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감정과 그것을 칭하는 단어는 무척 따스하고 포근하게만 느껴진다. 그러한 느낌은 우리가 사랑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정작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 쉽사리 답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 질문이 무척 추상적이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반대로 우리가 사랑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신에게 이렇게 물으려 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분명 살면서 누군가를 사랑해본 바가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한 사랑의 온기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증표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체온이 있다는 것이 증표의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세상에는 따스한 몸으로 차가운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온도차가 확연하지만 그것 역시 사랑의 한 가지 모양이라 칭할 수 있다. 이렇듯 사랑이란 정말로 복잡하다.

하지만 복잡한 미사여구를 제하고 물리적으로 보면, 단언컨대 사랑이란 심장박동이 커지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마음에 드는 영화를 보았을 때,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과 그 외 모든 것을 바라볼 때, 분명 심장은 뛴다. 그 심장은 우리가 병원에서 보았듯 한 줄기의 파동으로 나타나 주기적인 리듬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멈춘다면 사람은 죽음에 이르고 만다. 그러니까 그 말인즉슨 만약 심장박동이 사랑의 증표라면 사랑이 멈추는 순간 사람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람이라는 기계를 작동하는 연료는 다름 아닌 사랑이다. 사랑은 삶을 추동하는 요인이요 어딘가로 목적지를 지정하는 이정표이기도 하다.

 영화 <셰이브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의 작품 포스터

영화 <셰이브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의 작품 포스터 ⓒ 20세기 폭스 코리아


그리고 우리는 여러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사랑의 모양이 파동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관찰한 바가 있다. 이를테면 작년에 개봉했던 <목소리의 형태>가 대표적이다. 그 영화의 여주인공은 말을 하지 못하며 당연하게도 타인과의 소통에 있어 단지 듣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 그녀가 타인에게 무언가를 받을 땐 발화라는 파동이 매개체가 되고, 그녀가 타인에게 무언가를 줄 땐 수화라는 리듬이 매개체가 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러한 두 가지 곡선, 파동과 리듬이 소통의 주요한 수단이다. 그 영화에서는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다리 아래 강으로 뛰어들거나 비 오는 날에 서로와 이어지는 둥, 물이 서로를 잇는 주요 요인이다. 그 영화에서 물은 잔잔하지만 작은 소란을 가지며 고요한 파동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그들이 물속에 뛰어들었기 때문이거나, 혹은 다리 아래에 사는 잉어처럼 물속의 주민이기 때문이다.

물이라는 것은 육지에 비교하면 하루 온도가 균일하며, 동시에 우리의 귀를 막아 먹먹하게 느껴지게 한다. 그러한 먹먹함은 아주 분명하게 단절이라 말할 수 있다. 아무리 외쳐도 올곧게 전달되지 않는 소리의 파동이란 수면 위의 잔잔함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그러한 상반됨, 그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의 세계는 폐쇄되어 있고 그것은 곧 물의 먹먹함과 연결된다. 그리고 남자 주인공 또한 왕따를 당하며 물이라는 먹먹함, 단절된 파동의 세계에 진입하게 된다.

이제 두 남녀는 먹먹함을 지닌 채로 서로의 파동을 몸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목소리의 형태라는 제목에서 목소리가 병원 모니터 위의 리듬 곡선으로 그려진다는 것을 증명한다. 목소리의 형태란 하나의 파동, 그것은 두 사람의 마음을 올곧게 전달한다. 그리하여 목소리의 형태는 심장의 파동이 되고, 그것은 사랑의 형태가 굳이 언어라는 것으로 표면화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사랑이란 마치 물 밑에서 이루어지는 소리의 전파처럼 보이지 않는 매개체 아래에서 점차 나아가는 것이라 말한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의 한 장면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의 한 장면 ⓒ 20세기 폭스 코리아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셰이프 오브 워터>(2018)은 그런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영화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단지 사랑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확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는 여러 열차가 모여드는 지하철 환승 플랫폼처럼 세상에 있는 여러 이데올로기가 기차역을 지나가고 있다. 그런데 그 이데올로기란 무척 가독성이 좋아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먼저 당신에게 다가온다.

