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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통일의 집'은 <문익환 평전>을 쓴 김형수 작가와 함께 문익환 목사가 오랫동안 사셨던 '통일의 집'을 박물관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카카오 스토리펀딩과 더불어 <오마이뉴스>에도 글을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배우 문성근의 출생

한국 민주화와 통일 운동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인물인 문익환의 아들, 배우 문성근은 보수 정권의 표적이 되어 왔다. 국정원이 배우 문성근을 "공화국 인민 배우 문성근"으로 각색한 사건은 희대의 블랙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한 배우의 이미지를 망가뜨리기 위해 일국의 정보기관이 합성사진을 제작해 유포하는 비정상적인 난동을 부렸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강변하는 '체제 이념수호'에 얼마나 큰 배신인가? 문성근의 아버지, 문익환은 이른바 '자유 대한민국 수립'에 큰 공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유수호'니, '안보'니 외치는 사람들이 감히 훼손할 수 없는 그만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야기를 배우 문성근의 출생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어린시절 문성근을 안고있는 문익환 목사(좌)와 93년 양심수 후원의 밤에서 함께 찍은 문성근과 문익환의 모습(우, 임수경 촬영).
▲ 문성근과 문익환 어린시절 문성근을 안고있는 문익환 목사(좌)와 93년 양심수 후원의 밤에서 함께 찍은 문성근과 문익환의 모습(우, 임수경 촬영).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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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도쿄 출생! 아버지 문익환, 어머니 박용길

문익환, 박용길 집안이 모두 독립운동을 해온 가문임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도쿄 출생'이라는 항목이다. 아버지 문익환이 도쿄 유학에서 돌아온 것은 1943년인데, 어찌하여 그 10년 후에 막내아들이 도쿄에서 태어나게 됐을까?

한국전쟁과 맥아더 사령부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문익환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해방 후 그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는 중국공산당과 소련공산당에 잡혀 두 차례나 죽을 고비를 가까스로 넘기고 삼팔선을 넘어왔다. 문익환은 만약 나라가 또 다시 공산당 치하에 들어가면 아버지가 위험하다는 생각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 자신도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찾아 만주 장춘에서 월남하였다.

전쟁 통에 가족과 연락이 끊겨 생사여부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부랴부랴 귀국을 서둘렀지만 모든 통로가 막혀 있었다.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찾아낸 방법이 일본에 있는 유엔 극동사령부에 지원하는 것이었다.

판문점 가는 길 헬기에서 내리는 문익환.
 판문점 가는 길 헬기에서 내리는 문익환.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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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가 지휘하는 유엔극동사령부는 한국전쟁의 지휘부이다. 정경모에 의하면, 한국전쟁이 계속 남쪽에 불리하게 돌아가면 지구 어딘가에 임시정부를 만들 속셈이었단다. 주로 미국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젊은 엘리트들을 임시내각의 각료로 세우기 위해 대거 불러다가 군속으로 채용하고 있었다. 문익환도 그런 재원으로 분류된 젊은 엘리트 중 한 사람이었다.

휴전회담을 통역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장 판문점 회담이 시작되었다. 유엔극동사령부는 통역사가 필요했으므로 한국인 중에서 영어회화에 뛰어난 인재를 뽑았다. 그 중 문익환과 나중에 1989년 방북 때 함께 갔던 정경모가 통역원으로 뽑혀 판문점 회담에 투입되었다.

정전회담장소에서 UN 깃발과 북한 인공기를 올려놓은 테이블 뒤에서 깃발들을 잡고 서있는 미국 M P.
▲ 판문점 정전회담장소에서 UN 깃발과 북한 인공기를 올려놓은 테이블 뒤에서 깃발들을 잡고 서있는 미국 M P.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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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이 회담에 투입된 시점은 1951년 늦가을이었다. 도쿄에서 헬기를 타고 판문점에 이르면, 휴전회담은 언제나 3자 회담으로 진행되었다. 한편에는 미국 측 대표가 앉고, 맞은편에는 조선 측 대표와 중국 대표가 앉는데 공용어는 영어였다. 미국 대표가 말을 건네면 미국 측 통역자는 우리말로, 또 중국 측 통역자는 중국어로 통역을 하고, 반대쪽에서 조선 대표가 뭐라고 하면 영어와 중국어 통역자들이 동시 중개를 하는 회담이었다.

한국 측 대표는 발언권조차 없는 미국 측 '옵서버'에 불과했다.

