라마를 톺아보며, 많은 장면에서 묘사된 데이트폭력의 가능성을 알아본다. 

1. 여성을 '들쳐 메고' 차에 '욱여넣는' <라디오 로맨스>

배우 김소현·윤두준 주연의 드라마 <라디오 로맨스>는 톱스타와 라디오 작가의 사랑을 담은 휴먼 로맨스 드라마로, 지난 1월 첫방송됐다. 잘생기고 까칠한 데다 부유한 남성과 평범한 여성의 로맨스를 '신데렐라 스토리'로 그려낸다는 점에서 시청자들에겐 부단히 익숙한 구도의 드라마다.

2화 방송 도입부엔 톱스타 지수호(윤두준 분)를 무리하게 섭외하려다 다리를 다치는 송그림(김소현 분)의 모습이 그려진다. 지수호는 마음이 쓰였는지 데려다주겠다는 제스처를 취하지만 송그림은 "됐어요, 기어서라도 혼자 갈게요"라고 말한다. 지수호는 혼자 가던 송그림을 따라가 갑작스레 그녀를 어깨에 들쳐 메고 자신의 차에 태운다. 그런데 그 과정이 평범하게 태운다기보다 차에 '욱여넣는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정도다.

 드라마 <라디오로맨스>의 한 장면.

드라마 <라디오로맨스>의 한 장면. ⓒ KBS


하지만 드라마에선 해당 장면에 발랄한 선율의 배경 음악을 깔고, 이 장면을 '둘 사이 썸의 시작' 정도의 느낌으로 표현하며 행위의 폭력성을 지워버린다.

이렇게 표현하더라도 해가 떨어진 밤에, 혼자 집에 가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여성을 강제로 들쳐 메고 차에 태우는 행위는 여성의 입장에선 분명히 공포스러운 상황이며 아찔한 폭력이다. 심지어 '네이버 TV' 다시보기 서비스에서는 해당 장면에 <윤두준, 다리 다친 김소현 어깨에 메고 '박력'>이라는 제목을 붙여놓기도 했다.

2. 이 대사, 실제로 했다가는 성희롱... <키스 먼저 할까요?>

'좀 살아본 사람들의 리얼 멜로'를 표방하는 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는 40~50대 남녀 주인공을 내세워 때론 코믹하고 때론 농도 짙은 로맨스를 그려내며 호평받고 있다. 어른들의 로맨스를 재연하다 보니, 좀 더 성애적인 대사들과 섹슈얼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장면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러한 설정은 중년 연애의 온도를 온전하게 전달해 시청자들로 하여금 현실적인 연애의 감각을 선명하게 느끼게 해준다.

다만 이러한 극적 허용이 현실에서 남용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대표적으로는 2회에 등장한 손무한(감우성 분)과 안순진(김선아 분)의 소개팅 장면이 그러하다. 자신과의 소개팅에 왜 응했냐 묻는 안순진의 질문에 손무한은 "안 순진할 것 같아서"라고 대답한다.

"이름요? 무슨 이름? 내 이름 때문에 나온 거라고요? 내 이름이 안순진이라서? 그러니까... 내가 이름처럼 안 순진할까 봐 그래서 나온 거라고요? 재혼할 생각도 없으면서? (...) 그러니까 와이프가 아니라 섹스파트너를 바라고 나왔다... 정리하면 이 말이죠?" 

 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 중 한 장면

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 중 한 장면 ⓒ SBS


남자 주인공 손무한이 말하는 '순진하다-아니다'는 성적 의미를 내포한 말이며, 극중 여자 주인공 안순진 역시 곧바로 그렇게 이해했다. 기분 나쁠 수 있는 남자의 말에도 극중 안순진은 오히려 "나랑 일곱 번만 하자"고 당돌하게 말하며 성적인 농담에 유쾌한 태도로 받아치지만, 만약 이것이 현실의 대화라면 성희롱에 해당할 수도 있다. 처음 만난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성적인 비유로 희롱하는 것은 인격적인 수치심을 줄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코믹한 요소로 활용되는 성적 농담을 보고 따라하려다가, 현실에서 치명적인 성희롱을 저지르는 우를 범하는 일은 없도록 명심해야 한다. 로맨스와 폭력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건너는 이러한 장면들은, '무엇이 폭력이고 무엇이 로맨스인지'를 구분하는 판단력을 마비시키기에 더 위험하다. 드라마 콘텐츠를 능동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시청하는 것은 우리 시청자들의 몫이다.

3. 핀란드 쫓아간 '스토킹'이 '해피엔딩'? <황금빛 내 인생>

44.6%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지난 11일 종영한 <황금빛 내 인생>은 '믿고 보는' KBS 가족드라마의 명맥을 이어가며 인정받은 작품이다.

