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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먼저 읽을 것인지 영화를 먼저 볼 것인지는 취향의 문제이지 고민의 문제는 아니다. 책을 읽고 나서 좋으면 영화를 찾아보게 되고, 영화를 보고 나서 좋으면 소설을 읽게 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영화가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소설화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쉬리>, <편지>,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 <괴물> 등의 경우가 그렇다.

소설이든 영화든 무척 좋아하게 되면 다른 형태로 다시 감상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가보다. 김치도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김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김치전, 김치찌개, 묵은지 등 다양한 방법으로 김치를 즐긴다. 좋아하는 것을 다양한 방법으로 즐기는 것은 보편적이긴 한데 우선순위는 존재한다. 영화와 책도 마찬가지다. 굳이 영화를 먼저 보는 사람이 있고 소설을 먼저 읽는 사람도 있다.

물론 책만 읽는 사람도 있고 영화만 보는 사람도 있다. 먼저 소설을 먼저 읽는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 사람들이 소설을 먼저 읽는 이유는 소설을 읽고 나서 영화를 보게 되면 소설 속의 장면들을 어떻게 영상으로 구현이 되는지 상상하게 되어서 좋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경우에 속한다. 예를 들어서 <폭풍의 언덕>을 감동적으로 읽어서 오래전에 상영된 영화를 일부러 찾아서 보았더랬다. 황량한 언덕에 홀로 서 있는 저택 '워더링 하이츠'가 어떤 모습인지를 영화 속에서나마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설레는 일이었던가? 다부지고 복수심에 불타는 '히스클리프'는 어떻게 생긴 배우가 연기할지 그리고 영화 속의 '캐서린'은 얼마나 예쁜지 등등이 궁금했다.

또 소설속에서 내가 좋아했던 장면을 영화속에서는 어떻게 나오나를 확인하기도 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서 상상한 영상과 영화로 구현된 영상을 비교해보면 재미난다. 물론 문장력이 뛰어난 작가가 아무런 제약이 없이 글로 휘두른 상상속의 영상과 제작비와 기술적인 제약이 따르는 영화 속에 나오는 영상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1950년대 미국에 사는 가난한 여류 소설가와 영국에 있는 헌책방 주인이 주고받은 편지와 우정을 다룬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읽고 아주 오래전에 개봉했던 영화를 힘들게 구해서 보기도 했다.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도 말이다. 외국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면 좋은 점이 자막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당신이 <폭풍의 언덕>을 좋아해서 여러 번 읽었다고 치자. 당신이 비록 영어를 잘하지 못하더라도 자막이 없이 영화 <폭풍의 언덕>을 감상하는 데는 별다른 지장이 없다. 이야기를 다 알고 있으니 대사를 정확히 못 듣더라도 소설 속에 나오는 대사와 묘사만으로 어렵지 않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자막이 없는 스크린의 '광활함'을 즐기는 것이다.

소설을 먼저 읽는 사람들은 가능한 영화가 소설의 내용을 똑같이 구현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자신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상상과 영화 속에 나오는 영상과 비교가 할 수 있잖는가. 소설을 먼저 읽는 사람들은 애당초 책보다 나은 영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서 소설 <태백산맥>을 들어보자. 영화<태백산맥>의 비록 상영시간이 168분이지만 10권 분량의 소설을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한다. 조정래가 자랑하는 질퍽한 묘사와 쫀득쫀득한 언어의 유희도 영상으로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도 그렇지만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을 영화가 어떻게 풀어냈는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영화를 보는 경우가 많다.

소설보다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영화를 보는 재미를 반감시키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똑같지는 않더라도 어쨌든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는 소설과 내용이 비슷할 터인데 소설을 먼저 읽으면 '셀프 스포일러'를 하는 셈 아닌가?

물론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영화는 무려 결말이 소설과 영화가 전혀 다른(소설은 주인공 엄석대가 경찰에게 체포되는 것을 암시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은사의 상가에 큰 화환을 보내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성공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한다)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주요 흐름은 소설과 영화는 같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화를 먼저 보면 영화 자체에 대해서 실망할 수는 있지만, 책을 먼저 읽는 사람들처럼 소설과 영화의 간격에서 오는 실망은 할 일은 없다. 영화를 먼저 보면 소설 속의 내용과 달라서 실망한다든가, 자신이 소설을 읽으면서 감동하거나 좋아했던 부분이 영화 속에서는 나오지 않아서 실망할 일도 없다.

소설은 먼저 읽으나 나중에 읽으나 상관이 없지만, 소설을 먼저 읽고 나서 영화를 보면 원작이 주는 위압감에 눌려서 영화가 초라해 보이는 역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웅장한' 것으로 상상했는데 영화 속에서는 '초라하게' 나와서 '이게 뭐야'라고 어이없어할 일도 없다.

사실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소설을 읽으면 영화 속에 나오는 영상이 자꾸 떠올라서 읽어나가기가 쉽지 않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가 큰 성공을 하는 사례는 무궁무진하지만, 영화를 기반으로 해서 쓰인 소설은 영화에 인기에 잠시 편승한 '굿즈'에 가깝다.

영화가 먼저냐 소설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지도 모르겠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비슷한 문제다. 영화와 소설은 서로 보완적이며 협조하는 사이이지 기름과 물은 아니다. 더구나 장르에 따라서 영화를 먼저 볼 것인지 책을 먼저 읽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사람도 많다. 결국, 소설을 먼저 읽는 사람들은 자신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영화를 보고, 영화를 먼저 보는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 재미를 반감시키는 것을 원치 않아서이다.


태그:#영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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