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영화 ‘1987’이 전국에서 상영되고 있는 가운데, 서산에서는 시민들이 단체관람 시간을 가졌다.

전국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영화 ‘1987’이 전국에서 상영되고 있는 가운데, 서산에서는 시민들이 단체관람 시간을 가졌다. ⓒ 신영근


"뭐라도 해야죠."

한열이 철제 캐비닛에서 시커먼 천을 꺼냈다. 동아리방 텔레비전에서는 "현행 헌법대로 대통령을 선출해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전두환 대통령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얼마 후, 그 검은 천에는 흰 글씨가 쓰였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한열의 대사는 부당한 권력을 두고 절망에 휩싸이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온 힘을 다해 완강히 저항하겠다는 다짐이었다. 비탈진 길을 올라 슈퍼를 찾아온 한열. 연희에게 속내를 털어놨다. 나도 두렵고 무섭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다치는 것을 차마 보고 있을 수는 없다고.

영화 <1987>은 청년의 이야기다. 2018년의 청춘은 1987년 대학생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30년 전 청년에게 지금 젊은이들은 무슨 말을 건넬까.

기자는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명륜4가 카페 '어반테이블37.2'에서 20대 청년들 5명을 만났다. 이번 집담회에는 국민대 정치외교학과와 사회학과에 다니는 강은빈(22)씨와 곽서린(22)씨, 같은 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인 고동완(25)씨, 성균관대 사학과 학생 문정식(23)씨, 같은 대학에서 사학과 석사과정을 밟는 박영훈(25)씨가 참석했다. 이들은 2시간 동안 영화 <1987>의 장면, 인물 등 이모저모를 톺아봤다.

대학생들은 1987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에 생각을 같이 했다.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 또한 1980년대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시대의 책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공통된 목소리다. 국가 단위를 뛰어넘어, 내가 살아가는 조직에서도 변화를 꾀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일상의 부조리를 씻고, 민주주의의 뿌리를 단단히 내리는 것, 그것이 과제다. 아래는 이날  인터뷰 내용을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20대 청년들이 꼽은 <1987> 최고의 명장면

 영화 <1987>을 관람한 20대 청년들 5명이 밝힌 한 줄 감상평. 이들은 지난 11일 서울 대학로 카페 '어반테이블37.2'에서 영화 <1987>의 장면, 인물, 오늘날 한국 사회에 주는 의미 등에 대해 토론했다.

영화 <1987>을 관람한 20대 청년들 5명이 밝힌 한 줄 감상평. 이들은 지난 11일 서울 대학로 카페 '어반테이블37.2'에서 영화 <1987>의 장면, 인물, 오늘날 한국 사회에 주는 의미 등에 대해 토론했다. ⓒ 박동우



- 각자 꼽은 영화 <1987> 속 최고의 명장면 '1분'은 무엇인가.

박영훈(아래 영훈) : "연희가 버스로 올라가 '호헌 철폐, 독재 타도' 함성이 울려퍼지는 시청 광장을 바라보던 장면이 최고였다. 보통 사람들은 6월 항쟁의 절정을 넥타이 부대가 거리로 뛰쳐나오는 상황으로 생각했을 텐데, 이 영화는 6월 항쟁의 서막에서 끝맺음으로써 감정과 장면을 절제했다. 덕분에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상상하고, 경험한 이들은 다시 생생한 기억을 떠올렸다."

강은빈(아래 은빈) : "<동아일보> 사회부장이 칠판에 적힌 보도지침을 지우면서 '경찰이 고문해서 대학생이 죽었는데 보도지침이 대수냐'며 '앞뒤 재지 말고 들이박으라'고 소리치던 장면이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다. 실제로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보도지침을 어기는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런 이가 되려면 청년 시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들이 스쳤다."

