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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고래' 하면 동해나 울산, 장생포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홍어로 유명한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 '고래공원'이 있습니다. 흑산도와 고래는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을까요? 왜 흑산도에 고래공원이 생긴 것일까요? 대체 흑산도에선 고래와 관련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 연재는 흑산도와 고래의 연관성을 좇는 해양문화 탐사기입니다. [편집자 말]

 흑산도 포경근거지 관련 기사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매일신보> 1918년 5월 3일자.
 흑산도 포경근거지 관련 기사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매일신보> 1918년 5월 3일자.
ⓒ 매일신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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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에 포경근거지까지 설치하면서 한반도 근해에 살던 큰고래들을 무참히 학살했던 일제. 일제 강점기에 발행된 신문들은 흑산바다에서 얼마나 많은 큰고래들이 죽어갔는지를 밝혀주는 자료가 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발행된 신문 가운데 가장 먼저 '대흑산도 포경근거지'에 관한 보도를 한 것은 <매일신보(每日申報)>다. <매일신보>는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배설(裵說:Ernes Thomas Bethell)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일제가 국권침탈 직후에 사들여 1910년 8월 30일부터 <매일신보>로 이름을 바꿔 발행했다.

1918년 5월 3일 자 <매일신보>는 '대흑산도 포경고(大黑山島 捕鯨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대흑산도 포경장의 금기 포경고는 지난 28일 지금 합계 78두에 달하는데 작년 4월과 동수에 달하였다"라고 보도한다. 이 보도를 통해 우리는 1917년 4월 현재에도 최소한 78마리의 고래가 흑산도 근해에서 살해당했음을 알 수 있다.

고래 남획을 막기 위해 설정했던 최소한의 금어기까지 조선총독부가 철폐한 사실을 전한 기사도 있다. 1921년 4월 27일 자 <매일신보>는 '경어업 해금(鯨漁業 解禁)'이라는 제목을 단 기사에서 "총독부에서는 근래 조선 근해 경업(고래잡이 어업)을 매년 5월 1일부터 9월 말일까지 금지하였는데 금년도부터 이를 철폐하고자 총독부령으로 고시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어서 기사는 "조선의 경업(고래잡이)은 11월부터 익년 4월 말일까지 반년 간에 했어도 항상 200두의 산획(産獲)이 유지한 바, 산지는 주로 대흑산도, 대청도, 울산전진이다"라고 덧붙였다. 반년 동안에 무려 200두가 넘는 고래를 흑산도, 대청도, 울산 전진에서 포획했다면 각 포경근거지마다 6개월 동안 평균 66마리가 넘는 큰 고래를 잡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특히 이 기사가 '고래의 주 산지'를 열거하면서 '대흑산도'를 가장 먼저 언급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도 시점인 1921년은 일제가 고래 포획의 장을 동해에서 서해와 남해로 급격하게 확장시키던 시기다. 무차별한 고래 학살로 동해에서 고래 포획 량이 줄어들자 그 영역을 서해와 남해로 넓혔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발행된 신문들은 일제가 포경을 '국가 기간산업'으로 얼마나 비중 있게 여겼는지 보여준다. 일제는 해마다 '포경 성적'을 확인하고 이를 대대적으로 알렸다. 그 중심엔 흑산도 근해에서 학살당한 큰고래들이 있었다.

 1921년 4월 27일 자 <매일신보>는 고래 남획을 막기 위해 설정했던 최소한의 금어기까지 조선총독부가 철폐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1921년 4월 27일 자 <매일신보>는 고래 남획을 막기 위해 설정했던 최소한의 금어기까지 조선총독부가 철폐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 매일신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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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2월 14일자 <매일신보>는 '작년 중 대흑산도(黑山島) 포경회사 성적(捕鯨會社 成績)'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일본 포경회사가 대흑산도에서 올린 포경 수입이 "10만6천원(十萬六千圓)의 거액(巨額)"이라고 소개한다.

또 1928년 5월 18일자 <매일신보>는 '포경 90두 대흑산도(捕鯨 九十頭 大黑山島)서'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어 "대흑산도의 4월 중 포경 상황은 동월 중에 45두를 포경하였는데 60척 이상은 매두 3천원, 50척 이상은 매두 2천원 가량이라 하며 본년에 벌써 90두를 포획하였다"라고 보도했다.

<동아일보> 1935년 6월 20일자는 "일본포경주식회사의 대흑산도 기지에서 74마리의 어획고를 올려 포경업 사상 최고의 신기록을 수립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매일신보>는 <동아일보>보다 하루 늦게 보도했다. <매일신보>는 1935년 6월 21일자 신문에서 "대흑산도 근해에서 고래를 74두 잡았고 1두 평균 3000원으로 22만원의 거액이다"라고 전했다.

목포에서 발행되던 <목포신보>도 1938년 5월 13일자에서 "고래 43두를 대흑산도에서 잡았다"면서 "휴지 기간 중 포경 합계는 43두로, 전년 59두에 비해 16두가 감소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들은 한결같이 매우 충격적인 사실을 전하고 있다. 회유동물인 고래의 생태적 습성을 감안해 일제조차 설정했던 최소한의 포경 금지 기간이 매년 5월 1일부터 9월 말일까지였다. 이 시기는 고래가 따뜻한 흑산도 근해 등에서 새끼를 낳고 어린 새끼들을 양육하는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1921년 조선총독부령으로 고시한 '포경 해금' 조치는 일제가 포경회사들에게 발행한 무차별 고래 학살 면허나 다름없었다.

