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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동료들은 나를 '피덕(피렌체 덕후)'이라고 부른다. 내 돈으로 가 본 5번의 비행기 여행 중 4번이 피렌체였다. 관련된 책도 여러 권 읽고, 경험이 쌓이면서 피렌체의 다양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삐딱하게 본다는 것은 조금 다른 시각으로 더 넓고 깊게 보려는 노력이다. 아마추어 덕후일 뿐이지만, 내가 본 피렌체의 '익숙하지만 낯선 모습'을 풀어보고자 한다. [편집자말]

가끔씩 피렌체의 지배 계급 사이에서 이런 의문이 흘러나왔다. "이방인이나 외국 대사, 자수성가한 부자들같이 피렌체의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우리 마을의 비밀스런 일들'을 인정해도 괜찮을까?"(팀 팍스, 메디치 머니, 황소연옮김, 청림출판, 224쪽)
피렌체에는 여러 아름다운 성당들이 있다. 그리고 파사드(facade,  성당의 정면 외벽)는 대부분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하지만 그 중 특별한 장식 없이 유달리 투박한 외관의 성당이 있다. 바로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인 산 로렌초 성당(Basilica di San Lorenzo)이다.

이 성당 지하에는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의 부흥을 이끌었던 재력가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의 무덤이 있다. 코시모는 황폐화되어 가는 이 성당을 후원하여 되살렸다는 찬사와, 재력으로 공공 교회를 특정 가문의 전용 예배당으로 사유화했다는 비판을 함께 받는다.

파사드에 별다른 장식없이 투박하다
▲ 산로렌초 성당 파사드에 별다른 장식없이 투박하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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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시모는 공공의 이익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리고 귀족이나 권력가들보다는 가난한 대중의 편에 섰다. 막대한 재력으로 도시를 위해 많은 후원을 하면서도 항상 겸손했으며, 절대 대중들 앞에 자신을 과시하거나 드러내지 않았다. 이는 메디치 가문의 가풍이 되어 후손들에게 전해졌다.

자연히 시민들은 코시모의 인품에 찬사를 보냈고, 그의 저택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정부 관리들도 이곳을 찾아와 대소사를 의논했다. 피렌체에 온 외교사절단들 역시 이 저택을 방문해 코시모를 만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심지어 밀라노의 대사는 아예 코시모의 저택에 기거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코시모에게 공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극구거절한다.

여기까지 보면 훌륭한 인품의 재력가가 공공의 선을 위해 헌신하면서도 겸손함을 잃지 않는 모습이다. 하지만,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몇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피렌체의 정치는 공화정이었고, 시민들은 여기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브루니(Leonardo Bruni,1370~1444)는 그의 저서 <피렌체 찬가>에서 공화주의야말로 피렌체의 정신이라며 높이 찬양한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피렌체와 메디치를 검색해보면 '메디치 가의 통치 아래', '피렌체의 통치자로 군림했던' 등과 같은 표현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피렌체 정부는 '시뇨리아(Signoria)'라고 불렸으며 선출직이었다. 그리고 '팔라초 베키오(Palazzo Vecchio)'는 정부 청사였다. 그런데 왜 정부 관리들은 코시모의 저택에서 정책을 논의했을까? 외교사절단은 어째서 그렇게 코시모를 만나길 원했을까? 코시모는 공식적인 직함이 아무것도 없는 '일반 시민'이었는데도 말이다.

아무 직함도 없는 '일반 시민', 그 수상한 행적

현재도 피렌체 시청사로 쓰이고 있다.
▲ 팔라초 베키오 현재도 피렌체 시청사로 쓰이고 있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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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뇨리아는 8명의 최고 위원과 그들의 대표이자 도시의 최고 통치자인 곤팔로니에레로 구성된다. 이들의 임기는 두 달이었으며, 공정한 업무 수행을 위해 임기 동안에는 팔라초 베키오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리고 시뇨리아의 자문기구이며 시뇨리아가 제출하는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가졌던 12인의 시민위원회와 16인의 코뮌위원회 등이 있었는데, 이들 역시 선출직이었다.