그러니 어쩌면 이 영화는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난잡하게 널브러져 당신을 혼란스럽게 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물이라는 거대한 이념의 바다 아래 그 모든 것을 긴밀하게 엮어내는 재주가 있다. 그것은 환승역이지만 퇴근길의 신도림역처럼 전혀 복잡하지는 않다. 오히려 당신은 가독성이 좋은 메시지들이 어느 하나 튀지 않은 채 처음부터 한 몸이었다는 듯 자연스레 하나로 엮어지는 모습을 보며 아주 행복한 미소를 짓게 될 것이다.

1. 시대의 흐름과 소수자들의 연대 

미국의 항구도시 볼티모어에는 정부 소속 우주 연구실에서 청소원으로 근무하는 여자 '에스포지토'가 살고 있다. 에스포지토는 이웃집의 노인 '자일스'와 친하게 지내며 집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친구 '젤다'와 함께 청소원일을 하며 '리처드'라는 상사에게 구박을 받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연구소에 미확인 생명체가 들어오게 되고 에스포지토는 청소원으로써 관리구역에 자주 드나들게 된다. 그 생명체는 아마존 어딘가에서 신으로 추앙받던 양서류 인간(어인)이었고 이내 그녀는 어인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 영화는 냉전이 한창이던 1963년을 그리고 있고, 당신이 이 영화를 처음 마주한다면 그것을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 냉전과 사랑과 <물의 모양>(원제)이라는 제목은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은 차갑고 사랑은 따스하며 물은 그저 먹먹하기만 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야 물과 사랑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대략 알겠지만, 일반적으로 물이란 생존을 위해 마시는 수단이거나 말끔함으로 외모를 은유하는 단어다. 물은 어머니-자연에서 숲과 함께 바다라는 것으로 인간을 보듬기도 하고 때로는 노아의 방주처럼 세상 모든 것에 벌을 내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관객은 물의 모양과 로맨스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일련의 궁금증을 갖고 이 영화를 관람하게 될 것이다. 사랑은 보듬는 것일까 벌을 내리는 것일까. 사랑은 생존의 수단일까 아니면 그들의 외모를 치장하는 것일까.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의 한 장면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의 한 장면 ⓒ 20세기 폭스 코리아


아무래도 후자보단 전자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에서 사랑은 보듬는 것이며 생존의 수단이다. 이 영화에서 사랑이 끼어들 구색은 로맨스라기보단 화합의 메시지에 가깝다. 위에서 이 영화를 소개한 전문을 다시금 인용하자면, 주인공 '에스포지토'는 말을 못 하고 이웃집 노인 '자일스'는 동성애자이며 그녀의 친구 '젤다'는 흑인이다. 여기에 겉으로도 확연하게 차이를 지닌 어인은, 인간처럼 생겼으나 인간은 아닌 존재다. 그리고 작품의 배경이 차가운 1963년임을 고려해볼 때 우리가 언급했던 모든 인물은 어인과 같은 층계에 서 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주류층이 되지 못했으며 영화는 여기서 더 나아가 어인이라는 생명체를 통해 인간과 비(非)인간으로 나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은 소수자인 셈인데, 어인보다는 지위가 높고 사회 주류층보다는 낮다. 여기서 사회 주류층이란 '백인'과 '남성'이라는 두 가지 표지를 지닌 '사람'을 뜻한다. 기존에 분류되던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 주류와 비주류는 이제 다시금 생물학적 인간이 아닌 어떤 형태의 인간을 마주하게 된다. 어인은 분명 인간처럼 생겼으나 인간이 아니고, 그는 인간이 지도하는 이 지구에서 비주류층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 영화에는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사회적 비주류'와 신체적으로 차별받는 '신체적 비주류'가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가 그러한 차별을 차근히 되짚어 내려간다면 그 두 가지가 사실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이를테면 주인공 에스포지토는 농아인데, 농아는 발화할 수 없으니 일반인과 구분된다. 그런데 그러한 발화는 분명 지구상에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 언어에 해당한다. 그 언어는 인간의 전유물이며 그러니 언어에 속하지 못한 에스포지토는 인간에 속하지 못한다. 그녀는 인간이지만 사실상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녀를 신체적으로 차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고, 그것은 신체적 차별이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니 다시금 사회적 차별로 이어진다. 그러니 신체적 비주류는 사회적 비주류에 선행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영화에서 어인을 볼 때 어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단지 신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것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신체적인 면이 사회적인 면에 선행한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의 한 장면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의 한 장면 ⓒ 20세기 폭스 코리아