그렇게 판문점에서 영어, 조선말, 중국어, 일본어가 마구 뒤섞여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 문익환은 한국어의 운명에 더 주목했는지도 모른다.

도쿄 한글학교 교장집 막내아들

한국말 가르치는 미군 학교 교사들과 문익환 목사(맨앞 가운데), 그의 오른쪽 정경모, 윗줄 오른쪽에서 3번째 박용길의 언니 박용애.
▲ 미군 한글학교 한국말 가르치는 미군 학교 교사들과 문익환 목사(맨앞 가운데), 그의 오른쪽 정경모, 윗줄 오른쪽에서 3번째 박용길의 언니 박용애.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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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는 유엔극동사령부의 한국어학교에서 문익환은 교장이 되고 정경모는 교무주임이 되었다. 문성근이 태어난 때가 이때였다. 일본에 도착한 후 문익환은 가족들을 데리고 올 수 있는 방법을 백방으로 찾아보았다. 생각해 낸 방법은 일본에서 신학교를 마치고 전도사 생활을 했던 아내 박용길이 일본 한인교회 청빙을 받아 자녀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마침 아내의 형부가 외교관으로 도쿄에 거주하고 있어 그 집에 함께 지낼 수 있었다. 전쟁 통에 온 가족이 흩어져 피난살이를 하느라 죽을 고비를 넘던 때에도 막내 아들만은 도쿄 한복판에서 비교적 윤택한 환경에서 태어났다. 정전 협정 후, 1954년 문익환은 다시 미국으로 학업을 마치러 가고, 가족들은 귀국하였다.

도쿄에서 자매 박용애, 박용길(뒷줄) 가족이 함께 지냈다.(1954년)
▲ 문익환 가족 도쿄에서 자매 박용애, 박용길(뒷줄) 가족이 함께 지냈다.(1954년)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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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은 직접 만든 교재로 미군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나라와 언어를 빼앗겼던 아픔을 겪었던 문익환의 한글사랑은 지극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일본신학교 재학 중에도 최현배 선생 말본으로 우리말과 글을 공부했다. 한신대학교 교수 시절에는 신학뿐만 아니라 국어도 가르쳤다. 그는 신구교 합동 구약성서를 아름다운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을 하였으며, 마침내 시인이 되었다.

1989년 평양에서 김일성주석을 만났을 때, 남북의 언어가 달라지는 것을 염려하여 '남북 공동 국어사전' 제작을 제안하고 합의하였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군사재판때의 문익환, 김대중.
▲ 내란음모 재판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군사재판때의 문익환, 김대중.
ⓒ 사단법인 통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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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문성근의 우리말 사용법이 한국어 회화의 살아 있는 모델로서 어린이들의 귀에까지 쏙쏙 박히게 발음된다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SBS TV <그것이 알고 싶다>를 진행하면서 작가가 써주는 원고를 다시 고쳐서 아이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우리말로 표현하곤 했다. 우리말이 외래어에 오염되고 순수한 우리말이 잘못 사용되는 것을 지적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으면서 자랐기 때문이었다.

문익환이 여섯 차례에 옥고를 치르는 동안 밖에 있는 자녀들은 온 힘을 다해 아버지와 함께 했다. 옥바라지를 하며 때때로 밤샘 농성을 했다. 성명서와 호소문을 썼으며 면회기록, 재판기록도 놓치지 않고 기록으로 남겼다.

문성근이 기록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당시 재판정에서 진술한 김대중 선생의 최후 진술.
▲ 김대중 진술기록 문성근이 기록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당시 재판정에서 진술한 김대중 선생의 최후 진술.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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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재판장에서는 필기도구도 허락되지 않았다. 문성근과 형 문의근은 재판 내용을 최대한 외워 가지고 나와 기록했다. 문성근은 자신이 한 마디라도 놓쳐 김대중 선생님이 사형당하면 어쩌나 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머리를 쥐어짜며 기억해냈다. 훗날 김대중 선생은 재판기록 누가 썼느냐며 문성근에게 정치를 해보라고 권유하였다고 한다.

학자로 목회자로 살아가던 문익환을 부조리한 세상이 불러낸 것처럼 세상은 연기자, 방송인의 삶을 살아가는 문성근을 불러냈다. 아버지를 닮은 아들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아버지로부터 배운 한글 사랑을 실천하였듯이,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올 줄 알면서도 역사의 부름에 응했다.



태그:#문익환, #문성근, #도쿄, #극동사령부,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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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와 박용길 장로의 유택을 박물관으로 새롭게 단장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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