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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소설을 읽고 많이 울었다. 단순히 소설 속 인물이 죽어서 운 것은 아니었다. 영경과 수환이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이 너무도 절절하고 또한 그것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났다. 여기에다 소설집 뒷부분에 있는 신형철의 해설이 나를 더 먹먹하게 만든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정확한 사랑의 실험> 26쪽

무엇을 하든 스펙과 조건을 따지는 것이 자연스럽고 어색하지 않은 이런 세상에서 서로의 '없음'을 알아보는 것이 사랑이라니. 신선하다 못해 충격적이다. 없는데, 존재하지 않는데, 그걸 어떻게 사랑하나. 그야말로 모순이다. 그런데 <봄밤>의 영경과 수환을 보면 신형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안녕 주정뱅이> 표지
 <안녕 주정뱅이> 표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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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마흔이 넘어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만났다. 영경은 이혼 후 아이를 뺏기고 술을 마시기 시작해 이로 인해 20년간의 교사생활을 그만둔 상태였다. 수환은 운영하던 회사가 부도나 위장이혼을 했다가 부인이 전재산을 가지고 도망가는 바람에 신용불량자가 되어 자살할 생각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의 '없음'을 알아보고 같이 살게 되었다. 더 나빠질 것이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았지만, 둘은 각자 그리고 함께 더 나빠지고, 더 없어졌으며, 더 서로를 사랑하게 됐다.

두 사람이 서로의 '없음'을 알아본 그날은 봄밤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이별하게 된 날도 봄밤이었다. 류머티즘 관절염 환자인 수환은 같이 요양원에 있는 알코올 중독자인 영경이 술을 못 마셔 힘들어하자 괜찮은 척하며 술을 마시러 나갔다 오라고 한다.

영경이 기꺼운 마음으로 술을 마시러 외출할 수 있게 해주는 게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조금이라도 크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단 걸 알면서도 말이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무언가 있었다면 이렇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 두 사람은 모두 없었기에 서로의 없음을 알아볼 수 있었고,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었고, 온전히 사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상대가 원하는 것을 오롯이 할 수 있도록 지지할 수 있다.

수환이 영경이 마음 편하게 술을 마시도록 도와준 것처럼, 영경이 알코올 중독 때문에 힘들지만 끝까지 수환 곁에 그저 있어주려 노력한 것처럼. 이는 역설적이게도 '없음'만이 가질 수 있는 '있음'이다. 있는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봄밤>을 읽고 슬픈 것이 모두 아름답진 않지만, 아름다운 것은 모두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밝고 빛나고 예쁜 것은 좋지만 아름답진 않다. 그저 좋을 뿐이다. 하지만 어둡고 소외되어 있고 예쁘지 않은 것은 아름다울 수 있다.

자신의 '없음'으로 다른 이의 '없음'을 끌어안을 수 있다면, 어떤 형태가 되었든 아름다울 수 있다. 세상에 빛나고 예쁜 것은 몇 안 되고, 어둡고 소외된 것이 많아서일까. 우리 인생이 빛나지도 예쁘지도 않기 때문일까.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큰 위안이 된다. 우리가 사는 삶이 빛나고 예쁘진 않아도, 아니 오히려 그래서 아름다울 수 있다는 위안.

<봄밤>은 "산다는 게 참 끔찍하다. 그렇지 않니?"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소설을 다 읽고 다시 이 부분을 읽으니,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남들이 보기에 영경과 수환은 그저 불쌍하고 끔찍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이었기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쳐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다.

어느 누가 이들과 같은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을까. 우리는 다들 좋은 것만 취하고 싶어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 또한 모두 알고 있다.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이 있다. 산다는 건 끔찍하고, 그래서 또 아름답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 정호승, 내가 사랑하는 사람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창비(2016)


태그:#안녕주정뱅이, #봄밤, #권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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