2. 박해받는 낭만과 사랑의 형태 

그리고 이때 우리는 앞서 살펴본 사랑에 관한 논고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분명 앞에서 사랑의 두 가지 면을 살펴본 바가 있고, 그중에 신체적인 것으로 사랑의 물리적인 면모를 살펴본 바가 있다. 사랑은 파동이고 발화 또한 소리 중에 퍼지는 파동이다. 그렇다면 농아인 에스포지토가 사는 세계는 사랑이 없는 세계이며 그것은 동시에 차별받는 세계를 뜻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이 영화에서 사랑은 차별받지 않기 위한 도구이거나 혹은 필수요건이며, 차별받는 이들은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 여겨진다.

게이인 자일스는 그가 짝사랑하는 파이집 청년이 '인종차별주의자'인 것을 잘 알고 있으니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임을 안다. 흑인 여성 젤다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같은 청소원 사이에서도 차별받으며, 심지어 집안에서는 무능한 남편에게 고개 숙이기까지 한다. 그것은 마치 차별의 요소가 하나씩 쌓여 누가 누구보다 나은지 무게를 다는 느낌이다. '흑인'과 '여성'이라는 두 가지 표지는 '여성'과 '농아'라는 것과 같은 무게를 지니며, '남성'이지만 '인간'이 아닌 어인은 그들과 같은 지위다. 이 작품에서 남성은 차별받지 않는 요소이니 사실상 '인간'이 아닌 것으로만 두 가지 차별 요소에 대응하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무게란 여타 차별 요소를 두 가지나 놓아야 비로소 동등해지는 것임이 틀림없다.

이 영화에 대해 말을 해야 한다면 바로 이 지점을 지적해야 한다. 인간의 무게와 사랑의 파동이 합쳐지는 지점이 바로 이 영화의 논고다. 이 영화에는 무척 이질적인 것이 세 가지나 있다. 물론 큰 틀에서 비슷하지만 세세하게 다른 그러한 층계가 이 영화에 있다. 하나는 사랑이고 둘은 차별이며 셋은 이념이다. 그것들은 어느 하나가 우위를 지니지 않고 독립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서로 부닥치지 않고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부드럽게 이어진다.

첫째로 사랑의 지점인데, 주인공과 어인의 사랑은 인간과 비인간의 사랑이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그것은 인간 사회 밖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비인간들이 제 자리를 찾은 것에 해당한다. 둘째로 차별의 지점인데, 어인은 인간과 비슷하게 이족보행을 하고 인간과 소통할 지능도 있음에도 그저 외양만으로 차별받고 있다. 여담으로, 이 영화에서 어인이 갇힌 방은 T-4이며 그것은 구 나치 독일이 내린 장애인 말살 프로그램의 코드명이다. 셋째로 이념의 지점인데, 이 영화에서 상사 리처드의 부하는 사실 소련의 스파이다. 그것도 모른 채 상사 리처드는 미국이 미개한 소련에게 질 수 없다며 어인을 이용하려 든다. 리처드에게 어인과 소련은 그저 '미개한', 인간이 아닌 '대상'일 뿐이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의 한 장면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의 한 장면 ⓒ 20세기 폭스 코리아


