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양심적 병역거부로 실형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2006년 8월 18일 인천 구치소에 구속되었습니다. 이후 군산교도소로 이감을 갔고, 구속 직전 집회 때 연행된 사건이 정식 재판을 하게 되어 다시 수원구치소로 이감을 갔습니다. 재판이 끝나고는 청주교도소로 이감을 갔고, 2007년 10월 26일 교정의 날 때 가석방으로 출소했습니다.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보고 그 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 기자말

<슬기로운 감빵 생활>의 한 장면
 <슬기로운 감빵 생활>의 한 장면
ⓒ TvN

관련사진보기


병역거부자들이 신났다. 한국정부에 병역거부권을 인정하라고 권고한 유엔 덕분도 아니고, 대통령과 인권위원장이 나서서 대체복무 필요성을 언급해서도 아니고, 보름이 멀다하고 들리는 병역거부 무죄판결 소식 덕분도 아니다.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 생활> 덕분이다.

병역거부자들은 모이면 다들 자신의 감빵 생활 이야기를 해댔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은 군사주의 비판하면서 병역거부 해놓고, 남자들이 군대 가서 축구한 이야기 하듯이 감빵 생활을 이야기 한다고 지청구를 줬다. 듣는 이들의 지겨움과 지루함을 모르는 바 아니나 감옥 시절에 대해 스스로 건네는 위로라고 핑계를 대고는 했다.

그런데 요새는 어딜 가서 감옥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지겨워하기는커녕 관심을 기울인다. 드라마 덕분에 '알고 보니 쓸 데 있는' 슬기로운 감빵 생활이 되었다.

채식주의자의 감옥 생활

지금은 어디 가서 채식주의자라고 하기도 민망하지만, 10년 전 병역거부로 감옥 생활 할 당시에는 아주 철저한 비육식주의자로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를 절대 먹지 않았다. 때문에 감옥에선 먹을 게 많지 않았다. 돈가스나 닭감자볶음이 나오면 옆 사람에게 양보했고, 대신 두부조림이나 청국장이 나오면 소지(교정 시설 내 일을 돌보는 사람)에게 부탁해 조금 더 챙겨두곤 했다. 철저하게 지켜가는 와중에 딱 두 차례 감옥에서 고기를 먹은 일이 있었다.

수감자들은 김제혁 선수가 목공 공장이나 원예반에서 일하는 것처럼 감옥 안에서 기본적으로 일을 해야 한다. 그 중 가장 힘들고 그래서 수감자들이 꺼리는 일은 취사장이다. 일 자체가 힘들기도 하고, 사흘에 한 번씩은 아침 식사를 만들어야 해서 오전 4시에 일어나야하기 때문이다.

군산교도소 같은 경우는 신입 수감자들의 출역을 취사장에서 시작하게 했다. 거기서 어느 정도 고생을 한 뒤에 좀 편안한 곳으로 보내줬다. 나 또한 군산교도소로 이감 갔을 때 취사장에서 출역을 시작했다. 솜이불이나 유단포 같은 금지 품목들로 월동준비 하느라 바쁜 11월, 하필이면 취사장의 1년 중 가장 힘들다는 김장철이었다.

당시 1300여 명이 다음 해 봄까지 먹을 김치를 담가야 했는데, 하루는 2톤 트럭에 산처럼 쌓인 배추가 들어와 그것을 하차한 뒤 염장을 하면서 양념을 만들었다. 다음 날은 염장한 배추를 물에 씻어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뒤 양념에 비벼 포대에 넣어 냉장창고에 보관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이틀씩 짝으로 일주일에 세 번, 4주 동안 주구장창 김장을 했다.

편지는 감옥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된다. 날마다 편지 도착하는 시간을 기다리며, 저녁 때는 편지에 답장을 쓰며 지루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사진은 평화수감자의 날(12월 1일)에 즈음해서 받은 엽서들.
 편지는 감옥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된다. 날마다 편지 도착하는 시간을 기다리며, 저녁 때는 편지에 답장을 쓰며 지루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사진은 평화수감자의 날(12월 1일)에 즈음해서 받은 엽서들.
ⓒ 이용석

관련사진보기


정신없이 바빠서 힘든지도 모르는 날들이었다. 어느 날인가는 너무 바빠서 정신없이 일하다가 잠깐 짬이 나서 첫 양치를 하는데 시계를 보니 낮 2시였다. 나는 밤마다 방에 돌아오면 그제서야 퉁퉁 부은 손가락을 보며 열심히 주물러 겨우 편지를 쓸 수 있었다. 김장 때 무엇보다 힘든 일은 62.5킬로그램씩 정확하게 담은 김장 포대를 냉장창고까지 짊어지고 나르는 일이었다.

당시 나는 키 169센티미터에 몸무게 60킬로그램으로, 성인 남자치고는 체격이 작은 데다가 힘쓰는 요령마저 없었다. 62.5킬로그램짜리 포대를 어찌어찌 어깨에 이기는 했지만, 한 발짝 앞으로 옮길 때마다 마치 양쪽 발목에 1톤짜리 모래주머니를 찬 사람 마냥 걸음걸이가 무거웠다.

결국 취사장 반장은 "야 쟤는 그냥 청소나 시켜"라며 역정을 냈고,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모멸감을 삼키며 괜찮다고 할 수 있다고 덤볐다. 하지만 반장은 요지부동이었고, 괜히 김장 포대 떨어뜨리면 일만 더 생긴다고 단칼에 정리했다.