고동완(아래 동완) : "<동아일보> 사회부장이 '사람이 죽었는데 보도지침이 대수냐'며 '들이받으라'는 식으로 얘기한 것 같다. 사실 기자 세계가 음흉한 면이 있다. 사람이 죽어도 특종이라는 생각을 내심 가지면서 접근하는데, <동아일보> 사회부장은 마치 본성처럼, 사람이 죽었는데 왜 보도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런 생각 없이 돌진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 직업윤리를 볼 수 있는, 상당히 드문 경험이다. 우리 언론은 반성할 대목이 많다. 예컨대 세월호 침몰 당시 숱한 매체가 오보를 냈으나, 공식 사과하는 언론은 드물었다. 언론의 자기반성이 없는 상황에서 <1987>이 보여준 언론의 모습은 말 그대로 마땅히 자기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지점에서 감동을 이끌어냈다고 본다."

곽서린(아래 서린) : "박종철 열사 유족이 화장장을 빠져 나오자, 도열한 전경들이 방패를 들어올려 기자들의 카메라 촬영을 막는 장면에서 화가 났다. 경찰이 아들 영정을 든 아비의 머리채를 잡고 강제로 차에 밀어넣더라. 자기 자식이 죽었는데, 나라가 가족더러 아무 것도 못하게 막는 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이잖나."

문정식(아래 정식) : "학과 친구와 함께 영화를 봤다. 그 친구는 박종철 열사를 물고문하던 장면에서 소름이 돋는다고 말했다. 박종철 열사의 다리를 붙잡고 있던 말단 경관(강진규 경사)이 애국가를 부른다. 영화 말미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을 때, 다시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잘못 쓰이던 애국가가 비로소 바로 불리는 것을 보면서 감정이 북받쳤단다."

- 명동 미도파백화점 기습 시위 장면에서 배우 강동원(고 이한열 열사 역)이 복면을 내리자, 일순간 스크린 너머 객석이 술렁거렸다.
은빈 : "나도 영화 보는데 배우 강동원이 등장하는 순간, 주변에서 '오!' 감탄사가 들리더라. 사실 얼굴이 잘 생겼다고 해서 운동권은 아니라고 단정지을 이유는 없다. 그것도 우리의 편견이라고 생각한다. 이한열 열사와 연희의 관계를 풀어나갈 때도 로맨스적 요소를 최대한 자제하려 한 흔적이 돋보였다. 연희가 길을 가다가 잘 생긴 선배에게 예쁜 모습 보이려 하는 것, 어느 시절이건 청춘들이라면 충분히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영훈 :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슈퍼스타'의 느낌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제대로 살렸더라."

동완 : "배우 강동원이 첫 등장한 씬엔 감독의 의도가 깃들지 않았을까. 감정을 극도로 끌어올려 당시 시대 상황을 최대한 각인시키기 위한 방편 중 하나였을 거라고 본다."

"6월 항쟁 열쇳말 적절히 버무려... 훌륭한 작품"

 영화 <1987>의 스틸컷.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대공수사단장이었던 실존 인물 박처원 역할을 맡은 김윤석은 놀라운 연기로 극 전체를 탄탄하게 받친다.

영화 <1987>의 스틸컷. ⓒ CJ엔터테인먼트


- 대공수사처 박 처장은 영화를 이끄는 주축이다. 박 처장이 안타고니스트(적대 인물)로 활약하고, 그와 대척점에 선 많은 인물들이 모이고 부딪치고 흩어지면서 영화가 전개되던데.
정식 : "박 처장은 스스로를 '애국자'라고 믿고 있다. 고문에 가담한 경관들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한 건 '대통령 각하'였지만 박 처장은 이에 아랑곳않고 신길동 대공분실을 습격한다. 박 처장의 애국은 각하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빨갱이'를 때려잡는 일이었다."

영훈 : "그가 '지옥이 뭔디 아네?'라고 대사를 읊던 장면이 기억에 선하다. 해방정국 시절 이북 사람들이 내려와 대동청년단, 서북청년단에 가담해 나쁜 짓을 하던 동기가 대체로 박 처장과 비슷하다. 가족이 공산주의 세력의 손에 죽었고, 이성이 끼어들 틈 없이 '공산당이면 무조건 때려죽여야 된다'는 생각을 가진 인물의 전형이 박 처장이다. 비록 박 처장의 행위를 용인할 수는 없지만, 그 동기 자체는 정말 악인이라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잖나.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박 처장을 이리 만들었다."