당시 피렌체의 선거는 무작위 제비뽑기였다. 하지만 아무나 후보자가 될 수 없었다. 성인 남자 시민들 중 나이, 재산, 가문, 길드 가입 여부, 전과 기록 등을 면밀히 조사해 통과해야만 후보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후보를 추리는 일은 매우 중요했는데, '아코피아토레(accoppiatore, 함께 움직이는 사람들)'라는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주관했다.

이들은 5년 마다 인구조사를 실시해 적합한 후보자를 추려 그 이름을 가죽 주머니에 넣었다. 하지만 후보자가 누구인지는 철저히 비밀이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후보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으며, 주머니에서 이름이 나왔을 때나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선출 방식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원래대로라면 코시모 역시 이런 후보자 중 한 명이 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달랐다. 코시모는 알비치 가문 등 적대 세력의 모함을 받아 피렌체에서 추방된다. 5년 추방령을 받았지만,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시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1년 만인 1434년 피렌체로 돌아온다. 그리고 '오티마티(Ottimati, 피렌체의 신엘리트 계층이자 중산층)'라 불리는 코시모의 지지세력이 선거관리위원회인 아코피아토레를 장악한다.

이들은 가죽 주머니에 코시모를 적극 지지하는 사람들의 이름만 10여 장 들어가게 했다. 자연히 10여 명의 코시모 측근들이 돌아가면서 최고 위원으로 선출된다.

코시모의 뜻대로 움직인 피렌체

당연한 얘기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시민들의 의심과 불만이 커졌다. 그리고 코시모가 선거를 조작한다는 고발이 나오기 시작했다. 코시모의 측근들은 방법을 약간 바꾼다. 가죽 주머니에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이름을 집어 넣었다. 예전과 달리 다양한 사람들의 이름이 뽑히고 시민들은 이제 선거가 공정하게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이름이 뽑혔다고 해서 바로 최고 위원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뽑힌 사람은 다시 최후의 검증을 거쳐야 했다. 실제로 피렌체에 거주하는지, 성실한 납세자인지, 전현직 공직자 중에 가족이나 친지들이 있는지 등을 검증했다. 이를 통과해야 비로소 공직을 맡을 수 있었다.

처음 주머니에서 이름이 뽑힌 사람을 베두토(veduto, '봤다'는 뜻')라고 한다. 그리고 최후의 검증을 모두 통과하고 공직에 선출된 사람은 세두토(seduto, '앉았다'라는 뜻)라고 불렀다.

당시에는 베두토만 되어도 굉장히 큰 영광이었다. 베두토로 뽑혔다는 것은 1차적으로 후보자를 추려내는 엄밀한 자격 기준을 통과했다는 것이고, 이는 훌륭한 시민이라는 증명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최종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더라도 말이다.

코시모 측은 최후 검증을 통과하지 못할 사람들의 이름만 주머니에 넣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후보들은 베두토에 머물렀다. 하지만 후보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이렇게 책임은 질 필요 없이 명예만 누릴 수 있는 베두토가 많이 나오게 된다.

명예를 얻어 기분이 좋아진 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베두토로 뽑아준 시스템의 공정성을 주변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니게 된다. 그리고 그 와중에 코시모의 측근들은 세두토가 되어 정부 요직을 차지했다.

사실 코시모가 곤팔로니에레로 직접 선출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런데 그 시기가 요상하다. 코시모가 추방 당했다가 피렌체로 돌아온 직후, 정적들의 형기를 연장할 때 곤팔로니에레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439년,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이 만나는 역사적인 공의회가 피렌체에서 열릴 때도 그는 곤팔로니에레였다. 모두 정치나 사업적으로 결정적인 시기에만 선출된 것이다. 이 때문에 의심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

피렌체는 코시모의 뜻대로 움직였고, 이제 무슨 일이든 메디치 집안과 친분이 있어야 풀린다는 말이 시민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오고 갔다. 하지만 코시모는 여전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다른 부유층과 달리 말이 아니라 '당나귀를 타고 다니는' 겸손한 시민이었다.