요령을 피웠을 법도 한데 악착같이 달려들었던 이유는 내가 힘을 못쓰는 것이 마치 고기를 안 먹어서 그렇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취사장 사람들은 정말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며 고기 안 먹으면 취사장 일은 못 버틴다고 끊임없이 고기를 권했다. 아마 고기를 먹더라도 버티기 힘들었을 테지만, 나는 몸으로 증명해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내 생에 가장 맛있던 돼지수육

한 번은 취사장에만 특별히 돼지 수육이 지급됐다. 김장하느라 고생했다고 위에서 내려온 고기였다. 커다란 들통에 양파며 대파, 생강, 커피 가루 등을 넣고 푹 삶은 고기는 눈으로만 봐도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은 한 번만 먹으라고 성화였지만, 사람들 앞에서 한 번 고기를 먹기 시작하면 앞으로도 계속 먹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아는 나는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꾹 담은 입술에서 사람들은 굳은 다짐을 봤겠지만, 실은 침샘을 꾹 누르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김장을 마치고 정리를 하던 중 몇몇 재료를 보관하려고 냉장창고에 들어갔다. 재료를 제자리에 두고 나오는데, 김장 하고 남은 배추로 담은 겉절이와 어제 먹다 남은 돼지 수육이 눈앞에 떡하니 보이는 것이다. 수육은 내가 좋아하는 비계가 많은 부위였지만 냉장창고 안에 있다 보니 비계가 허옇게 굳어 있었다.

내 머리는 가석방 날짜 계산할 때보다 분주하게 돌아갔다. '누가 냉장창고에 들어올 가능성은 없을까? 고기 한 점과 김치 한 조각을 먹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먹고도 안 먹은 척 해도 내 양심에 추호도 부끄러움이 없을까?' 단언컨대 하얗게 굳은 비계가 맛이 없을까봐 하는 걱정은 잠시도 안 했다.

생각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내 손은 이미 돼지 수육 한 점과 김치 한 조각을 집어서 입으로 가고 있었다. 이미 저지른 일, 최대한 빨리 끝내고 티 안 나게 나가는 것으로 목표가 수정되었다. 하얗게 굳은 비계는 설컹했고 살코기는 퍽퍽했지만, 이내 침과 섞이면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아, 내 인생에 먹은 어떤 보쌈보다도 더 달콤했고 부드러웠다. 나는 아주 치밀하게 입술을 닦고 잇몸에 고춧가루가 끼지는 않았는지 체크했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냉장창고를 걸어 나왔다.

하지만 따뜻한 훈제닭은

김장철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보안과 소지로 출역장을 옮겼다. 교도관들이 쓰는 사무실을 청소하고 직원이발소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게 주 업무였는데, 취사장과 비교하자면 풍찬노숙을 하다가 호텔에서 자는 기분이랄까. 무엇보다 날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세탁기로 빨래를 할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았다.

여기서 일 하며 책 읽다가 출소하면 되겠다고, 역시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만족해했다. 단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주일 만에 나는 다시 보따리를 싸야했다. 구속 직전에 평택 경찰서 앞에서 항의집회 하다가 연행됐는데 그 사건이 정식 재판이 열리게 되어 재판부가 있는 수원구치소로 이감 가게 된 것이다.

보안과 소지방에서 미징역방(출역을 안 하는 사람들이 모인 방)으로 옮겼다. 그 방은 건달 하나가 방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방이었다. 나는 다음 날이면 이감 갈 처지라 방사람들과 딱히 관계를 쌓지 않으려 했다. 저녁 시간, 방사람 중 하나가 특식을 준비했다. 훈제닭을 뜨거운 물로 익히고 잘게 찢어 갖은 양념을 했다. 방장 노릇을 하는 건달이 내게 선심성으로 훈제닭을 권했지만 나는 자동반사적으로 사양했다. 순간 그 건달의 표정이 안 좋아지고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고요 끝에 특식을 만든 아저씨가 내게 훈제닭을 재차 권했고, 나는 하루 머무는 방에서 채식으로 다투기 싫어서 그냥 한 점만 받아먹고는 그만 탈이 나서 고생했다. 취사장 냉장창고 안 차갑게 식은 고기는 세상 둘도 없이 맛있었는데, 따뜻하게 조리한 고기를 먹고 탈이 난 것이다. 원효대사처럼 해골물 먹고도 맛있을 자신은 없지만, 제 아무리 고든 램지가 만든 음식이라도 불편하게 먹으면 탈이 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출소하는 날 마중 나온 친구들이 찍은 사진. 버스에서 막 내리고 있는 게 나다.
 출소하는 날 마중 나온 친구들이 찍은 사진. 버스에서 막 내리고 있는 게 나다.
ⓒ 이용석

관련사진보기


재판 때문에 새롭게 이감 간 수원구치소는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시설도 낙후되었고, 교도행정은 더더욱 엉망이었다. 일반 수감자들한테는 <슬기로운 감빵 생활>의 나 과장처럼 원칙만을 내세웠지만 그 지역 건달들한테는 김제혁 선수 대하는 교도소장처럼 한없이 너그러웠다.

음식도 끔찍했다. 설탕만 듬뿍 넣어도 대충 맛이 났을 떡볶이는 짠 맛 밖에 안 났고, 보리쌀밥은 무슨 현미밥마냥 밥알이 따로 놀았다. 컵라면으로도 입맛이 살지 않는 날, 나는 군산교도소 냉장창고에서 몰래 먹은 돼지 수육을 떠올리곤 했다.



태그:#슬기로운 감빵생활, #양심적 병역거부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병역거부를 하면서 평화를 알게 되고, 평화주의자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출판노동자를 거쳐 다시 평화운동 단체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