하지만 마지막 회가 방송된 이후 '황금빛 내 인생 스토커'라는 연관검색어가 SNS상에서 화제가 되며 아쉬움을 남겼다. 여러 이유로 이별을 택한 최도경(박시후 분)과 서지안(신혜선 분)이 결국 재회하며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아름다운' 결말이었는데도 말이다.

앞서 최도경의 '다시 만나보자'는 제안을 연거푸 거절한 서지안은 핀란드로 유학을 간 상황이었다. 자신이 어디에서 공부를 하는지 당연히 알리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하지만 최도경은 서지안이 일하는 핀란드의 한 호프집을 기어코 찾아가고, 그 곳에서 둘은 재회한다. 당황한 서지안은 "여긴 어떻게..."라고 묻고 최도경은 "출장 왔어요. 핀란드 자작나무가 필요해서"라며 어딘가 황당한 답변을 내놓는다.

 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 중 한 장면

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 중 한 장면 ⓒ KBS


남자 주인공이 사랑을 찾아 핀란드까지 날아온 결말은 낭만적으로 그려졌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시청자의 생각은 사뭇 달랐던 것 같다. 일부 시청자들은 SNS에 "<황금빛 내 인생>아니고 <황금빛 스토커>인 듯", "최도경이 하는 건 스토커 짓이지 절대 달달한 이야기가 아니다"라는 비판을 쏟아냈다. 동의 없이 상대방의 행적과 위치 등을 조사하고 그 곳을 따라다니는 것은 명백한 스토킹 행위이며, 최근 정부는 '스토킹처벌법' 제정을 추진해 이러한 행위에 대한 처벌을 징역 또는 벌금 수준으로 강화한다고 밝혔다.

39회 방송에서 "(낙태하면) 신고한다. 그거 불법인 거 알지?"라는 대사가 등장해 거센 비판을 받은 바 있는 <황금빛 내 인생>이 마지막 방송에서까지 남자 주인공의 스토킹 행위를 미화하며 마무리 짓는 모습을 보고, '국민 드라마'의 수준과 자격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부디 2018년엔 드라마 속 폭력 사라지고 젠더 평등 이뤄지길

2018년 현재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들도 여전히 폭력을 로맨스적으로 묘사하는 데 주력하는 듯 보인다. 2004년의 "나랑 밥 먹을래 나랑 죽을래"라는 말이 '명대사'의 반열에 오른 후  10여 년이 흘렀지만, 협박·성희롱·신체적-물리적 접촉과 폭력·스토킹 등이 여전히 '사랑 이야기'의 필수적인 요소로 등장하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해서 드라마 전반이 시대적으로 퇴보했다거나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절망으로 논의를 마무리 할 필요는 없다. 젠더 평등을 향한 열망은 분명 우리 드라마에도 불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방영된 JTBC <품위있는 그녀>나 tvN <부암동 복수자들><마더>와 같이 여성 캐릭터들이 중심이 되는 서사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또한 각각 2~3월에 첫방송을 시작한 JTBC <미스티>와 tvN <라이브>는 극중 여성 주인공이 여성 차별을 당당히 지적하고 성평등한 세상을 열망하는 대사를 일상적으로 내뱉으며 시청자들에게 쾌감과 울림을 동시에 전하고 있다.

심지어 드라마 콘텐츠로는 최초로 '데이트 폭력'을 주요한 소재로 다뤄 경각심을 건넨 JTBC <청춘시대>라는 작품의 존재는 기념비적이기까지 하다. 남자친구에 의해 데이트폭력을 당하는 주인공 안예은(한승연 분)의 트라우마는 후속 시즌까지 계속되며 시청자로 하여금 데이트폭력의 심각성을 깊이 깨닫게 했고, 예방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의 구축이 절실하다는 바람을 모았다.

 드라마 <청춘시대>의 한 장면

드라마 <청춘시대>의 한 장면 ⓒ JTBC


<청춘시대>에서 안예은의 남자친구이자 데이트폭력 가해자를 연기한 배우 지일주는 자신의 SNS에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에 관해 올린 바 있다. 지일주는 "나의 잘못된 배려가 상대방에게 무례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작가님의 바람처럼, 내 바람처럼 부디 점점 더 나은 세상이 되길"이라는 감상을 덧붙여 눈길을 끌었다.

우리 드라마가 젠더적으로 성장한다면, 배우와 제작진 그리고 시청자까지 모두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다. 부디 2018년엔 폭력이 추방되고 로맨스는 더욱 풍요로워지는 드라마 생태계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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