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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독서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만 하더라도 내가 사는 30가구가 넘는 동네에서 TV가 있는 집은 '도랑 건너 할머니 댁'이 유일했다. 책을 읽는 것 말고는 달리 유흥거리가 없었던 것이 나를 독서가로 이끈 원동력이었다.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때는 가정환경조사라는 것을 했는데 '장서의 수'도 조사 항목에 있었다. 언젠가 50권이라고 적었는데 너무 큰 거짓말을 해서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닥치는 대로' 읽어봤자 내가 읽은 책은 몇 권 되지 않을 거다.

우리 동네 가구 전체의 장서 수를 합쳐봐야 얼마 되지 않으니 '닥치는 대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만화책을 싫어하는 아이는 없었다. 어찌나 많이 돌려보았는지 만화책 커버는 모두 두툼한 비닐로 무장되었다.

그 당시 만화책은 요즘으로 치면 스마트폰 게임과 같은 것이었다. 더 읽을 책이 없게 되자 베개만큼이나 두툼한 <가정의학>을 읽기도 했다. 벼농사로 생계를 잇는 시골 농가에 왜 그 책이 있었는지 지금도 의아하다. 어쨌든 나는 <가정의학>을 코흘리개 때 이미 독파한 사람이다. 동시에 농민신문의 애독자이기도 했다.

어쩌다가 새로운 책을 손에 넣으면 함부로 낭비하지 않았다. 책이 주는 즐거움을 최대한 만끽하고 싶었다. 그 방법이란 밥과 함께 책을 읽는 것이었다. 대청마루에서 흰 쌀밥을 물에 말아 먹으면서 책을 읽는 쾌락은 요즘 아이들로 치면 동네에서 제일 잘 나가는 피시방에 가서 컵라면에 가장 화젯거리인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기분에 버금 갈 것이다.

밥을 먹으면서 책을 읽는 나를 보면서 친구들은 식사하는 시간도 아까워서 그러나 보다고 생각했을 거다. 사실은 뭔가를 먹으면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을 뿐이다. 영화를 보면서 팝콘을 먹는 것과 다름없다. 나처럼 뭔가를 먹으면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독서 간식 안내'를 해본다.

독서 하면서 반드시 먹어야 한다면!
 독서 하면서 반드시 먹어야 한다면!
ⓒ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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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류

꼭 밥이어야 한다. 반찬도 단순해야 한다. 소화가 다소 걱정되더라도 국이나 물에 말아 먹는 것을 권한다. 말아 먹기 싫은 사람이라도 반찬이 3개를 넘어서는 안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책을 응시하면서 밥을 먹으면 반드시 국물이나 반찬을 흘리기 마련이다. 책을 원래 험하게 읽는 사람은 책에 국물을 흘리더라도 개의치 않는다고 하지만 며칠 전에 산 신상 옷이라면 사정은 달라지지 않을까?

경험상 책을 읽으면서 뭔가를 먹으면 책보다는 옷에 뭔가를 흘릴 확률이 높다. 책은 민첩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의 통제 아래에 있지만, 옷은 당신의 주의력이 미치지 않는다. 먹거리가 입으로 향하는 중간에 흘리지, 책에 도착해서 흘리는 경우는 적다.

기왕에 말아먹는다면 국물이 새빨간 육개장보다는 담백한 미역국이 좋겠고 가능하다면 맹물을 권한다. 맹물은 흘리더라도 표시가 덜 나지만 육개장 국물을 책에 흘리면 회복할 수 없다.

면류에 관해서 말하자면 라면은 야식의 제왕이지 독서 간식으로서는 최악의 선택이다. 라면 국물은 냄새도 강하고 여러 가지 혼합물이 많아서 책에 흘리면 복구하기가 까다롭다. 면발이 아무래도 쫄깃한 라면의 특성상 국물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튈 확률이 높다. 면류를 좋아한다면 라면보다 빨리 먹을 수 있고, 국물도 담백해서 피해의 정도가 약한 잔치국수를 권한다.

밥이나 면을 먹으면서 책을 읽을 때는 책의 종류를 고려해야 한다. 책의 내지가 잘 펼쳐져서 손으로 압박을 가하지 않아도 얌전히 자신이 읽을 쪽이 펼쳐지는 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야 책을 탁자에 얹어놓고 독자는 먹거리가 자신의 입으로 정확하게 배송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 손가락으로 힘을 줘서 내지를 고정해야 하는 책을 밥이나 면을 먹으면서 읽는 것은 최상위 고수만 가능한 영역이다.

과자류

쿠크다스는 절대로 안 된다. 상처를 잘 입는 운동선수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는가? 쿠크다스 몸이라고 한다. 쿠쿠다스 원형을 전혀 손상하지 않고 봉지에서 꺼내서 입으로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못 할 일이 없을 거다.

