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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그리고 #위드유]
① 조민기 사건 피해자 '신상털기' 하는 언론, 왜 이러나
② 왜 아무도 이윤택을 쫓아내지 못했나

'관상'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알고 있다. 그는 누군가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가 악한 사람인지, 선한 사람인지, 악행을 저지르며 살아 왔는지, 선행을 하며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사람은 정말로 얼굴을 보고 누군가가 선량한지, 부도덕한지, 악한지를 알 수가 있는 것일까? 외모를 보고 인간의 선하고 악함과 가치관을 판단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나는 그가 그의 확신을 바탕으로 갖지 않아도 될 편견을 갖고 섣부른 판단을 내려 실수하는 것을 보았다.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은 선과 악, 범죄자와 비범죄자를 선명하게 가르지 않는다.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은 선과 악, 범죄자와 비범죄자를 선명하게 가르지 않는다.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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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특별한 사람?

더 자세한 가정을 해 보자. 집단 안에서 범죄자와 비범죄자가 섞여 있을 때, 누군가는 과연 그 무리에서 범죄자만을 골라 인식할 수 있을까? 전과자, 즉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선량한 '모범시민'이 보기에 뭐가 달라도 한참 다른 생김새와 행동 양식을 보일까?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이라는 제목의 미국 드라마를 좋아한다.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앞서 말했던 어떤 인간의 편견들을 가차없이 부수는 드라마이기 때문에 특별히 좋아한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는 선과 악의 사이, 범죄자(전과자)와 비범죄자(비전과자)의 사이를 선명하게 가르고, 절대선의 편에 서서 정의감에 도취되어 절대악의 응징을 기뻐할 수 없다.

이 드라마의 배경은 감옥이며, 그래서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범죄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거의 모든 인물이 여성이기도 하다. 여성이 강력범죄를 저지르고, 밀수꾼과 마약사범이 우정을 나누기도 하고, 교도관이 살인범이 되며, 때로는 누군가의 선의가 가장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세계에 초대 받은 시청자는 혼란스러워진다. 그 혼란스러운 감각이 좋다.

하지만 어쩌면 인간에게 편견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선하고 올바르고 정의롭고 싶어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판단할 것이 너무 많다. 세상의 모든 사건에 시비를 가려 선하고 올바르고 정의로운 편에 서기에 개개인의 시간적 물리적 자원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대개는 편견을 판단 기제로 사용한다. 우리에게 흔한 편견은 가령, 성범죄자, 성폭력 가해자는 어떤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당신의 머릿속 성폭력 가해자의 얼굴은?

이윤택 연출가, 조민기 전 청주대 교수, 조재현 배우 등을 향한 '미투' 운동 참여자들의 폭로가 확산되면서, 그들에 대한 비난 여론 내에서 그들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다는 평가를 꽤 많이 접했다. "그렇게 살아온 것이 얼굴에 드러난다", "눈빛부터 소름끼친다", "정말 끔찍하고 추악한 성범죄자의 얼굴이다" 같은 평가 말이다.

그러나 성범죄 가해자로 지목된 이에게 이러한 사후 해석을 통한 평가를 내리는 일은 어떤 효용이 있을까. 이러한 평가들은 오히려 위험하다. 범죄자, 가해자와 선하고 올바르고 정의로운 '우리' 사이의 명확한 선을 긋기 원하는 욕망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폭력 가해자는 11월의 황량한 어느 날 미친 과학자가 음산한 고저택에서 창조해 낸 괴물이 아니다.

많은 이들의 편견과는 다르게, 성폭력 가해자 열 명 중 거진 여덟 명은 아는 사람이다(2007년 부산성폭력상담소 통계). 또한 성폭력은 한 해에만 3만 건 가깝게 발생하며, 암수율(드러나지 않은 범죄의 비율)은 약 87.5%에 달하는 몹시 흔한 범죄다(2015년 대검찰청 통계).

성폭력이 나쁘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번 '미투' 운동을 진보와 보수 진영 사이에서 벌어지는 '공작'의 눈으로 평가해 논란을 일으킨 김어준 씨조차도 '미투'의 본질적 가치에 동의하는 해명을 내놓은 바 있다. 나의 주변의 선하고 정의롭고 올바르게 살고 싶어하는 평범한 남성들 역시 이번 '미투' 운동에 대해 공분하는 중이다.

