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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전의 토론장
▲ 토론회장 시작전의 토론장
ⓒ 김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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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년 3.1절은 3.1독립혁명의 100주년이다. 그리하여 여러 단체나 정부기관에서까지100주년을 맞이하여 좀 더 국민적인 기념행사를 가지자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3.1독립선언 100주년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대한 광복회 주최의 토론회가 지난 2월 26일 국회에서 열려 한 달음에 달려가서 참여하게 되었다. 의원회관의 입장을 위해서 항상 뒷문으로 들어가서 입장을 하였는데, 이번에는 정문을 통하여 입장을 하겠다고 들어섰다.  이미 준비를 하여두어서 입장을 하니까 바로 출입증을 등록하지 않고 직접 들어갈 수 있도록 안내원을 배치하여 두어서 처음으로 편하게 입장을 할 수 있었다.

대회의실로까지 안내원이 배치되어서,  곧장 들어설 수 있었다. 이미 등록을 하여 두었기에 서명만을 하고서 들어섰다. 처음에는 대회의실의 큰 강당이 다 찰 수 있을까 싶었다. 약 400석이나 되는 회의실이기에 너무 초라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 것이었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광복회 회장을 비롯한 내빈 소개가 있었다. 주최자인 정재진 광복회서울시지부장, 박용철 광복회장, 김영관 95세의 광복운동을 하였던 광복회 생존회원등이 소개 되었고 간단한 축하 말씀도 있었다. 이어서 우당선생 6형제분의 후손인 이종걸 의원이 의원회관이니까 먼저 인사를 하라고 한다고 나서서 인삿말을 하였다.  이어서 이종찬 전의원님도 나오셨다.

토론회를 주최하는 광복회와 내빈 그리고 토론자들의 기념사진
▲ 토론회에 참석하신 주요 내빈과 토론자 토론회를 주최하는 광복회와 내빈 그리고 토론자들의 기념사진
ⓒ 김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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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행사를 위해 주제발표문을 책자로 발행을 하지않아서 상당히 불만스러웠다. 이런 좋은 강의를 들으면서 책자가 없어서 맨 손으로 듣고 있자니 아쉬움이 많았다.

제1주제인 기조 강연은 '3.1독립선언 100년, 역사적의의'라는 주제로 이준식 독립기념관 신임관장이 나서서 이야기를 펼쳐 주셨다.

이준식 관장님이 우리가 역사책에서나 배운 독립투사이고, 청산리대전의 용장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이면서 어머니도 독립투사로 활동을 하신 분이었다는 사실을 듣고 정말 이 자리에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3.1운동이라고 불리는 3.1독립투쟁은 그냥 항일 독립운동만이 아니고, 시민혁명이라는 주장을 펴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3.1운동을 3.1혁명이라 부른 역사적인 사실들을 사례로 들어 주어서 분명하게 밝혀 주었다.

3.1운동이라고 불리던 독립만세운동을 3,1혁명이라 부르게 된 것은 순수한 항일독립만세만이 아니라, 독립선언서에서 보듯이 우리 민족이 자주 족립국가이며 백성이 주인인 민주국가를 지향하였으며, 결코 대한제국과 같은 왕정국가로 가자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부터 우리임시정부에서는 3.1혁명이라고 부르고 있었으며, 1940년대에 들어서는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증거로 1943년 대한민국 대헌장에는 '3.1대혁명'이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제시하여 주었다.

1917년 만주독립운동가들은 '대동단결 선언'에서 <대한제국의 황제가 일본에게 빼앗긴 주권은 이제 백성이 상속 받았다>고 선언하였을 정도로 민주 국민임을 자각하고 나섰다.1919년 3.1혁명에서는 만세시위과정에서 약 6000명에서 7500여명이 희생 된 것으로 추정이 되고 있으나, 일본의 철저한 자료폐기로 그 기록을 찾 을 수가 없다.