그러니 이 영화에서 갈라지는 모든 것들은 서로를 어느 한 쪽이 서로 타자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어느 한쪽에서의 차별이 아니라 서로를 미워하고 물어뜯는 형태의 분리다. 인간과 비인간, 여성과 남성, 장애와 비장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 동성애와 이성애자까지. 사실 그 둘은 하나로 합쳐질 수 있는 합집합임에도 그들은 막연하게 '서로는 서로가 되어야 한다'는 타자화의 프레임에 갇혀 버린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렇게 생겼기에 '그'도 그렇게 생겨야 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것은 한 쪽이 권력을 지녔기에 '차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권력 아래쪽의 이들도 그러한 '차이'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방적인 것이 아니게 된다. 말하자면 '차별'이라는 현상은 어느 한쪽에서 어느 한쪽으로 통하지만, '차이'라는 현시는 서로가 자신의 것을 나타내 보이게 하는 쌍방통행이다. 여기서 차별이란 그들과 내가 다른 점을 인지하지 못해도 이루어지고, 차이란 그러한 인지가 명확하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러한 점에서 신묘하다. 우리가 알아본 사랑이란 물의 표면에서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그것이었고, 그때 사랑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물 속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농아이니 언어를 잃어버린 세계, 그 먹먹함은 '물속'이라는 것에 부합한다. 아무리 외쳐도 물 밖으로 전달되지 않을 발화는 단지 수면 아래에서만 작용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러니 그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는 용기가 필요하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의 한 장면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의 한 장면 ⓒ 20세기 폭스 코리아


그렇다면 이때 물이라는 표면을 통해 세계가 이분할 될 것인데, 수면 위와 수면 아래다. 그리고 그 위쪽이 바로 우리가 겪는 차별의 사회이며 아래쪽은 차이의 사회다. 사실은 대지라는 땅을 밟고 서 있다는 점에서 같지만 우리가 겪는 작은 세계에서는 그것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대지라는 합집합과 그 위의 바다와 하늘은 단지 수평선이라는 경계만으로 가늠 지어진다.

하지만 차별은 그들에게 닿을 수 없듯 높아 보이고 차이는 눈에 보이지 않을 어둠 아래의 심도를 지닌다. 그 둘이 우리가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인 것은 틀림없으나 어찌 됐든 우리는 숨을 쉬어야 하므로 차별의 세계에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분명 물속에 사는, 차이 속에 사는 어인이 나온다. 그 어인은 우리로 하여금 암묵적으로 모른 체 해왔거나 정말로 몰랐던 '차이'를 우리에게 인지시켜주는 기표다.

3. 긴밀하게 엮여있는 거대한 이념의 바다

이제금 다시 들춰보는 위의 논고는 바로 그렇게 겹쳐진다. 신체적인 면은 사회적인 면에 선행한다. 또한 사랑은 물리적인 파동의 형태다. 즉 물리적 사랑표현이 심적인 사랑표현에 선행한다. 사실 이러한 부분은 이 영화의 가장 처음 도입부에 하나로 압축되어 나타나는 장면이 있다. 물로 가득 찬 방안에 사물들이 부유하고, 그 침대의 위로 서서히 부양하는 주인공의 모습이다. 그것은 마치 침몰한 타이타닉의 흔적을 재현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그 장면을 처음 마주했을 때 농아인 주인공과 물 속이라는 먹먹함을 연결지은 것으로 여기게 되지만, 작품이 진행되다 보면 '물속'을 공유하는 어인의 존재와 어인과 같은 '차이의 존재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 장면이야말로 우리가 이 영화에서 마주하는 첫 번째인 동시에 가장 마지막까지 유지되는 메시지일 것이다.

분명 이 영화는 물에 사는 어인과의 로맨스를 그리기에 물에서 시작해 물로 끝날 수밖에 없지만, 어떤 면에선 수면 아래 존재하는 이들이 수면 위에 파동을 만들려 하는 한 줄기 사랑을 은유하기도 한다. 그들의 사랑은 언어를 잃어 수중을 떠돌지만 그 따스한 몸으로 서로를 껴안는다. 이 영화에서 사랑은 감정이기 이전에 심장의 '파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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