하지만 성폭력은 소름끼치는 눈빛을 한, '관상'이 나쁜, 추악한 얼굴을 한 괴물 몇몇을 지목한 뒤 그들을 선량한 사람들의 사회에서 영구히 추방한다고 해서 근절되는 것이 아니다. 괴물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성폭력은 폭력이다

세상의 많은 문제는 사람들의 동상이몽 때문에 일어난다. 어떤 사안을 두고 표면적으로는 같은 용어를 쓰면서 열심히 논쟁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서로 말이 통하지 않고 접점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같은 용어를 각자가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면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렇기에 '미투' 캠페인이 가열찬 이 시점에 성폭력의 의미에 대해 다시 논하는 것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성폭력은 '성'과 '폭력'이 결합한 합성어다. 여기까지는 모두에게 쉽게 인지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합성어에서 두 어근이 결합되어 있을 때 화자에게 두 어근의 의미가 공평히 고유하게 와 닿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한 어근의 의미가 다른 한 어근의 의미를 압도적으로 누르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성폭력이라는 단어는 언중의 머릿속에 어떻게 인지되고 있는가?

'성'과 '폭력', 각각의 어근이 강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의미의 스펙트럼이 넓기도 하다. 그것이 문제다. 물론 모든 폭력에 대한 논의에서 특별히 성폭력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그러한 사건들을 따로 명명해야 한다. 그렇기에 '성'을 붙이는 것에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성'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에 즉각 '야한 것'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안타깝게도 성평등하지 않은 이 사회에서 그 '야한 것'으로 취급되며 유통되는 이미지들은 상당히 왜곡되었다. 성폭력을 로맨스로 착각하는 관계가 여기서 시작된다.

다시 말해, '성'에 방점을 찍어 성폭력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순간, 성폭력의 의미에도 왜곡이 발생하기 쉽다. 그러다 보면 성폭력 가해자는 자신의 행동이 '야한 것'이었을 뿐 별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지켜 보는 주변인이 성폭력 피해자의 문란함과 행실 등을 탓하는 2차 피해도 발생하곤 한다. 따라서 나를 포함한 거의 모든 여성주의자들은, 어느 한쪽의 의미에 방점을 찍어야만 한다면 '폭력' 쪽이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폭력의 방향은 물처럼 높은 데에서 낮은 데로 흘러간다. 즉, 폭력은 권력을 많이 가진 쪽으로부터, 권력을 가지지 못한 쪽으로 행사된다. 나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을 쉽게 때리는 사람은 없다.

방치된 구조 속에서 또 다른 얼굴을 한 가해자는 반드시 귀환한다.
 방치된 구조 속에서 또 다른 얼굴을 한 가해자는 반드시 귀환한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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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세계의 왕'이 되는 구조를 없애야 한다

"소름끼치는 눈빛을 한, '관상'이 나쁜, 추악한 얼굴을 한" 괴물 몇몇을 쫓아낸다고 성폭력이 근절되는 것은 아니라고 앞서 적었다. 하지만 그것이 성폭력 가해자들에게 아무런 조치를 취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공고한 권력 관계에서 일어난 것이 명확한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는 반드시 권력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져야 한다. 그것이 피해자를 위하는 일이며 또 이 사회를 위한 일인 동시에 가해자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폭력성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이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은 모두에게 위험하기 때문이다.

선택적 휴머니즘을 발휘하여 가해자의 업적과 재능을 아까워할 일도 아니다. 권력 구도에서 권력을 잡고는 약자를 향해 폭력을 휘둘러야만 제대로 발휘될 수 있는 종류의 재능, 그것으로 쌓인 업적이라면 이 사회를 위해 발휘되지 않고, 무너지는 편이 낫다.

하지만 그 다음도 중요하다. 가해자를 양산하는 구조가 뿌리박힌 분야라면, 거기서 현재의 가해자를 끌어내린다고 해서 그것으로 모든 일이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 구조는 제2, 제3의 가해자를 필연적으로 만들어 낼 것이며, 그때마다 괴물의 목을 치려 해도 소용없다.

그 분야에 뿌리 박혀 있는 구조 자체를 개편해야 한다. 현재 '미투'가 일어나고 있는 분야들의 공통점이 있다. 구성원들 간 권력의 상하 관계가 명확한 분야라는 것이다. 폭로자들의 서술 속에 재현되는 가해자들의 이미지는 "최고 연극 집단의 우두머리", "저희가 사는 세계의 왕"이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절대적인 무언가가 되고, 강한 쪽이 약한 쪽의 결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휘두르는 관계를 만들어내는 구조를 말이다. 성폭력은 권력관계의 문제이다. 그렇기에 문제는 절대 일소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단 한 가지의 해결책에만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해결책일 것이다.

방치된 구조 속에서 또 다른 얼굴을 한 가해자는 반드시 귀환한다. 이를 막고 싶다면, 이제는 제대로 해결해야 한다.


태그:#미투, #성폭력, #성범죄, #ME_T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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