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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0명을 집단학살' 제목의 1955년 1월 15일 <경향신문>기사. 1950년과 51년 경찰과 우익단체에 의해 자행된 아산지역 부역혐의 학살사건을 다루고 있다. 기사에는 '천인공노할 피의사실이라고 적고 있지만 '대법원'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140명을 집단학살' 제목의 1955년 1월 15일 <경향신문>기사. 1950년과 51년 경찰과 우익단체에 의해 자행된 아산지역 부역혐의 학살사건을 다루고 있다. 기사에는 '천인공노할 피의사실이라고 적고 있지만 '대법원'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 <경향신문> 갈무리 (네니버 뉴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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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공노할... 어마어마한 죄상... 양민집단학살"
"닥치는 대로 총살... 빨갱이 누명으로 죽은 양민 150명"

1955년 1월 <경향신문>, <동아일보>,<한국일보> 등 여러 신문이 전한 아산시 배방면에서 한국전쟁 시기 경찰이 자행한 민간인집단학살 사건에 대한 보도 기사 내용이다. 당시 정부 보유미 횡령(50가마)과 양민학살 혐의로 기소된 신창 지서 유아무개 주임 경찰의 1000페이지에 달하는 기소내용 중 양민학살 부분만을 들여다 보자.

- 1950년 10월 초순, 부역자 및 양민 600여 명을 창고에 구금한 후 60명을 오목리 앞산으로 끌고 가 기관총으로 집단학살
- 1950년 10월 22일, 부역자 가족 50명을 염동산으로 끌고 가 소총으로 집단학살
- 1951년 1월 15일, 창고 안에 있는 부역자와 가족 30명을 염동산으로 끌고 가 소총으로 집단학살

검찰이 경찰 유아무개 지서 주임에게 민간인학살 혐의(살인 및 사형금지법 위반 혐의)를 두고 있는 인원만 140명이다.

기사가 전한 기소 내용에는 "부역자가 아닌 양민을 부역자라 하여 학살한 인원도 많다"고 한다. 기사에는 피의자인 유 지서주임의 진술 내용도 들어 있다.

"일가족 전원, 심지어는 두 살 어린아이까지 모아서 집단학살했다. 피의자 진술은 '하도 많아서 상세한 것은 알 수 없고 80명만 기억이 난다."

일가족은 물론 두 살배기 어린아이까지 살해했다는 충격적 내용이다. 당시 검찰 조사는 한 희생자 유가족의 요구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희생자 가족 중 정부 기관에 근무하는 사람이 있어 뒤늦게나마 조사가 가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검찰에서 혐의를 순순히 인정하던 유 지서 주임은 같은 해 2월 재판에서 혐의를 전면 부인한다. 기사를 보면 "공포 한 번 쏴 본 적 없고 당시 양민들을 끌고 와 감금한 것도 당시 온양경찰서장(오 아무개 경감)과 사찰 주임의 지시로 대한청년단 등과 어쩔 수 없이 움직였다"고 밝히고 있다.

유 주임 측 변호인은 무죄 주장을 위해 한국전쟁 당시 내무부 장관이던 조병옥과 백성욱, 국방부 장관이던 신성모씨 등을 각각 증인으로 신청하기도 했다. 이마도 온양경찰서장의 윗선에 내무부장관과 국방부 장관이 있었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법원은 증인신청을 직권으로 각하해 증인 출석은 이뤄지지 않았다.

 8~9세 아이의 정강이뼈 아래에서 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구슬이 발견됐다. 아이 유해 위에서는 다량의 탄티와 탄두가 나왔다. 아이 유해 아래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유해가 뒤엉켜 있다.
 8~9세 아이의 정강이뼈 아래에서 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구슬이 발견됐다. 아이 유해 위에서는 다량의 탄피와 탄두가 나왔다. 아이 유해 아래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유해가 뒤엉켜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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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을 학살하지 않았다는 유 주임의 법원 진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반면 당시 연행이 온양경찰서장의 지시 때문에 이뤄졌다는 유 주임의 증언은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 집단학살을 윗선의 지시 없이 지서 주임 혼자서 했다고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검찰이 지서 주임만을 기소한 것은 사건 책임을 모두 덮어 씌워 희생양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검찰 구형은 당연히 사형이었다. 하지만 1심 법원은 집단학살은 물론 양곡 횡령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징역 15년 형을 선고하는 데 그쳤다. 재판부는 그 이유를 "사변기인 혼란기였던 관계로 정상을 참작했다"고 밝혔다.

