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2000년 2월 22일 창간한 <오마이뉴스>가 올해로 18주년을 맞았습니다. 15주년도, 20주년도 아닌, 18주년에 얼마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습니까만, 사람으로 치면 18살인데요. '소년도 청년도 아닌 경계선에서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은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18살 오마이뉴스가 18년째 무언가를 하고 있는 동갑내기 친구를 찾아가 질풍노도의 시절을 함께 공감하고 꿈과 희망에 관해서 얘기 나눴습니다. 이 인터뷰는 그 두번째입니다. [편집자말]
최인숙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팀장
 최인숙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팀장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 1999~2000년] 경쟁률 50대 1, 초봉 월 60만 원... 그래도!

"그동안 신나게 잘 놀고먹었으니, 이제 좀 불편하게 살아도 되겠구나." 1999년 12월 참여연대의 상근 활동가 공채 공고를 본 최인숙씨는 곧바로 응시원서를 집어 들었다. 창립 6년 만에 처음으로 실시한 참여연대 공채 경쟁률은 50대 1. 공채라고는 하지만, 주로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응시했다. 참여연대 기존 상근자 역시 운동권 출신 일색이었다. 그래서 시위대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던 '비운동권 출신' 최인숙씨의 합격은 의외였다.

"처음에 참여연대 와서 보니 굉장히 집단적이고, 엠티 가면 팔뚝질하면서 (민중가요 부르고)... 그런 분위기에 적응하는데 1년 반이 걸렸다. 나중에는 그들이 왜 그렇게 밤새워 매진하고 몰입하는지,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 그때만 해도 시민운동이 운동권 출신 중심이어서 나와 같은 비운동권 출신은 거의 없었다. 2000년대 중반이 되면서 운동권 출신이 점점 줄고 보편화한 시민운동으로 거듭났다. 지금은 비운동권 출신이 더 많다."

최인숙씨가 참여연대에 들어가서 처음 3개월 동안 받은 월급은 60만 원 정도. 2001년 참여연대에서 재정 투명성 차원에서 공개한 상근자 월급 명세에 따르면, 이보다 19만 원 오른 79만 원을 받았다.

그러나 최씨는 월급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제 좀 의미 있게 살아봐야겠다"고 다짐하며 찾아간 곳 아닌가. 최인숙씨는 "하나의 일에 꽂히면 다른 것에 미련이 없어지는 스타일"이라며 "월급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가 더 중요했다"고 말했다.

[# 2000년] 쌍욕

시민운동이라는 걸 배우기 시작한 최씨에게 첫 번째 강렬한 인상을 준 사건은 시민사회단체의 낙천·낙선 운동이었다. 2000년 1월 12일 발족한 총선시민연대는 그해 4·13 총선을 앞두고 "낡은 정치권의 권위주의적 독단과 낡은 편견을 심판하기 위한 유권자 심판 운동"을 천명했다.

탈세, 사기 등 파렴치 범죄를 저지른 후보들을 중심으로 낙천대상자 명단을 발표하며 각 정당을 압박했고, 실제 이들 가운데 27명이 불출마선언을 하거나 공천을 받지 못했다. 특히 총선시민연대가 선거 직전 발표한 낙선대상자 86명 가운데 59명, 집중 낙선대상자 22명 가운데 15명이 선거에서 패배했다. 유권자의 힘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안겨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당시 최인숙씨는 참여연대 사무국 총무부에서 일하며 총선시민연대 지원 업무를 병행했다. 지원이라고는 하지만, 낙천·낙선 운동에 대한 항의 전화 응대가 주를 이뤘다. 최씨는 18년 전 받았던 그 전화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경상도에서 항의 전화가 많이 왔다. 낙천·낙선 후보가 경상도 지역에 많았기 때문인데, 특히 남성들이 전화해서 사투리로 막 쌍욕을 하더라. 그런 전화는 처음 받아봤다. 살면서 쌍욕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 뒤로 띠릭~띠릭~ 하는 전화벨 소리가 밤에 자기 전까지 환청으로 들렸다. 그런 상태가 한참 갔다. 그게 약간 트라우마처럼 남아서... 그동안 참여연대에도 항의 전화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대면하지 않는 상태에서 들리는 경상도 남자 목소리에 지금도 약간 움찔하는 게 있다."