일제 강점기에 발행된 신문에서 흑산도 근해 포경 실태를 마지막으로 보도한 것은 <매일신보> 1944년 1월 26일자였다. <매일신보>는 '반도(半島)에 고래떼 - 대흑산도에 개가(凱歌)'라는 제목을 달고 "신춘을 맞이하여 대흑산도에서는 일본해양통제회사(日本海洋統制會社)의 포경선 00척이 조업을 개시하여 벌써 3만원 대 이상의 고래 두 마리를 잡아 금후의 포경의 다대한 성과를 거둘 것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또 신문은 "우리나라 고래잡이가 전시에 그 활동하는 범위가 축소되어 있는 이 때 조선 근해에는 경상도 울산 근해로부터 현해탄 부근에 이르는 광대한 해역을 중심으로 하여 강원도 장전, 전남 대흑산도, 황해도 대청도 근해의 각 어장이 전국에서도 굴지의 해역으로서 최근에 그 어업활동이 주목을 받고 있다"라고 했다. 태평양전쟁의 전시체제하에서도 울산 근해와 강원도 장전, 흑산도 근해, 대청도 근해를 '고래잡이 굴지의 해역'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발행된 신문에서 흑산도 근해 포경 실태를 마지막으로 보도한 것은 <매일신보> 1944년 1월 26일자였다. <매일신보>는 ‘반도(半島)에 고래떼 - 대흑산도에 개가(凱歌)’라는 제목을 달았다.
 일제 강점기에 발행된 신문에서 흑산도 근해 포경 실태를 마지막으로 보도한 것은 <매일신보> 1944년 1월 26일자였다. <매일신보>는 ‘반도(半島)에 고래떼 - 대흑산도에 개가(凱歌)’라는 제목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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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신문은 "조선 근해의 최근 1년 동안의 포경어황은 총독부 수산과 보고에 의하면 그 회유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다"라고 실토하고 있다. 한반도 근해에서 벌어진 일제에 의한 무차별적인 고래 학살은 일제 스스로 "(고래) 회유 상태가 좋지 않다"라고 시인할 정도였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포유류인 고래의 몸에 저장된 흑산바다를 비롯한 한반도 근해는 더 이상 새끼를 낳고 키우는 생명의 바다가 아니었다. 고래들에게 한반도 근해는 학살의 바다, 죽음의 바다였던 것이다. 그런 학살의 바다, 죽음의 바다에 어느 고래가 돌아왔겠는가.

이 신문은 "울산 근해 어장의 115두를 우두머리로 각 어장에도 평균 10두를 짧은 기간에 잡아서 어황의 활발함을 전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곧 배 안에서 처리되어 고기, 기름, 냉동간장(冷凍肝臟), 증골(蒸骨) 등 광범위로 남김없이 이용되어 조선포경업의 어황은 크게 기대된다"라 끝을 맺고 있다.  

일제 강점기 신문 보도에서처럼 해방 직전까지 일제의 포경근거지로 중요하게 활용되었던 흑산도. 얼마나 많은 고래들이 흑산바다에서 일제에 의해 죽임 당했을까.

일본포경협회는 1926년부터 1944년까지 포경근거지별로 포획한 큰고래의 수를 기록한 <포경통계부>를 작성했다. 1926년부터 1944년까지 일제가 한반도에 설치한 4개 포경근거지(울산 장생포, 제주도 서귀포, 전남 흑산도, 황해도 대청도)에서 포획한 고래는 모두 3130마리. 이 가운데 858마리를 대흑산도 포경근거지에서 포획했다. 1926년부터 1944년까지 일제가 한반도 근해에서 포획한 고래의 1/4이 넘는 27.4%를 흑산도 근해에서 포획했던 것이다.

이 기간 동안 흑산도 근해에서 포획 당했다고 기록된 858마리의 고래 가운데 가장 많이 포획된 고래는 참고래로 무려 827마리였다. 다음으로 많은 고래는 돌고래(혹등고래)로 28마리가 이 기간 동안에 포획됐으며, 대왕고래도 3마리 포획되었다.

일본포경협회가 작성한 <포경통계부>와 신문 보도, 그리고 그 밖의 자료를 교차 분석해보았다. '대흑산도 포경근거지'가 설치된 1916년 12월 이후인 1917년부터 1934년까지 17년 동안 흑산도 근해에선 약 1095마리의 큰고래가 일제에 의해 죽임 당했다. 그리고 1935년부터 1944년까지 9년 동안 약 369마리의 큰고래가 죽임 당했다. 즉 1917년부터 1944년까지, 흑산도 근해에선 약 1464마리의 큰고래가 일제에 의해 학살당한 것이다. 이조차 이런저런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을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일제 강점기, 흑산바다를 비롯한 한반도 근해에선 학살당하는 고래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흑산바다에서만 최소한 1464개의 고래 가족이 학살당해 해체 당했다. 학살의 바다, 죽음의 바다로 변해버린 한반도 연근해에 고래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흑산바다를 비롯 한반도 근해에서 가장 많이 대형 고래를 포획한 일본 포경회사는 동양포경주식회사였다. 동양포경주식회사는 대형 고래 해체 장면을 담은 기념 우편엽서를 만들 정도였다.
 흑산바다를 비롯 한반도 근해에서 가장 많이 대형 고래를 포획한 일본 포경회사는 동양포경주식회사였다. 동양포경주식회사는 대형 고래 해체 장면을 담은 기념 우편엽서를 만들 정도였다.
ⓒ 일본포경협회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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