동완 : "우리가 살아가는 상황이 과거보다 진보하지 못한 채 머물러 있다면, 후대에도 똑같은 일이 빚어질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박 처장은 현 상황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는 역할이다. 한편으론 끝까지 인식을 완고하게 유지하는 모습에서,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몸소 새겨주는 인물이다."

서린 : "박 처장도 가족이 살해당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그 아픔을 사회를 개혁하는 방향으로 가져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 지난 여름 개봉한 영화 <택시운전사>(2016)는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다뤘다. 두 영화 모두 80년대 정치적 격변을 그린다. <1987>과 <택시운전사>를 비교하자면.
동완 : "<택시운전사>는 내부자(광주시민)와 외부자(김만섭, 독일기자 피터)의 시각만 드러난다. 반면 <1987>은 검찰, 경찰, 청와대, 언론, 민중 등 사건 관계자 각각의 시각을 다채롭게 드러내고 유기적으로 조합하면서 짜임새 있게 만들었다."

정식 : "단연 <1987>이 주는 임팩트가 더 컸다. 영화의 상영시간을 감안할 때 이한열 열사 사건이 제대로 다뤄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박종철 사건과 이한열 사건이 기폭제가 돼 6월항쟁을 추동했다고 학교에서 배웠다. 비록 이한열 열사와 관련된 장면 상당수가 허구를 곁들였지만, 어쨌든 영화는 보여줬다. 그렇게 살았을 것이라고. 치우침 없이, 6월 항쟁의 두 가지 열쇳말을 적절히 버무린 점에서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영훈 : "<1987>은 영화 곳곳에 뿌려놨던 '떡밥'을 모두 회수했다. <택시운전사>는 편집 측면에서 다소 아쉽더라. 광주를 빠져나온 만섭이 장터에서 딸이 신을 분홍색 구두를 샀다. 자식을 향한 애틋한 감정이 투영된 대상일 게다. 딸에게 언제 주려나 하고 계속 지켜봤다. 끝내 신발을 줬는지 드러나지 않았다. 사소한 대목이지만 자꾸 마음에 걸리더라. (좌중 웃음)"

- <1987>에는 민중가요 '그날이 오면'과, 가수 고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 노래가 쓰였더라. 왜 하필 이 곡이었을까.
은빈 : "운동권 학생들만 아는 민중가요를 집중적으로 틀어놨으면 그 당시 진득하게 투쟁했던 이들만 기억을 회상했을 거다. 일상에서 <선데이서울> 읽고, TV 보며 깔깔거리던 청년, 대학생들이 나이 들어서 <1987>을 봤을 때 자기가 듣던 대중가요, '가리워진 길'이 이런 맥락에서 흐르는 것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자신이 시대와 괴리돼 있었던 것을 많이 느꼈을 것 같다."

정식 : "6월 항쟁은 원래 투쟁하던 운동권 사람들 뿐만 아니라, 직업·계층을 불문하고 모든 대중이 참여한 운동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대중가요가 활용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완 : "합창단이 '그날이 오면'을 불렀다. 합창을 들으니 연대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심금을 울리더라. 다만 감정을 힘껏 고양시키는 게 아니라, 일정한 선을 지키면서 노래가 흐른다. 감정 뿐만 아니라 차가운 이성을 지니고 앞으로 연대하자는 의미를 담은 것이리라 생각했다."

"나이 들수록 사회와 소통하려는 자세가 필요"

 영화 < 1987> 속 한 장면.

