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시작은 이랬다. 지난 해 11월 11일, 무슨 과자의 날이라며 아이들의 들뜬 목소리가 교실을 덮었다. 예전엔 초등학교나 중학교 교실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풍경인데, 다 큰 고등학생 아이들에게까지 시나브로 전염이 된 모양새다. 숫제 교내 아침 방송의 오프닝 멘트로 버젓이 등장한 지경이니, 이러다간 달력에 표기될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 친구가 있는 아이들에게 11월 11일은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보다도 몇 갑절 더 중요한 날이라고 한다. 거의 생일에 버금가는 '기념일'로, 자칫 깜빡했다가는 관계가 끝장나기 일쑤라며 낄낄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몇몇 아이들의 가방 속엔 교과서와 참고서를 대신해 친구로부터 선물 받았거나, 다른 친구에게 건넬 빨간 포장의 과자 뭉치가 가득 들어있었다.

이건 아니다 싶어, '꼰대'라는 질타를 무릅쓰고 기어이 역사 교사의 티를 냈다. 열 일 다 제쳐두고 '오늘의 역사'를 주제 삼아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으로부터 그리 오래지 않은 1989년 11월 11일은 하루 전 허물어진 베를린 장벽을 넘어 동서독 주민들이 광장에 모여 얼싸안은 채 통일을 노래했던 역사적인 날로 기억된다. 주지하다시피, 이는 소련의 해체로 이어져 냉전이 종식되기에 이른다.

동서 냉전을 상징하는 베를린 장벽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독일 통일의 밑돌을 놓은 날이라며 목청을 돋우었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심지어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며 반문하는 아이도 있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우리나라에서 이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게 문제라고 했더니, 되레 '진지충'이라는 조롱이 메아리 되어 돌아왔다.

기실 11월 11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요즘 아이들은 국경일과 기념일에 대해 도통 관심이 없다. 오로지 '빨간 날'인지 여부만 중요하게 여길 뿐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명색이 고등학생인데 현충일과 제헌절이 언제인지 정확하게 답할 줄 아는 아이가 의외로 적다. 그런 그들에게 현충일과 제헌절이 무엇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날인지 묻는 건 차라리 실례다.

만약 한국동란을 6.25 전쟁이라고 명명하지 않았다면 언제 발발했는지 몰랐을 게 틀림없다.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 입장에서는 3.1 운동과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에 최초로 이름 붙인 이에게 감사해야할 일이다. 물론, 몇 년도에 벌어진 일인지 캐묻거나 해당 사건들의 역사적인 의미와 인과관계를 이해하리라 기대하는 건 금물이다. 더욱이 학교에서 거의 배우지 않는 현대사임에랴.

2월 달력 부분 몬드리안의 '차가운 추상'을 모티프로 만든 것이다.
▲ 2월 달력 부분 몬드리안의 '차가운 추상'을 모티프로 만든 것이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오늘의 역사' 달력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언제부턴가 우리가 '기념'하는 날은 역사적, 사회적 의미보다 자본의 입맛과 요구에 따라 교묘하게 제정되고 기억되는 시대가 돼버렸다. 요즘은 '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 '로즈데이' 등으로 이어지는 매월 14일의 기념일을 마치 명절처럼 쇤다. 또, 11월 11일의 아이디어를 본뜬 듯 '삼겹살데이(3월 3일)'와 같은 재기발랄한 기념일까지 '창조'해내고 있다.

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과 추석 말고 아이들이 기억하는 국경일과 기념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설이나 추석은 긴 연휴라는 껍데기라도 남아있지만, 휴일도 아닌 수많은 기념일들은 존재감을 잃고 그 역사적 의미는커녕 이름조차 기억되기 버거운 실정이다.

그래서 마음먹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시나브로 잊혀져가는 '오늘의 역사'를 달력 위에 구현해보려는 계획이다. 책상 앞에 올려두고 매일 거울처럼 쳐다보는 달력 위에 파란만장했던 우리 현대사를 담아보자는 취지다. 대개의 국경일과 국가 지정 기념일은 최근 100여 년간의 역사적 사건을 담고 있어, 잘만 간추린다면 웬만한 근현대사 교과서 부럽지 않은 교재로도 손색없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이름 하여 '현대사 달력 프로젝트'다.

공식 기념일 지정 여부를 떠나, 중요한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한 줄 평'으로 간략히 적을 요량이었다. 날짜 아래 그저 이름 세 글자 적어 넣는 기존의 식상한 방식에서 탈피하려는 것이다. 아무리 국경일과 기념일이 중요하다고 해도 아이들에게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에서다.

우선 아이들의 눈에 익숙한 사건과 인물을 추려냈다. 그들을 대상으로 하려다 보니, 배경 사진은 교과서에 실린 것을 주로 썼고, 글도 가급적 교과서에 언급된 내용과 어휘를 그대로 사용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프로젝트의 취지를 살리기가 힘들어,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 세계사의 사건들도 양념 삼아 군데군데 끼워 넣었다.

사건을 선정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데는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지만, 현대사를 공부한 역사 교사로서 최대한 신중을 기했다.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자기검열' 때문이다. 제주 4.3과 위안부 문제 등 여태껏 진상규명이 되지 않았거나 해결되지 않은 현재진행형 사건들은 과감히 다뤘지만, 내용은 간략하고 담담하게 서술했다. 또, 몇 해 전 영화 <암살>에서 주인공의 실제 모델인 독립운동가 남자현의 행적은 영화의 힘을 빌려 끄집어냈다.

