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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재에 있는 책 중에서 가장 비싸지도, 희귀하지도, 재미있지도 않으면서도 각별한 책이 있다. 유홍준 선생이 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다. 결혼하기 전에 각자 따로 산 같은 책이다. 결혼하기 전에 아내는 그간 소장하던 책을 전부 버렸다. 일찌감치 무소유를 손수 실천한 분이시다. 아내가 무슨 책을 읽어왔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오직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사서 읽은 것만은 확실하다.

결혼하고 살림은 합쳤지만, 아내는 합쳐야 할 서재가 없어서 '서재 결혼시키기'는 못 했다. 그래서 유독 '앤 패티먼'이 쓴 <서재 결혼시키기>를 재미나게 읽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였으니까 말이다.

아내가 데리고 온 책이 없어서 각자의 서재를 결혼시키기 위해서 티격태격할 일이 없었다. 서재는 오로지 나의 영지였고 아내로서는 불한당의 본거지였다. 나에게 서재는 임꺽정에게 청석골과 같은 곳이지만 아내는 진압해야 할 반란군의 소굴이다. 서재는 아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먼지의 본거지이니까.

<책 읽다가 이혼할 뻔>을 우연히 발견했다. 참 재미난 제목이라 생각했을 뿐, 어떤 내용인지를 가늠하지 못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부부가 서로에게 책을 추천하고 추천받은 책을 구해서 읽은 다음 감상문을 쓰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부부가 릴레이식으로 서평을 쓰는 게임을 한다. 참으로 지적인 부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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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읽다가 이혼할 뻔> 표지 표지
ⓒ 정은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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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난 것은 이 책을 번역한 사람도 부부라는 것. 서재를 반으로 나눠서 사용하는데 아내는 요괴나 저주, 괴담에 관한 책을, 남편은 PC 관련 전문서, 물리나 수학, 요리책을 주로 읽는다. 취향이 다르다. 이 책의 서두에 '이 글은 부부가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서로에게 책을 추천해온 격투의 궤적이다'라고 쓴 이유를 알겠다.

나는 아내에게 서재를 소탕당하는 처지인지라 부러운 마음을 가득 담아서 이 부부가 펼치는 '책의 결투'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부부가 서평을 같이 쓴다고 하니까 닭살이 돋는 부부간의 금실을 자랑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 않다. 남편과 아내의 서평에서 한 부분을 읽어보자.

"나는 심령사진이나 괴담 관련 그림 따위는 보이지 않도록 숨겨둔다. 사람얼굴이 크게 나온 표지도 안 된다. 밖에서 보는 책은 큰 문제가 안 되지만 집안에서는 책을 뒤집어 놓는다. 결혼 초기에 아내가 그런 표지의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곤 했는데, 나를 괴롭히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로 의심하기도 했다." - 32쪽

"이전 연재에서 남편은 표지가 무서운 책이 싫다고 폭로한 바 있다. 그렇다면 내가 아는 한 가장 무서운 표지의 책을 골라야지. 참고로 현재 남편은 아파서 이불 안에서 끙끙거리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읽는 <쿠조>는 또 다른 맛이 있지 않을까." - 43쪽

왠지 이 남편이 나와 비슷한 처지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내는 일부러 남편이 무서워하는 표지를 남편의 책상 위에 올려 둔 것이 분명하다. <쿠조>는 착하기 이를 데 없는 순한 눈을 가진 세인트 버나드 종의 개가 악마로 돌변하는 내용이란다. 악마로 변한 개는 주인도 공격한다고. 이쯤에 이르자 이 부부가 벌이는 격투의 결과가 눈에 보인다.

<쿠조>를 추천받고 읽어야 하는 남편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다. 줄거리를 낱낱이 되새기고 이 책을 읽고 여러 가지를 배웠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사실 남편은 아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무서운 표지가 있는 책만 소름이 돋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책장에는 괴담을 다룬 책이 꽂혀 있다. 이 남편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아내는 1982년생이고 남편은 무려 1972년생이다. 아마도 남편은 귀여운 아내의 장난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어갈수록 아내의 애정행각이 뭇 남성의 질투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남편은 기운이 없는 아내가 활기를 되찾도록 야한 책을 추천하고, 아내는 의사로부터 살을 빼야 한다는 충고를 들은 남편에게 <이타야식 군것질 다이어트>를 권한다. 이쯤 되면 그냥 격투의 궤적이 아니고 애정의 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이 부부는 꾸준히 상대에게 도움이 되거나, 알았으면 좋겠다거나, 직업상 필요한 책을 임무 과제로 부여한다. 아내는 전업 작가인 남편에게 <소설 강좌 잘 나가는 작가의 모든 기술>을, 남편은 '아내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자 보충이 시급한 부분은 미국의 산업 지식'이라고 생각해서 <연봉은 '사는 장소'에 따라 정해진다>를 고른다. 책으로도 닭살 행각을 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상대방에 대한 것이라면 시시콜콜하게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는 않다. 결혼한 지 수년이 지날 때까지 남편이 커피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하니까. 이 부부의 릴레이 서평은 결국 서로의 부족한 점을 메워주고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으로 읽힌다. 유쾌한 책인데 소개하는 책들의 대부분들이 듣지도 읽지도 못한 일본 책들이라서 공감을 하는데 약간의 어려움은 있었다.

그런데 왜 이 책의 제목은 <책 읽다가 이혼할 뻔>일까? 아내는 뭐든지 남편과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한다. 서평을 주고 받으면서 아내는 '종이접기'를 함께 하자고 여러 번 말하지만, 남편은 거절했다. 서로 자신이 있는 곳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몸져  누워있는 남편에게 뭐라도 먹이겠다고 요리를 하려는 아내에게 '아플 때 당신이 한 요리를 먹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당당히 말하는 남편이라니. 연재를 거듭할수록 자신의 영역과 취향을 고수하려는 상대에게 말은 못하지만 섭섭함이 누적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내 아내가 원래 책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이웃의 서재를 보고 감탄한 나머지 나에게 가장 넓은 방을 서재로 사용하도록 계획한 것은 아내였다. 서재에서 혼자 책을 읽은 남편보다는 소파에서 함께 드라마를 보는 남편이 더 좋은 남편이다.


책 읽다가 이혼할 뻔

엔조 도.다나베 세이아 지음, 박제이.구수영 옮김, 정은문고(2018)


태그:#서평, #부부,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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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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