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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시절 '연예인 블랙리스트'를 처음 공개적으로 거론했던 방송인 김미화는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10여 년을 제가 서고 싶은 무대에 서지 못했다"고 말했다. 문화예술인을 비롯한 작가, 교수 등 많은 이들이 10여 년이란 긴 시간 동안 블랙리스트 때문에 고통 받았다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10년은 고사하고 장장 2000여 년 동안 블랙리스트 명단에 오른 사람이 있다. 한때는 공자와 쌍벽을 이루었지만, 권력과 차별적 사회질서에 대항한 탓에 2000년이란 오랜 기간 금기가 되었던 사상가. 그는 바로 묵자이다.

<묵자가 필요한 시간> 표지
 <묵자가 필요한 시간> 표지
ⓒ 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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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는 '세상의 유명한 학문은 유가와 묵가'라고 했고, 묵자와 대척점에서 날카로운 비판을 했던 맹자마저도 '묵가는 정수리부터 발꿈치까지 모두 닳아 없어진다 해도 천하를 이롭게 한다면 기꺼이 한다'고 평가했던 사람.

그러나 오랜 세월 금기가 되면서 각종 기록들이 소멸되고 사라져 이제는 묵자의 진짜 이름조차 정확히 모른다. 통설은 성이 묵이고 이름은 적, 묵적이라고 하나, 사학계 일각에서는 묵자의 성이 결코 묵이 아니라는 목소리가 줄곧 대두되었다. 도대체 어떤 사상을 갖고 있었길래 2000년 동안이나 이토록 철저히 금기시되었던 것일까?

전기 작가로 유명한 중국의 천웨이런이 동서양의 '문사철(文史哲)' 고전과 명언을 비롯해 각종 신화와 전설, 속담, 소설, 산문, 연극, 영화와 대중가요를 망라해 역사의 바닷가에서 잃어버린 묵자의 흔적을 찾아 나섰고, 그가 역사의 바다에서 인양한 묵자의 흔적이 <묵자가 필요한 시간>(378 펴냄)에 담겨 있다.

"인류가 강권에 반항하는 역사는 곧 망각한 반항을 기억하는 역사이다"라는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기득권층은 하층에서 외치는 투사의 목소리를 결코 매몰시킬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제 역사 속 깊은 곳에 매몰돼 있던 2000년 전 묵자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금수?

'다~ 모두 다 사랑하리~'란 노래가사처럼 묵자 사상의 핵심 중의 핵심을 말하자면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라는 겸애 사상이다. 부모 형제라고 더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길 지나는 사람도 내 부모 형제와 똑같이 사랑으로 대하라는 것이 바로 겸애이다. 

나는 장차 천하의 이로움을 일으키는 방법으로 겸애를 시행할 것이다. 그래서 눈 밝고 귀 밝은 사람이 서로 감응하여 보고 들으며, 팔다리가 모두 튼튼한 자가 서로 협력해 일할 수 있으며, 도를 체득한 사람이 서로 일깨우고 가르칠 것이다. 그리하여 늙어서 처자가 없는 자도 부양을 받아 그 수명을 다할 수 있고, 어려서 고아가 돼 부모 없는 자도 의지할 데가 생겨 그 몸을 키울 수 있다. 이것이 지금 겸애를 가지고 정치해야 하는 이유이다. (본문 137쪽)


공자의 사랑인 인애(仁愛)는 친친(親親), 즉 혈육처럼 나와 가까운 이부터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차별적 사랑에 중점을 둔 데 반해 묵자의 겸애는 차별을 두지 않고 모든 타인을 자신의 친인과 똑같이 대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차별 없이 평등한 묵자의 겸애사상에 대해 맹자는 부모도 없고 임금도 없다며 '무부무군(無父無君)하여 금수나 다름없다'고 공격하였다. 어떻게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과 부모를 똑같이 사랑할 수 있느냐며 말도 안 된다고 여긴 것이다.