쿠크다스는 흘리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이거나, 잠시 뒤에 초강력 진공청소기를 가동할 사람만 먹기 바란다. 오직 쿠크다스를 먹는 것에만 집중한다고 해도 분명 조각들을 흘리기 마련이거늘 하물며 책을 읽으면서 이 과자를 먹는다는 것은 보통 무모한 짓이 아니다. 바닥은 물론이고 당신 옷의 구석구석, 책의 내지 등등 쿠크다스가 침투하지 못하는 장소는 없다.

굳이 독서용 과자를 먹고 싶으면 쿠크다스보다 난이도가 현격히 낮은 '아이비'를 권한다. '에이스'도 쿠크다스 보다 못할 뿐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 삼가야 한다. 그럼 독서용 과자로 적당한 것은 무엇인가?

'오징어 땅콩'을 권한다. 흔한 과자이면서도 독서가의 책과 옷에 손상을 거의 주지 않는다. 부스러기도 별로 없다. 보지 않고도 손을 뻗어서 손쉽게 먹을 수 있어서 독서에 집중하기에 쉽다. 그래도 과자 표면의 부스러기에 있는 기름기가 책에 묻기도 하니까 될 수 있는 대로 책장을 넘기는 손과 과자를 집는 손을 구분해서 사용하는 것이 좋다.

팝콘은 영화와도 좋은 친구지만 책과도 괜찮은 친구다. 부스러기를 흘릴 확률이 낮고 책을 응시하면서 손만 뻗어서 먹을 수 있다. 다만 알이 단단하고 적당히 큰 것이 좋다. 그래야 부스러기를 흘리지 않고 알 자체를 분실하지 않는다.

독서용 과자로 가장 좋은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츄파춥스'다. 알이 굵어서 오래 빨 수 있으니까 독서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 무엇보다 샤프트가 장착되어 있으니 그 어떤 곳에도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이 사탕은 원래 책을 읽으면서 먹으라고 만든 사탕은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다. 완벽하다. 너무 완벽하다.

아이스크림류

독서 간식으로 떠먹는 아이스크림이 적당한지 바의 형태로 된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나의 경험만을 가지고 따진다면 떠먹는 것이 좋다. 떠먹는 아이스크림은 먹을 때만 숟가락을 사용하니까 아무래도 위험의 확률이 낮고 집중도도 높다.

막대 형태로 된 아이스크림은 상시 손에 들려 있으니까 조금만 지나면 책에 집중한 나머지 본인이 아이스크림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녹아내린 아이스크림 국물이 용암처럼 흘러내리는데도 말이다.

과일류

독서 과일로 최악의 선택은 방울토마토다. 크기도 한입에 쏙 들어가고 겉이 반질반질한 것이 독서 과일로 적당해 보이지만 입에 넣어서 압박을 가하는 순간 토마토는 하나의 수류탄이나 다름없다.

조심성이 없는 독서가가 먹는 방울토마토는 파편이 입 밖으로 돌진해서 당신의 옷과 책에 씨앗을 뿌린다. 오래된 책에서 싹이 튼다면 그건 방울토마토가 범인이다. 수박의 경우는 잘게 썰어서 포크로 찍어서 먹어야지 길게 자른 수박을 손에 들고 먹으면 피해가 커지니까 조심해야 한다.

독서 과일로 가장 적합한 것은 바나나다. 바나나는 츄파춥스와 함께 독서 간식의 쌍두마차다. 아니다. 원탑이라고 봐야겠다. 사탕은 몸에 해롭지만, 바나나는 건강에 좋기까지 하니까 말이다. 바나나는 조각을 흘릴 확률도 없고 과즙도 거의 없다. 나처럼 조심성 결핍증 환자조차도 바나나와 함께라면 그 어떤 희생을 치르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다.

음료류

모든 음료는 독서 간식으로 좋다. 음료를 마시면서 책을 읽으면 남들이 보기에도 지성미가 넘친다. 이미지 개선용으로는 최고의 선택이다. 다만 주의할 점은 차가운 것보단 뜨거운 음료가 좋겠다. 차가운 음료는 벌컥벌컥 마시니까 고급스러운 이미지도 덜하고 아무래도 빨리 마시다 보면 사고의 위험이 존재한다. 음료를 담는 용기는 조그마한 찻잔보다는 머그잔이 낫겠다. 아무래도 책에 집중하면서 사고 없이 집어 들기엔 큰 머그잔이 편하다. 음료의 경우는 그 종류보다 온도와 용기의 선택이 중요하다.


태그:#독서, #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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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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