[# 2007년] 첫 번째 위기, 그리고 '허세욱 열사'


작가가 꿈이었던 최씨는 참여연대가 발행하는 월간지 <참여사회>로 자리를 옮겨 9년간 잡지 만드는 일을 했다. 최씨는 그곳에서 시민운동 활동가로서 첫 번째 위기를 맞는다.

2007년 4월 1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장 앞에서 택시기사 허세욱(54)씨가 분신했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 강제철거에 맞서 싸우다가 사회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한 허씨는 참여연대를 비롯해 여러 시민사회단체 회원으로 활동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 촛불집회,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희생자 추모집회 등에도 참여했다.

특히 허씨는 <참여사회> 2004년 1월호 표지 인물에 선정될 정도로 시민운동에 적극적이었다. 2007년 2월호에도 그의 인터뷰가 실렸다. 허씨는 이 인터뷰에서 "집회장엔 상하도 없고 너와 나도 없습니다, 오직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힘만이 있을 뿐이죠, 일한 만큼 대접받는 사회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잡지를 편집한 담당자가 최씨였다. 허씨의 분신 소식은 그래서 더욱 충격이었다.

"나에게 첫 열사는 허세욱씨다. 그런 죽음을 처음 접해봤다. 분신 전날까지도 나와 통화했다. 그때 내가 일을 하느라고 '선생님, 제가 나중에 전화 드릴게요' 했는데, 깜빡하고 못 했다. 별일 아니겠지 했는데, 나중에 '내가 뭔 짓을 한 거야' 싶더라.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사는 것 같아서 너무 힘들었다. 선생님이 우리 활동가들에게 정말 잘해주셨다. 그런 것들이 생각나서... '아, 내가 이 사람들의 삶을 챙기면서 살 수 있을까?' 못 하겠더라. (잠긴 목소리로) 그런 죽음, 그리고 또 다른 죽음을 보면서..."

최인숙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팀장
 최인숙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팀장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 2008~2014년] 모이면, 바꿀 수 있다

허세욱 열사의 분신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던 최인숙씨.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고 자조하며 시민운동을 시작한 지 7년 만에 처음으로 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2008년 5월 최씨는 시민들의 거대한 촛불 함성을 목격하며 자신을 추스르게 된다.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결정에 따라 서울 도심에서 학생과 시민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5월 2일부터 7월 12일까지 100일 이상 진행된 촛불집회에 연인원 300여만 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됐다. 굴욕적이고 불투명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과정에 대한 국민적 우려와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특히 청년들이 주도한 2008년 촛불시위는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됐고, 새로운 시위 문화를 정착시켰다. 이전 광장의 비장함은 여유와 부드러움으로 대체됐다. 참가자들이 함께 어울려 춤추고 노는 축제의 장으로 바꾼 것이다. 친구와 연인, 엄마·아빠 손을 잡고 나온 가족 등 참가자의 세대와 계층도 다양해졌다. 결국 이명박 대통령 스스로 졸속 추진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해야했다.

"재미있게 일했지만, 힘들었던 시기도 당연히 있었다. 그때마다 대규모 시국 사건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였다. 나에게는 처음 대규모 대중과 만나는 시민운동이었다. '아, 시민의 힘이 모이면, 바꿀 수 있구나'하는 것을 그때 처음 실감했다. 먹거리와 관련된 사안이라 조금 더 시민들과 밀접하게 연결됐다. 다양한 계층과 세대가 모인 것을 직접 보고 경험하면서 힘들던 시기가 지나갔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최씨는 더욱 현장에 파묻혀 살았다. 2012년 <참여사회>에서 나와 경제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참여연대는 중소상공인 가맹점주들과 함께 가맹점주 권익 보호와 '갑을 문제' 개선을 위한 대기업의 횡포 및 불공정행위 근절 캠페인을 전개했다. 그 성과로 2013년 7월 '가맹사업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가맹사업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최씨는 그 3년 동안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했다.