영화 < 1987> 속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 중장년 관객들의 호응이 엄청나다. 이들을 만나면 한결같이 당시 민주화를 이룬 공을 자찬한다. 하지만 일각에선 586세대를 겨냥해 학력 차별, 주거난 등 오늘날 청년들이 겪는 어려운 현실을 낳은 장본인들 아니냐고 지적하는데.
동완 : "다층적으로 보면 586세대를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건 어렵지 않을까. 시대적 문제를 한 세대만의 책임으로 귀결하는 것은 냉소주의를 낳을 우려가 있다고 본다. 다만 민주화 이후의 시대적 변화와 맞물려 586세대에 제기된 문제를 자기반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영훈 : "4·19혁명 세대도 80년대 운동권으로부터 이와 똑같이 비판을 받았다. 혁명에 열심히 뛰어들었던 이들이 나중엔 유신헌법에 찬성하고,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숨고, 심지어는 동화하고 협력하는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586세대 역시 나이가 들어 보수화되는 경향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세대가 중장년 세대를 보면서 '나는 그렇게 되지 말자'고 경계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은빈 : "옛날에는 여성에 대해 아무도 문제 제기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여성 의제까지 사회적 논의가 확장됐다. 그러자 일부 어른들은 '우리 때는 그런 것 신경도 안 썼는데, 요즘 애들은 너무 민감하다'거나 '전통을 무시한다'고 손가락질하더라. 요즘에는 어떤 것들이 문제로 떠오르는지 겸손한 자세로 귀를 열고 사회와 계속 소통하려는 자세가 필요해 보인다. 나이가 들수록."

- 영화 <1987>이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에게 주는 의미는?
서린 : "6월항쟁이 그렇듯이, 촛불 항쟁도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다. 그 이전에 이화여대 학생들의 학사 개편 반대 투쟁이 있었고, 노동자들의 회사 구조조정 반대 파업 등 여러 가지 투쟁들이 있었다. 2016년 겨울 매주 토요일 광화문광장에는 촛불을 든 시민이 있었지만, 해고 복직 투쟁을 하는 노동자들도 홍보 부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10년 가까이 투쟁을 이어가는 노동자들이 허다했다. 정권은 무너졌지만 투쟁하는 사람들의 삶은 아직 달라지지 못했다. 이들의 투쟁도 잊지 말아 달라."

은빈 : "박종철 열사 시신을 처음 검안한 중앙대 용산병원 내과 의사 오연상씨가 기자들 앞에서 진실을 말하려 하자, 대공수사처 소속 형사가 품 안에 감춘 총을 보이더라. 생사와 밥줄이 걸린 일을 두고 협박하는 권력을 상징하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문제라고 생각하는 감수성을 간직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는 점을 느낀다."

동완 : "2016년 촛불집회의 원동력으로 언론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 <한겨레>, JTBC 등 여러 언론에서 발굴한 특종이 토대를 이뤄 사회 변혁의 힘을 추동했기 때문이다. 언론뿐만 아니라 경찰, 검찰 등 제도권 모든 부문을 포괄해 함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국가적 변화'라고 생각한다. 1987년 당시 어느 조직 하나가 폐쇄적인 행태를 보였다면, 박종철 사건이 영영 은폐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정인, 특정 계층만 달라져선 안 된다. 모든 조직과 체계가 전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영훈 :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느냐'는 물음은 지금도 존재한다. 1987년과 달리 2018년 운동권은 대중의 외면을 받고 있다. 대학가만 보더라도 운동권 총학생회가 있는 학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과거에는 독재정권, 이른바 '적'이 명확했던 시절이라 운동권의 필요성이 부각됐다. 민주화 되고 나서 명확한 적이 없어진 이 시기, 1980년대 기억을 재생해 현 세태에서의 그 필요성을 부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식 : "나라가 변하는 상황에서 우리들도 자신이 속한 집단을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요즘 '적폐'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우리가 속해 있는 소속집단에서도 적폐가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학과 행사를 개최하기에 앞서 고학번 선배들에게 연락을 돌리는 일을 왜 새내기들이 맡아야 하는가? '2학년, 3학년 학생들도 일을 나눠 하자'고 설득해도 다른 학우들로부터 '원래 새내기들이 하던 일', '하던 대로 할 것이지, 굳이 왜 바꾸느냐'는 반응이 돌아온다. 우리 일상에 잠재된 부조리를 없애야 한다."

1987 6월항쟁 집담회 청년 대학생
댓글8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