혼란기였다는 이유로 집단학살 혐의에 15년 형을 선고한 솜방망이 처분이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듬해인 1956년 2월, 1심에서 인정된 살인과 사형금지혐의에 대해서도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유 주임은 업무상 횡령 혐의만 인정돼 징역 3년 형에 그쳤다. "천일공로할... 어마어마한 죄상"에 대해 재판부가 '증거가 없다'며 면죄부를 준 것이다.

당시 재판부는 정말 충남 아산에서 일어난 양민학살에 대한 증거를 찾지 못해 무죄를 선고한 것일까?

학살 사건이 있었던 그해 1951년 7월 21일. 조진만 법무부 장관은 장면 국무총리에게 아산지역 민간인 학살 사건을 보고한다. 이 보고서(법제관계서류철, BA0135093)에는 "배방지서 순경 한 아무개 씨와 향토방위대장 한 아무개 씨가 서로 공모해 좌익분자 및 그의 가족 183명을 창고에 가둬 두었다가 전원 총살 후 금광에 사체를 유기하였다"고 적고 있다.

또 "유 아무개 신창 지서 주임이 1월 9일 11명을 창고에서 총살 후 사체를 유기 했다"며 "해당 건에 대해 헌병대에서 취조 중"이라고 밝히고 있다.

학살이 일어난 지 6개월 만에 법무부 장관은 물론 국무총리까지 사건의 내용을 매우 소상하게 파악, 후속 조사까지 했다는 입증자료다. 하지만 사건은 당시 이승만 정부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정권 차원에서 지워져 없었던 일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4년 뒤 공직에 있던 어느 희생자 유가족의 문제 제기로 재조사가 이뤄졌지만 지서 주임에게만 책임을 돌렸고, 그마저도 무죄판결로 다시 역사에서 뭉개졌다.

당시 '학살의 증거가 없다'던 대법원 판결은 최근 엉터리 판결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22일 시작된 아산 배방면 폐금광에 대한 유해발굴 결과는 63년 전 언론이 보도한 '어마어마한 죄상'보다 훨씬 충격적인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유해가 나무 밑둥아래 경사면에 거꾸로 걸쳐 있다. 살해 후 시신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것으로 보인다.
 유해가 나무 밑둥아래 경사면에 거꾸로 걸쳐 있다. 살해 후 시신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것으로 보인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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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2년 범국민위에서 <오마이뉴스>에 제공한 민간인학살 지도. 당시 지도에는 학살이 자행된 지역이 총 94곳이었지만 이후 진실화해위 조사결과 700여곳으로 늘었다.
 지난 2002년 범국민위에서 <오마이뉴스>에 제공한 민간인학살 지도. 당시 지도에는 학살이 자행된 지역이 총 94곳이었지만 이후 진실화해위 조사결과 700여곳으로 늘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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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살배기 어린애'까지 죽였다는 당시 검찰 조사 내용 그대로 현장에서 아이의 돌 반지가 발견됐다. 8살짜리 아이의 유해가 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푸른 빛 선명한 구슬과 함께 발굴됐다. 10세 미만인 여러 구의 유해와 은비녀 등 유품과 부녀자의 유해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불에 태워 확인 사살을 했다는 증언을 뒷받침하듯 불에 탄 흔적, 고통스러운 듯 입을 다물지 못한, 땅바닥에 엎어진 채 뼈가 뒤틀리고 뒤엉킨 처참한 유해도 잇따르고 있다.

실제 지난 2009년 정부 기구인 진실화해위원회는 '아산 부역 혐의 희생 사건'에 대한 조사결과를 통해 당시 충남경찰국장과 온양경찰서장은 물론 이승만 정부에 책임을 묻고 있다.

"경찰과 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에 의해 살해됐다. 학살 지휘와 지시는 당시 충남경찰국장과 온양경찰서장에 의해 이뤄졌다. 충남경찰국에도 지휘 책임이 있으며, 공권력의 불법행사를 막지 못한 이승만 정부에게까지 책임이 귀속된다."

하지만 2018년 현재, 아산지역 희생자 유해를 발굴하는 주체는 대한민국 정부가 아니다. 시민단체와 아산시다. 발굴지구 또한 일부분이다. 유해발굴 현장에 정부 관계자는 발걸음이 없다. 직접 가해자인 충남경찰청 또한 의례적인 추모와 사과는 고사하고 눈길조차 없다.

유가족들은 오늘도 "피해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배보상 관련법을 만들고 유족들의 한을 씻을 수 있는 추모사업과 교육사업을 추진해 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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