"2012부터 2014년까지 잠을 하루에 3~4시간 자고, 주말도 없이 일했다. 낮에는 2~3건의 기자회견을 조직하고, 밤에는 전문가들과 회의했다. 편의점주가 잇따라 사망하면서, 유족의 얘기를 방송에 연결해서 내보내는 식으로 이슈를 공론화시켰다. 변호사들 불러 모아서 만든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나중에 대통령 선거에서 경제민주화를 의제화시키는 등 나름의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아쉬움이 남았다."

[# 2018년 겨울] 박근혜 퇴진, 다음은 국회다!

박근혜 정부는 친재벌적 규제 완화 정책으로 개정된 가맹사업법을 난도질했다. 최씨는 2015년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팀장을 맡으면서 좀 더 본격적으로 민생입법 운동을 벌여 나갔다. 그 사이 정권이 바뀌었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정치권 상황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국민을 위한 민생법안이 국회 마지막 관문인 법제사법위원회에 발목이 잡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일부개정법률안(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당장 최저임금 인상 논쟁이 불붙었는데, 상가 임대료는 계속 폭등하고 있다. 여기 서촌만 하더라도 관광객이 몰리면서 장사가 잘 되는 것 같지만, 6개월 후엔 상인들이 전부 바뀐다. 임대료 상한선을 두고, 장기적으로 영업을 할 수 있도록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안 통과가 필요한 이유다. 상인들은 임대료만 절약해도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 괜찮다고 한다. 이 법을 막고 있는 게 법사위다. 논의조차 안하는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어서 너무 답답했다."

지난해 12월 서울 종로구 서촌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던 김아무개씨가 가게를 비우기 위해 강제집행에 나선 임대인의 사설 용역업체 직원들과 맞서다가 손가락 일부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2009년 개업 당시 이 식당의 보증금은 3000만 원, 월세는 300만 원 수준이었지만, 2015년 바뀐 건물주는 보증금 1억 원에 월세 1200만 원을 요구했다.

"법사위에 민생법안이 전부 꽉 막혀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성명서 하나 내고 말 것인가? 지난 6개월 동안 너무 추웠던 그 광장에서의 수고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만 볼 것인가? 고민이 됐다.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는 안된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비판만 해서는 독자들이 떠나간다. 정부한테만 혁신이나 획기적인 개혁정책을 내놔라, 할 것이 아니라 시민단체나 언론에도 그러한 혁신이 필요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 국민들이 정말 현명하다는 것이다. 지난 '박근혜 퇴진' 촛불시위 때 '박근혜 퇴진, 그 다음은 국회다'라는 얘기를 많이 했다. 그 흐름과 관점을 따라가야 한다. 시민들의 목소리를 잘 파악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온오프라인에서 시민과 만나는 접점을 자꾸 만들어야 한다."

최인숙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팀장
 최인숙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팀장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 18년만의 휴식] 우리가 만들려고 하는 세상은?

참여연대는 상근 활동가에게 7년마다 안식년의 휴식을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최씨는 오는 3월 18년 만에 처음으로 안식년을 떠난다.

"그동안 뭔가 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성에 안 찼던 거다. 그러다가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가 시작됐다. 저 나름으로 열심히 했다고 생각한다. 결국 박근혜가 내려오면서 한 시기가 끝났다는 느낌, 뭔가 정리가 됐다는 느낌이 들면서 '아, 이제 정말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더라. 박근혜 퇴진 촛불시위 자체가, 몇십 년 누적됐던 우리 사회의 적폐가 한바탕 정리되는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내 인생에 대한 고민을 못 하고 살았는데, 이번에 쉬면서 조금 해보려고 한다."

20대 후반에 참여연대에 들어가 40대 중반을 맞은 18년 차 시민단체 활동가 최인숙씨. 그를 인터뷰하면서 18년 차 <오마이뉴스> 기자로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비슷한 시기, 비슷한 현장을 지켜봤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답을 찾아가는 길에 함께 있다는 공감대가 더 컸다.