왼쪽 아래, 빨간 모자에 검은 옷을 입은 코시모가 당나귀를 타고 있다. 팔라초 메디치-리카르디
▲ 동방박사의 행렬 왼쪽 아래, 빨간 모자에 검은 옷을 입은 코시모가 당나귀를 타고 있다. 팔라초 메디치-리카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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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시모는 나이가 들면서 고질병인 통풍이 심해져 바깥 출입이 어려워졌다. 그러자 아예 피렌체 정부가 메디치 저택으로 옮겨 오다시피 한다. 모든 정책은 코시모의 집에서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제 정부 공식문서에도 그를 가리켜 '공화국 수장(Capo della Repubilca)'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물론, 이때 역시 코시모는 아무 공직도 없는 일반 시민이었다.
"이런 가짜 민주주의는 치욕이다. 신성해야 할 민주정치가 한편의 희극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팀 팍스, 메디치머니, 황소연 옮김, 청림출판, 237쪽)
무덤까지 이어진 코시모의 '욕망'

코시모는 사후에 피렌체 정부로부터 '파테르 파트리아에(PaterPatriae)', 우리 말로 '국부'라는 칭호를 얻는다. 실제로 코시모는 훌륭한 은행가이자 정치가였으며 예술과 인문학을 부흥시켰고, 피렌체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림자 속에 숨은 독재자이며, 공화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산 로렌초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앞 쪽 중앙 바닥에 화려한 대리석 장식이 있다. 미사 중 성체(예수의 피와 살을 상징하는 포도주와 떡)를 나눠주는 자리이다. 이 대리석 주변으로 금속 장식이 있는데, 자세히 보면 지하로 구멍이 뚫려 있다. 그 밑은 바로 코시모의 무덤이다. (코시모 사후 30년 뒤 분노한 시민들이 메디치 가문을 다시 추방할 때 이 대리석 장식을 뜯어버렸다. 현재의 것은 후에 복원된 것이다)

금속 장식에 뚫린 구멍으로 사제가 전하는 하늘의 말씀과 성가대의 노래 소리가 무덤으로 직접 전달된다. 이를 통해 코시모는 사후의 영원한 안식을 누리길 원했던 것이다. 무덤은 기둥의 형태로 1층과 이어져 있다. 마치 무덤이 성당 전체와 한 몸을 이루며 뻗어있는 모습이다. 이런 무덤 구성은 매우 특별한 것으로, 코시모는 이 무덤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거액의 후원금을 냈다.

코시모가 죽었을 때, 그의 유언에 따라 장례식은 화려한 의식이나 기념비 없이 검소하게 치러졌다. 하지만 그의 특별한 무덤은 생전의 권력에 이어 사후의 구원과 영생까지 움켜쥐고자 했던, 그의 욕망이 성당 전체로 뻗어있는 거대한 기념비로 다가온다.

이 대리석 장식 삼 면에 있는 금속 장식들에는 지하로 바로 통하는 구멍이 뚫려 있다.
▲ 성당 중앙 제단 앞의 대리석 장식 이 대리석 장식 삼 면에 있는 금속 장식들에는 지하로 바로 통하는 구멍이 뚫려 있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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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구멍이 뚫려있고, 여기를 통해 1층 예배당에서 부르는 성가 소리가 무덤으로 직접 내려온다.
▲ 코시모 데 메디치의 무덤 위로 구멍이 뚫려있고, 여기를 통해 1층 예배당에서 부르는 성가 소리가 무덤으로 직접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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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피렌체, #코시모 데 메디치, #산로렌초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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