1943년에 이미 우리 임시정부에서는 남녀평등과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는 헌법을 만들었으니, 서구제국과도 과히 늦지 않은 정책이었으니, 온 세계에서 오직 하나만이 인정이 되고 있는 프랑스대혁명에 비할 바가 없는 민족 혁명임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참석한 모든 분들께 감사하면서 "우리는 제2의 독립운동을 해야 할 책무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친일파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다시 독립운동을 시작하자" 고 주장하였다.
광복회 회원들은 물론 많은 시민들도 대한민국 100주년과 3.1혁명 100주년을 위한 준비를 하자는데 뜻을 모아 주었다.
▲ 대회의실을 가득 채운 회원들 광복회 회원들은 물론 많은 시민들도 대한민국 100주년과 3.1혁명 100주년을 위한 준비를 하자는데 뜻을 모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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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제는 윤경로 역사학자이자 한성대총장의 '3.1독립선언 100년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라는 주제강연이 있었다.  1919년 3.1독립선언은 사실상 고종황제의 현산일이 3월3일 이었기에 이날을 기해 전국에서 모여든 조문객들과 함께 하기 위해 날을 잡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본래 3월 2일로 계획하였지만, 2일이 일요일이어서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었던 민족대표 33인들이 하루 앞당겨 3월1일 토요일에 개최를 하게 된 것이었다고 한다.

흔히 3.1운동 때에 태극기를 들고 나섰다고 하지만, 사실상 그날은 태극기도 없이 모자와 수건을 흔들면서 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시작하였다는 사실을 YMCA에서 현장을 지켜본 분의 일기장에서 볼 수 있었음을 확인하여 주셨다.  이 때만하여도 우리 국기를 그리는 것도 잊어먹었고  미리 준비를 할 만한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3.1혁명이라 불러야할 이유로 이미 독립선언서에는 <자주독립, 자유정신, 민족자주>라는 분명한 민주주의를 목적으로 하였으니, 1910년 8월29일 황제가 일본에게 빼앗긴 3보<국토, 인민, 주권>를 국민이 되찾자고 나선 것이다.

1905년 가스라-테프트의 밀약은 윌슨대통령의 밀사로 온 테프트가 일본과 <미국이 필립핀을 지배하는 것을 막지 않는 대신,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인 인정한다>는 조약 때문에 우리는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인데, 현제 미일의 움직임은 그 때와 같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데라우치 통감이 무단정치로 시작하여 민족을 잔인하게 겁박하였지만, 의병들의 항거에 지치게 되자, 사이또 총독은 문화정책이라는 미명하에 일본인으로 만들려고 획책을 하기도 하였다.

이런 일본의 식민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일어난 3.1독립운동은 그냥 운동이라는 말로 익숙해져 있지만, 그 정신이나 주장, 그리고 우리 민족의 그 끈질긴 투쟁의 역사를 분명하게 되살리기 위해 우리는 3.1혁명으로 불러야 맞다고 주장을 하였다.

이어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인근에 임시정부기념관을 마련하여 곧 개관을 하게 되었지만, 3,1혁명의 기념관이나 유적을 관리하는 일에 소홀하였음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100주년을 맞이하는 3.1혁명기념관을 이제 시작하여 100주년 기념일에 개관하기는 어렵겠지만, 탑골공원을 역사공원화하여서 되살리는 것부터 시작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을 하셨다.

이제 남은 1년 동안 우리는 3,1혁명의 정신을 되찾아가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아울러 건국절 논란은 더 이상 들먹이지 말고 대한민국 100주년을 준비하여야 한다는데 동의하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블로그 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3.1혁명 100주년, ##대한민국100주년, ##광복회, ##건국절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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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아동문학회 상임고문 한글학회 정회원 노년유니온 위원장, 국가브랜드위원회 문화멘토, ***한겨레<주주통신원>,국가인권위원회 노인인권지킴이,꼼꼼한 서울씨 어르신커뮤니티 초대 대표, 전자출판디지털문학 대표, 파워블로거<맨발로 뒷걸음질 쳐온 인생>,문화유산해설사, 서울시인재뱅크 등록강사등으로 활발한 사화 활동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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