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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들이 출근해 가장 기다리는 시간은 점심시간이 아닐까요? 그런데 점심값이 만원에 육박하면서 마음은 무거워지고 지갑만 가벼워졌다는 푸념만 들립니다. 치솟는 물가 때문에 가정경제도 휘청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대로 괜찮은지, 대안은 없는지 함께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봐야 할 때 입니다. '점심값 만원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에 그 답이 있진 않을까요? [편집자말]
호주에 처음 당도했을 때, 집안에서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불편했다. 수 십 년간  자동으로 행해지던 몸에 밴 것들이 더이상 자연스럽지 않았다. 하루에 몇 번씩 '잠깐 멈춤' 버튼이 눌러지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토록 꿈꾸던 주택 생활이었건만, 잔디는 언제 어떻게 뭘로 깎는지, 울타리를 타고 넘어 정글을 이룰 듯 쑥쑥 자라는 나무나 정원수들은 어떻게 관리하는지, 폭신폭신한 카펫 청소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어린 아이가 걸음마 배우듯 익힐 것들이 태산이었는데, 갑 중의 갑은 역시나 입에 들어가는 밥이었다. 한 끼니만 걸러도 뱃가죽이 등가죽과 사돈 맺자고 하는 듯하고, 눈은 퀭해지고, 손이 떨리는 나. 그야말로 나는 '밥심'으로 사는 탄수화물 중독자다.

"엄마, 너무 배고파.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

천만 다행이었다. 호주 생활한 지 4개월쯤 된 때라 아들은 영어를 못했고, 우리를 저녁에 초대한 오지(호주인을 일컫는 말) 호스트들은 한국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은 나도 배가 고팠다. 햄과 샐러드, 얇게 썬 신용카드 크기의 소고기 몇 쪽 정도가 저녁일 수는 없었다. 내 머릿속 사전엔 그런 걸 부르는 용어는 따로 있다.

'애피타이저!'

하교한 초등학교 아들의 점심 도시락통을 열어보니, 반 이상이 손도 안 댔다. 애가 배곯아서 속상한 것은 부차적인 마음이고, '내 음식이 이렇게 맛없나?' 자존심이 상해서 물었다.

"엄마, 미즈 울랜드(호주에서는 학생들이 선생님의 성을 부름)가 스낵시간에는 스낵만 먹으래."

한국 살 때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다녔던 아들은 시중에서 판매하는 과자나 초콜릿 등을 먹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크리스마스에 이모 산타에게서 고래밥 한 봉지를 얻어먹던 아들이었으니, 과자를 학교에 보내는 게 왠지 죄책감마저 들던 초보 멜버른 엄마는 영문을 알 수 없어 캐물었다.

"계란은 점심이니까 스낵 시간에 먹지 말라고 했어. 앞으론 나도 친구들처럼 과자 싸 줘."

형형색색의 채소와 치즈까지 넣어 만든 엄마표 영양만점의 계란말이를 먹지 말라니, 기가 차고 코가 막힐 일이었다. 난 그걸 만들기 위해 새벽 6시 30분에 기상했다.

호주의 점심 물가는 보통 15불 안팎
▲ 호주 카페의 물가 호주의 점심 물가는 보통 15불 안팎
ⓒ 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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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직장인 상당수, 도시락 싸 다녀

정착 초기에 우리 가족은 주말마다 집 근처에 있는 식당들을 순례했다.

'현지인 문화체험'이란 그럴싸한 이유보단, 음식을 만들 연장들이 몇 개 없어서였다.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몸의 속도를, 배를 타고 오던 각종 냄비나 요리 도구들이 따라 잡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주말 아침이면 현지카페들은 붐볐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주말 아침을 여유 있게 먹으러 나온 오지인들로 북적댔다. 혼밥을 먹으며 신문을 보는 할아버지, 손자 손녀를 데리고 나온 조부모, 가족 단위 모임, 카페 앞에 늘어져 있는 애완견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와, 여유 쪄네!" 탄성이 터져 나왔다.

머릿속에서 주말마다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는 내 모습을 그려보니 미소가 절로 나왔다. 물론 메뉴판을 집어 든 순간 1초만에 꿈이 깨졌지만 말이다.

값이 후덜덜했다. 아침이나 브런치 메뉴들이 보통 15불 안팎이다. 여기에 커피나 음료 하나 시키면 20불이 훌쩍 넘어가니 세 가족이 나가면 최소한 50불이다. 