3월 달력 부분 흑백 신문 기사의 틀을 모티프로 만든 것이다.
▲ 3월 달력 부분 흑백 신문 기사의 틀을 모티프로 만든 것이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표기할 역사적 사건의 기점을 어디로 잡는가도 나름 중요했다. 통상 교과서에서는 현대사의 기점을 광복 직후로 보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적 갈등과 가치관의 전도 현상이 친일 청산의 실패와 남북 분단에서 비롯됐다고 여겨 일제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청일전쟁(1894)으로 잡았다. 주지하다시피, 청일전쟁은 일본이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게 된 변곡점이다.

친일부역자와 위안부 문제 등은 가장 크게 비중을 둔 내용이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민족과 국가를 팔아먹은 이들의 행적과, 그들에 당당히 맞선 독립운동가들의 영웅적인 삶을 대조할 수 있도록 했다. 한편, 수많은 평화의 소녀상과 수천 나비의 날갯짓으로 되살아난 고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공개 증언(1991년 8월 14일)도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오늘의 역사'다.

달력에 표기한 가장 늦은 사건은 1997년 12월 20일 단행된 '전두환의 사면 복권'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임기 말이었던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국민 화합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전격적으로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두환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과는커녕 어처구니없는 변명으로 일관하며 숱한 희생자들을 욕보이고 있다. 사면 복권이 되레 '악마의 등에 날개를 달아준' 꼴이어서, 사면 복권의 폐해를 꼭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부러 담았다.

아울러,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에 가장 큰 생채기를 남긴 군사독재정권의 폐해도 충실히 담고자 했다. 박정희 정권을 시작으로 30여 년 뒤의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권력에 의해 자행된 대표적인 폭거들을 엄선했다. 물론, 군사독재정권이 저지른 야만적인 행위들을 고작 열두 장 달력에 다 담아내기란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중요하다고 판단한 사건이 특정 달에 쏠려 있어 달력에 배치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적으면 여백이 많아 황량해지고, 많으면 글자가 작아지거나 난삽해지기 때문이다. 한 달에 대략 7~8개로 맞추기 위해 더하고 빼는 작업이 여간 만만치 않았다. 그것이 1월부터 12월까지 틀을 모두 달리 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였지만, 매월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다양한 디자인을 활용해 재구성해보는 장점도 있었다.

10월 달력 부분 한글날을 10월 중 가장 중요한 기념일로 여겨 모티프 삼은 것이다.
▲ 10월 달력 부분 한글날을 10월 중 가장 중요한 기념일로 여겨 모티프 삼은 것이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기록되지 않는 역사는 지워진다'

사실,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아이디어를 낸 건 나지만, 디자인과 편집 등 컴퓨터를 이용한 대부분의 작업은 고2인 민수(가명)가 도맡았다. 그는 장래 프로그래머를 꿈꾸는, 자타 공인 교내 최고의 컴퓨터 달인이다. 더욱이 예술적 감수성까지 남달라 컴퓨터 앞에 앉으면 흡사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는 듯했다. 아무튼 그가 아니었다면, 이 프로젝트는 백년하청이었을 것이다.

잠시 휴가를 다녀온 기간을 제외하면, 기획 단계부터 편집까지 겨울방학을 온통 이 프로젝트에 쏟아 부었다. 민수도 매일 방과 후 수업이 끝나면, 교무실에 와서 함께 컴퓨터 앞에 앉았다. 수차례의 수정 끝에 완성한 날, 그는 지금껏 해본 컴퓨터 작업 중 가장 의미 있고 보람된 일이었다면서 스스로 대견해했다. 짐짓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잘 만들었다고 자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천신만고 끝에 완성했지만, 예상치 못한 장애물을 만났다. 몇몇 업체에 문의한 결과, 100부를 기준으로 1부당 제작비용이 만 원을 호가했다. 세상물정에 어두웠던 탓일까. 디자인과 편집 등을 의뢰하지 않고 직접 만든 완성본을 업체에 넘기면, 그다지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탁상용 달력이 나올 줄로만 알았다.

업체에서 기존 제공한 양식을 그대로 다운받아 사진과 글귀 등을 업로드하면 저렴하게 만들 수 있지만, 별도로 제작해 의뢰하는 거라면 비용이 크게 뛸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달력이 배달되면, 내심 아이들에게 새해 선물로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김칫국부터 마신 셈이 됐다. 교실마다 홍보한 뒤 구입을 원하는 아이들에게 제값 받고 팔까도 고려해봤지만, 교사로서 할 짓은 아니다 싶어 포기했다.

민수 또한 좋아서 한 일인데, 친구들에게 돈 받고 팔게 되면 우리의 순수한 동기와 자발적인 노력이 폄훼된다며 한사코 반대했다. 차라리 완성된 달력 파일(PDF)을 아무나 가져다 쓸 수 있도록 인터넷에 공유하는 것이 낫겠다고 제안했다. 어차피 '오늘의 역사'를 일상 속에서 기억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도록 하자는 취지였으니, 달력이면 어떻고 인터넷이면 또 어떠냐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올해는 4.3 항쟁 70주년인데다, 내년이면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로서 헌법 전문의 맨 첫머리에 언급되는 3.1 운동 100주년이 된다. 그깟 돈 때문에 끝내 바라던 결실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크지만, 어쩌면 아이들에게 파란만장했던 현대사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며 스스로 위안 삼게 된다. 끝으로, 탁상용 달력의 삼각 받침대 아래에 적어 넣고자 했던 글귀를 여기에 덧붙여야겠다. 이 글에서라도 달력의 완성을 보고 싶어서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지만, 기록하지 않는 역사는 아예 기억에서 지워진다."

덧붙이는 글 | 기사에 나온 달력을 받고 싶으신 분들은 기자 개인 쪽지로 연락 보내주시면 됩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오늘도 난 세계일주를 꿈꾼다. 그 꿈이 시나브로 가까워지고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