그런데 맹자가 이렇게 핏대를 올리며 '금수'라는 우아하지 못한 말을 뱉었다는 것은 바로 묵자의 겸애 학설이 등급 질서가 엄밀한 인애를 비판하면서 유가의 아픈 곳을 찔렀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나를 사랑하듯이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면 효의 대상인 부모는 당연히 그 가운데 포함되고, 내가 길거리 사람을 내 부모처럼 사랑하면 길거리 사람도 내 부모를 그렇게 사랑할 것이므로 이렇게 하면 타인에게 베푸는 사랑이 사회 속에서 선순환 기제로 작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묵자는 이처럼 차별 없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평등사상의 실현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과 똑같지 않는가. 그래서 변법자강운동으로 널리 알려진 청나라 말기의 사상가 량치차오는 묵자를 일컬어 '큰 마르크스이자, 작은 예수'라고 평가하였다.

일하지 않으면서 열매만 얻으려고?!

암호화폐 광풍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2016년 11월 80만 원대이던 비트코인 가격이 2018년 1월인 지금은 1900만원이 넘는다고 하고, 미국에서 1500만원인 비트코인이 한국에서는 2100만원까지 한다고 하며, 정부의 거래소 폐쇄 검토가 알려진 뒤에는 몇 시간 만에 시가총액 100조 원이 증발했다고도 한다. 어린 10대들마저도 이 광풍에 동참하고 있다니 다들 보이지도 않는 돈 때문에 혈안이 된 듯하다.

사람은 본디 금수, 고라니, 사슴, 나는 새, 곤충과 다르다. 그런 것들은 깃털에 의존해 옷이나 가죽으로 삼고, 발굽이나 발톱에 의존해 바지와 신발로 삼으며, 물과 풀에 의존해 마실 것과 먹을 것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수컷이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채소와 나무를 심지 않으며, 암컷이 실을 뽑고 베를 짜지 않아도 입고 먹는 재물이 원래부터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사람은 이와 다르다. 그 힘(노동)에 의지해야 살 수 있고, 그 힘에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본문 203쪽)
묵자는 '묵자' '비악상'에서 사람과 동물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를 노동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여부로 판단했다. 묵자의 관점이 "노동이 사람을 창조한다"는 마르크스의 관점과 약속이나 한 듯이 일치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또한 묵자는 "노동을 하지 않고 열매를 얻는 것은 자기 소유가 아닌데 취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며 이를 "위에서 알게 되면 처벌하고 대중이 듣게 되면 비난하는 것"이라고 불로소득에 대해 비판하였다. 즉 정당한 노동 없이 얻는 것은 도둑질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파동 당시 튤립 구근 하나에 현재 우리 돈으로 약 1억6000만 원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어처구니없지만 당시 사람들은 집 팔고 땅 팔아서 튜립 구근을 샀다는 것이다. 결국 거품이 터지면서 집 팔고 땅 팔아 튤립에 투자했던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쓴 독일의 희곡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우리는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만 배운다"라는 말을 했다. 암호화폐 거래소 폐지 반대를 위해 청와대 청원이 16일 기준 20만건이 넘었다고 한다. 브레히트의 말처럼 우리는 정말 역사에서 아무것 배우지 못한다는 것만 배운 것일까?

자본주의가 양산한 끊임없는 다툼과 경쟁, 약자에 대한 불평등에 내몰리는 현실에서 묵자의 사상은 우리에게 '어떻게 인간다움을 지켜갈 수 있는가'에 대한 빛나는 성찰을 안겨준다고 천웨이런은 말한다. 지금이야말로 차별 없는 사랑과 평등, 평화를 외치며 지극히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추구했던 묵자가 정말로 필요한 시간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묵자가 필요한 시간>, 천웨이런 지음, 윤무학 옮김, 378 펴냄, 2018년 1월, 528쪽



묵자가 필요한 시간 - 2000년간 권력이 금지한 선구적 사상가

천웨이런 지음, 윤무학 옮김, 378(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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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묵자가 필요한 시간, #천웨이런, #묵자, #묵가, #비트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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