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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 가까이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며 정착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비정규직, 계약해지, 경력단절 모두 의도하지 않았지만 저의 키워드가 되었습니다. 이제 직장 말고 창작에 다니려 합니다. 매일 방황하는 청춘들에게, 매일 당황하는 직장인들에게 저의 이야기를 전하려 합니다. [편집자말]
나의 부모의 학력은 '국졸'이었다. 가난한 시절이었고, 공부보다는 노동으로 내 몰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가난 속에서 노동 외의 다른 행위들은 모두 사치였고, 그 안에서 국민학교 졸업은 누릴 수 있는 최대치의 통학이었다. 나는 그런 부모 아래 지극히 평범한 삶을 강요받는 자식이었고, 그 삶을 거부했던 딸이었다.

넉넉지 못했던 형편과 짧았던 가방끈, 더 협소했던 생각으로 전문대 이상은 가지 말라고 했던 부모님. 본인이 가난했고 무지했으면 자식은 빚을 내서라도 학비를 마련해 대학교에 보내 줄 법도 한데, 부모님의 머릿속에는 그래도 요즘 시대에 대학은 가야한다고 하니 전문대를 나와, 적당한 회사에 취직해, 평범한 남자를 만나 애 낳고 사는 것. 그것이 인생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그 인생을 따라주길 바랐다. 그래서 나는 흔히 말하는 서울소재 4년제 대학교에 가고도 남을 수능 점수를 받아놓고도 장학금을 받아 전문대에 진학했다. 아빠는 가끔 술을 마실 때면 "내가 그때 너를 4년제를 보냈더라면..." 하고 주정과 후회가 섞인 말들을 내뱉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나의 수순이었다.

2005년 전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 홍보팀 막내 사원으로 입사했다. 부모님과 교수님들은 조기졸업으로 대기업에 입사했다며 모두 나를 대견해 하셨다.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더 긴 가방끈은 욕심으로 비춰질 뿐이었다. 스물두 살. 부모를 포함한 나의 환경은 청춘의 유예보다 사회로의 진입을 등 떠밀었다. 이것 또한 나의 수순이었다.

마음을 고쳐먹고 수순을 받아들였다. 나름 커리어우먼을 꿈꿨고, 첫 직장이라는 의미도 부여했다. 돈도 벌고 싶었고, 일도 잘 해보고 싶었다. 2년 동안 학업대신 직업을 쌓으면 돈도 쌓이고 경력도 쌓일 거라 믿었다. 명동 한복판에 우뚝 선 빌딩 안으로 들어서며 조금 우쭐하기도 했고 그렇게 직장인이 되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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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면 여의도나 시청근처에서 정장을 입고 사원 증을 목에 걸고 다니는 직장인의 얼굴에 내 얼굴이 보였다. 나도 그런 직장인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첫 출근 후 유니폼을 받아 입게 된 순간부터, 내가 생각한 커리어우먼은 전문대 졸 여사원인 나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수식어였음을 알게 되었다. 업무와 처우 모든 것이 딱 그 유니폼만큼 맞춰졌다.

그곳은 각 팀마다 전문대졸 막내 여사원을 두었고, 유니폼을 입혀 구분 지었으며, 복사와 커피 잔심부름과 대졸사원들의 영수증을 처리하는 업무를 시키는 곳이었다. 생각하고 창조하는 업무는 전혀 없었고, 생각 없이 반복하는 업무만이 주어졌다. 나는 그 단순한 업무를 매일 반복했는데, 이상하게 생각이 많아졌다.

점심시간이 되면 정장을 입은 대졸사원들은 명동 한복판에 맛집을 찾아다녔고, 유니폼을 입은 전문대졸 여사원들은 도시락을 들고 회사 휴게실로 모여들었다. 각 팀의 막내 여사원들은 각 직급의 대졸 사원들이 모두 나간 후에 밥을 먹었고, 다 들어오기 전에 자리에 복귀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은 아니었을 텐데 스스로에서부터 분위기까지 모든 것들이 그렇게 구분 짓게 만들었다.

그 구분은 업무뿐만 아니라 옷에서부터 먹는 것까지 세밀하고 다양했다. 2년의 학벌 차이 치고는 너무나 크고 극명한 차별이라 느꼈다. 나는 순응하는 전문대졸 여사원들 속에 적응하지 못하는 여사원이었다. 복사를 하고 커피를 탈 때마다 '나는 이 이상의 일들도 잘 할 수 있는데'를 되뇌었다.

그 되뇌임이 쌓여갈 때 쯤 어느 날 나에게 홍보부장이 처리하라며 영수증 하나를 건넸다. 전날 과음을 하고 술이 덜 깨 느즈막히 출근해 졸다가 해장국을 먹으러 나가며 내밀었던 영수증. 아직도 그 종이 한 장이 선명하다. 거기에는 230만 원 정도의 금액과 단란주점 상호가 적혀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국졸'인 나의 아빠는 매일 첫차를 타고 출근해 힘겹게 노동으로 벌어내는 월급을, '대졸'인 나의 직장 상사는 접대비라는 명목 하에 하루 술값으로 쓰는구나. 그것도 회사 돈으로.

누군가의 힘겨운 월급이, 누군가의 가벼운 일급이 되는 사회. 내가 인지한 첫 사회였다. 물론 나의 학벌과 상사들의 학벌, 사회 초년생과 노련한 경력자의 위치를 동일시 생각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다만 그 2년이라는 학벌의 차이를 업무와 능력으로 평가받고 좁힐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첫 출근을 하고 유니폼을 입고 복사를 하고 커피를 타고 지출결의를 했던 업무가 전부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출발 위치는 조금씩 달라도 각자의 속도와 노력에 따라 결승점 통과 순서가 결정되는 마라톤. 직장에서는 불가능한 경기일까? 경력과 능력이 학력을 추월할 수 있는 드라마는 경기 위반일까?

모든 전문대 졸 여사원들의 회사생활이 이렇지는 않을 것이고, 모든 4년대 졸 직장 상사들의 영수증이 그렇지는 않을 테지만, 구분과 한계는 많은 직장 안에서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나는 결국 3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편입공부를 시작해 다시 대학생이 되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 '대학교생'이 되었다. 그리고는 대졸 사원이 되었고, 복사도 하고 커피도 타고 잔심부름도 했지만, 내 업무를 맡게 되었고 능동적인 일들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원래 나의 수순은 아니었지만, 결국 나의 차례가 될 순서였다. 조금 돌아갔지만, 첫 직장생활이 만들어준 여분의 학벌이었다고 생각한다.

국졸인 부모와 대졸인 나에게는 30년이 넘는 세월과 시대의 간격이 있는데, 돈 때문에 학업이 밀리고 학벌 때문에 간극이 극명해 지는 환경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고졸, 전문대졸, 대학교졸,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결과는 나의 노동과 노력, 능력과 경력으로 만들어지는 구조와 고졸 출신 부장과 대졸 출신 사원이 함께 맛집을 찾아다니며 점심을 먹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 사무실 정수기 위에는 '커피는 셀프'라는 종이가 붙어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태그:#직장,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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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면 삶의 면역력이 생긴다고 믿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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