비가 잦은 음습하고 우중충한 멜버른의 겨울 아침에 계란 후라이와 토스트 빵, 베이컨 몇 쪽에 15불 이상을 지불하고 싶지는 않았다. 난 밤새 온돌 없이 3도까지 떨어진 추위와 사투를 벌이다 온 사람이다. 뜨끈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콩나물 국밥이면 15불을 낼 의향은 다분했다.

호주의 레스토랑이나 카페의 음식 물가는 갓 도착한 한국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곤 한다. 직장인들의 점심값은 평균 10~15불 사이이고, 저녁을 레스토랑에서 먹으려면 적어도 인당 20~30불 정도는 예상하고 나가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호주의 법정 시급이 18.29불이어서 직장인들의 점심값이 아직 시급보다는 낮게 책정되어 있다는 점인데, 그럼에도 현지 직장인들의 상당수는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닌다. 

남편 회사의 경우는 동료들이 각자 빵, 햄, 치즈, 반조리 식품들을 일주일 분량씩 냉장고에 쟁여 놓고 데워 먹는다.
 남편 회사의 경우는 동료들이 각자 빵, 햄, 치즈, 반조리 식품들을 일주일 분량씩 냉장고에 쟁여 놓고 데워 먹는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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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회사의 경우는 동료들이 각자 빵, 햄, 치즈, 반조리 식품들을 일주일 분량씩 냉장고에 쟁여 놓고 데워 먹는다. 물론 일주일에 한 두 번은 맛집을 찾아다니기도 하지만, 점심 도시락 문화는 호주 사회에 전반적으로 보편화 되어 있다.

유치원에서부터 시작되는 도시락 문화

멜버른의 도시락 문화는 유치원에서부터 시작된다. 학령기 내내 학생들은 브레인푸드(과일과 채소), 간단한 스낵, 점심, 물통을 매일 가방에 넣고 다닌다.

매일 도시락을 싸가는 호주의 학생들
 매일 도시락을 싸가는 호주의 학생들
ⓒ 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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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이민자들이 이민초창기에 이미 경험했듯, 나 또한 매일 아침 도시락 거리를 생각해 내는 것이 골칫덩어리였다. 한국인에게 끼니란 밥-따끈한 국-밑반찬들이다 보니, 차라리 재직시절 지겹게 먹던 한국 학교의 급식 문화가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세상에나, 이렇게 무식한 엄마들이 있다니!'

이곳의 식문화는 어찌나 간단하고 간편한지, 처음 호주 아이들의 점심 도시락을 본 날 나는 충격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사과 한 알, 작은 칩스 한 봉지, 저녁에 먹다 남은 피자 한두 조각이나 햄치즈 샌드위치. 오지인들은 과일을 씻지도 않고 먹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니, 닦고 깎고도 불안해하던 한국 엄마의 눈에는 모든 게 거슬렸다.

도시락 준비가 무서워서 방학을 손꼽아 기다리다, 애를 셋씩이나 키우는 오지 부모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독립과 자립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사회의 부모들답게 초등 상급생만 되면 각자의 점심 도시락을 챙기도록 가르쳤다. 부모가 샌드위치 재료와 과일들을 사다 냉장고에 넣어 두면 아이들이 각자의 취향에 맞게 준비를 하는 식이다.

유치원부터 시작된 점심 도시락 문화는 자연스럽게 성인으로 이어진다. 멜버른의 거리나 공원 심지어는 걸어 다니면서 싸 온 샌드위치나 샐러드를 먹는 직장인들을 만나는 것은 흔한 풍경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초창기에 밥타령 하던 아들도 점차 샌드위치를 선호하게 되었다. '식사는 밥'이란 수 십 년간 머리 속에 박힌 등식을 지워 버리고 무식한(?) 엄마의 대열에 기꺼이 동참했더니, 도시락싸는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 밥이나 빵이나 탄수화물 덩어리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으니, 죄책감도 덜어지고 음식의 선택지가 훨씬 다양해졌다. 더 행복한 일은 밥 짓는 새벽 노동으로 부터 해방되어 그 시간에 글을 쓰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침에 어떻게 밥이 넘어가요?"

한국에서 10년이나 살아봤지만, 아직 아침밥을 넘기지 못하는 브라질 출신 남편과 아이는 종종 브런치를 먹으러 동네 카페로 간다.

'이때다' 싶은 나는 콩나물 김칫국에 밥을 말아 먹기로 한다.

"비싼 빵 쪼가리 잘 먹고 와요."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와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태그:#호주, #멜버른의 점심 풍경, #멜버른, #멜버른의 도시락 문화, #멜버른 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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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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