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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여성가족부 정현백 장관은 서울 종로에 있는 한국기독교연합(한기연)을 방문해 이동석 대표회장을 만났다. 관련 보도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한기연 대표회장은 여가부가 한국 사회의 어머니 역할을 잘해 달라는 말을 했다고 하며, 정현백 장관은 '성평등'이라는 단어가 영어 'gender equality'를 단순 번역한 것이라고 해명했단다.

이는 '여성가족부(Ministry of Gender Equality and Family)'가 작년 12월 '제2차 성평등 정책 기본계획'을 발표하려다가 보수 개신교 단체의 반발("여가부가 '성평등' 용어를 써서 성소수자를 용인한다")에 직면하자, 결국 '제2차 양성평등 정책 기본계획'으로 변경한 일과 관련해 정현백 장관이 직접 해명한 걸로 보인다.

최근 들어 보수 개신교 단체를 중심으로 '성평등'이라는 용어 자체를 문제 삼는 경우가 많아졌고, 일부 혐오세력들은 "양성평등 YES, 성평등 NO"라는 말도 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양성평등이라는 용어가 지극히 차별적인 성별이분법('정상적인' 남성과 여성 vs. '비정상적인' 성소수자)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이미 자리를 잡은 셈이다.

'충남 인권조례 폐지를 위한 충남 범도민대회'에 참가한 참가들은 '양성평등 YES, 성평등 NO'라고 쓰여진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충남 인권조례 폐지를 위한 충남 범도민대회'에 참가한 참가들은 '양성평등 YES, 성평등 NO'라고 쓰여진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신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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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정현백 장관은 한국여성단체연합과 참여연대 대표 등을 지낸 대표적인 여성운동가 출신이고, 작년 9월 한 인터뷰에서는 여성가족부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성평등의 시각에서 접근하는 부서가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서는 정책의 질이 굉장히 달라진다"고 말한 바 있다. 불과 몇 달 전에 여성가족부의 역할을 '성평등'의 관점에서 강조하던 장관이 지금은 그저 "단순 번역"일 뿐이라며 굉장히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한국여성단체연합에서도 2월 8일 성명을 내고 "성별 이분법과 이로 인한 위계질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여성억압과 여성차별의 핵심원인이다. 성평등을 주장하지 못한다면 성차별을 해결할 수 없다"며 "더 이상 '성평등'에 대한 왜곡과 혐오를 용납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여성단체 역시 진정한 성평등의 중요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의 성명 <더 이상 ‘성평등’에 대한 왜곡과 혐오를 용납해선 안 된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의 성명 <더 이상 ‘성평등’에 대한 왜곡과 혐오를 용납해선 안 된다>.
ⓒ 한국여성단체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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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시점에서 여성가족부의 영어 이름인 'Ministry of Gender Equality and Family'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게 필요하다. (물론 해명의 차원이었지만) 정현백 장관은 단순 번역이라고 했다는데, 그렇다면 '여성가족부'를 '성평등가족부'로 바꾸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을까? 냉정하게 바라보면, 여성가족부가 성평등가족부로 명칭을 바꾼다고 해서 딱히 잘못될 건 없다.

어차피 성평등이라는 말 속에 양성평등도 포함되고, 오히려 성소수자까지도 포함한다는 의미에서는 더 진일보한 명칭이라고 볼 수 있다. 도대체 '제2차 성평등 정책 기본계획'이 그대로 발표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걸 '제2차 양성평등 정책 기본계획'으로 바꾼 건 명백한 퇴행이다. 여성가족부가 성평등에 대해 이 정도 의지도 없다면, 그 존재 가치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동안 강고한 남녀차별 속에서 오랜 세월 약자로 살아온 대한민국 여성들의 양해는 필요할 것 같다. 비록 실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하더라도, 여성가족부라는 명칭 자체가 지닌 상징성과 아직도 남녀평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걸 계속 상기시키는 효과는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명칭 변경을 위해서는 소위 말하는 '대승적' 차원에서의 합의가 필수적이다.

요즘은 '양성평등'이 혐오세력의 언어가 되긴 했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이들은 양성평등이라는 말 자체를 외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바야흐로 '성평등'의 시대가 다가오니 그들 나름대로 '태세전환'을 한 셈이다. 이제 혐오세력들은 남녀평등보다 '젠더(gender)'를 공격한다. '정상적인' 남성과 여성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이 성소수자를 차별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드러난 여성가족부 장관의 퇴행은 굉장히 우려스럽고, 또 혐오세력으로 하여금 앞으로도 자신들이 한국사회에서 공세적으로 활동해도 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시그널'로 작용할 수도 있다. 성평등 정책을 주관하는 장관으로서 이토록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잘못된 행태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이나 언론에서는 별로 크게 문제시되지 않는다는 점도 정말 심각한 문제 아닌가?

한국사회는 이참에 혐오세력을 향해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확실하게 '성평등'으로 나아갈 거란 선언을 하는 게 필요할 듯싶다. 그러기 위해서 상징적으로 여성가족부의 명칭을 성평등가족부로 변경하는 것에 대해 전향적으로 검토해 보는 건 어떨까? 이미 시대착오적 관점이 된 성별 이분법을 뛰어넘어 대한민국의 성소수자·여성·남성이 만약 이 문제를 합의할 수 있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분명히 좀 더 평등한 곳이 될 것이다.


태그:#성평등가족부, #여성가족부, #성평등, #혐오, #성소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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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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