- 지난 18년 동안 시민단체 활동가로 살아왔다. 나름의 소회가 있을 것 같은데.
"시민운동을 시작하고, 제가 직접 한 것은 아니지만, 함께 일원이 되어서 하다 보니, 변화되는 게 느껴지더라. 그 희열이라는 것은... 단숨에 바뀌지는 않지만, 서서히 하면 되는구나, 포기하지 않으면 되는구나, 이런 것을 배웠다. 이런 걸 쌓고 축적해서 언젠가는 발판이 되도록 하는 게 시민운동이구나, 우리가, 내가 하는 일이구나, 싶더라. 나는 그래서 운동하는 게 막 재미있었다."

- 시민운동이 관성화 됐다는 지적이 많다. 물론 <오마이뉴스>도 변화가 필요한 상황이다.
"시민운동의 영향력이 점점 낮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시민운동) 전성기에 했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는 게 고민이기는 하지만, 시민사회운동을 대변하고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생겨났다.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제도 그중 하나다. 시민들 스스로가 감시자가 되어서 의원들을 감시하는 운동을 벌이는 것도 긍정적인 현상이고 더 퍼져야 한다.

이제 그것을 더 뛰어넘는 다른 방안을 고민해야 하는 게 시민운동의 숙제다. 시민운동의 패턴이, 다루는 의제나 방식이 늘 일률적이고 똑같았던 것 아니었나, 시민과 함께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을 못 찾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은 늘 있다. 돌파구를 저희도 잘 못 찾겠다. 그런데 세상은 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마이뉴스>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2000년 초반에 (시민기자의) 사는 이야기를 내세우며 대안 언론으로서 역할을 했지만, 그다음에 더 두드러지는 것은 많지 않았다."

- 이젠 비판이나 문제제기에 그쳐선 안 되고, 대안을 모색하고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고 했는데.
"우리가 만들려고 하는 세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라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딱 이렇다'라고 정리가 잘 안된다. 어? 다 잘 먹고 잘사는 세상, 경제적 주체가 균형 있게 이익을 배분하면서 정의롭게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나라 아니겠어? 하지만 이게 너무 어려운 거다. 복지국가도 시민들에게는 어렵다. 시민과 눈높이가 맞아야 하고, 그들에게 와 닿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지, 그런 것을 과연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 수년에 걸쳐 고민하고 있지만, 하나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뭘까?

그리고 '촛불 정권이기 때문에...' 라는 말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마음이 되게 급했다. 지방선거 전에 국회에서 민생입법이 처리되어야 하는데, 아니 저렇게 몽니 부리고 있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생각에... 그렇다고 무작정 현장으로 뛰어나가자고 하는 게 능사는 아니기 때문에 더 어려운 거다. <오마이뉴스>가 지난 촛불광장에서 이뤘던 공론의 장을 계속 만들어가면 좋을 것 같다."

- 참여연대 내에서도 구성원 사이에 세대 갈등이 있나? 신세대 활동가와 18년 된 활동가의 차이는?
"갈등이 왜 없겠나.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 있다고 보면 된다. 운동 단체라서 특별한 건 없다. 선배 그룹들은 희생이라고도 얘기하지 않고 선배라고 티를 내는 것 같지도 않은데, 연차 높은 사람이 얘기하면 (후배들은) '저 사람 구식이다'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가. 그런 걸 한 번 같이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나는 이전에 그 선배가 하는 말을 그냥 들었지만, 똑같은 얘기를 (후배들은) 다르게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있는 것이다.

서로에게 없는 인권 감수성을 채워줘야 하는 것도 당연히 있고. 그런 갈등이 <오마이뉴스>에서도 있겠지만 우리에게도 있다. 문제라고 직시하고 진단하고 이걸 어떻게 할 것인지 구성원들이 총의를 모아서 해결해 나가는 것이 그 조직의 건강성을 좌우한다고 생각한다. 참여연대는 비교적 완만하게 해결하거나 완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총의는 모이는 편이다."

[창간 기획 - 18세 오마이뉴스가 18세 동갑내기에 묻다]
① 18년째 사막 달리는 '1호 오지레이서' 유지성 "영웅은 없다"
③-1 이인영의 정치 18년 "민주주의 신인류에 맞는 헌법 만들어야"
③-2 이인영의 정치 18년 "이재명의 사이다 발언, 나는 왜 못하냐고?"


태그:#최인숙, #오마이뉴스창간기획, #참여연대, #시민운동, #활동가
댓글19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