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OO을 보고 아쉬웠던 이유'는 작품에서 아쉬웠던 부분을 지적하는 코너입니다. 상대적으로 주관성이 강하며, 개인의 의견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작품의 스포일러가 많으니, 다음과 같은 독자가 글을 읽으면 좋습니다. '작품을 관람했고, 기분이 좋지 않은 관객', '주변의 평가가 좋지 않아 작품을 관람할 생각이 사라진 관객', '작품이 비판받는 이유를 알고 싶지만, 굳이 영화관에서 보고 싶지 않은 관객' - 기자 말


만약 당신이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11일 개봉) 작품을 보았다면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첫째, 이와이 슌지 감독을 알거나, 그의 영화를 좋아할 경우. 둘째, 단순히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거나, 삽입곡이 좋아서. 그리고 만약 당신이 이 영화에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면 그 이유도 위의 관람 계기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이와이 슌지의 원작을 본 당신의 마음이 철저하게 부서지거나, 영화에서 삽입곡만 건졌다며 통탄하거나. 이 글에선 이 영화가 위의 두 가지 기대에 부응했는지, 혹은 부응하지 못했는지를 분석하려 한다. 원작과 본작의 이름이 같은 관계로, 원작은 '원작' 본작은 '애니메이션'으로 통칭한다. 


첫째, 이와이 슌지 감독을 알거나, 그의 영화를 좋아할 경우

 영화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2017)의 작품 포스터

영화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2017)의 작품 포스터 ⓒ 미디어캐슬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이하 <쏘아올린 불꽃>)는 1993년 방영된 동명의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이다. 그 드라마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데뷔작이고, 50여 분의 단막극이다. 그의 필모그래피 전반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은 데뷔작 <쏘아올린 불꽃>에서부터 어김없이 드러난다. 전체적으로 뿌연 느낌의 필터, 의도적인 눈부심을 유도하는 조명, 은은하게 흔들리는 카메라. 여기에 서정적인 이야기는 덤이다. 아마 당신이 이와이 슌지를 좋아한다면 위의 특징 때문일 수도 있다.

여기서 잠깐, 위에서 말한 대로 이와이 슌지에게 '서정적인 이야기'는 덤일 뿐이다. 이와이 슌지는 이야기를 잘 만드는 감독이지만, 그의 촬영기법이 없다면 그 이야기는 '이와이 슌지'가 되지 못한다. 그의 영화에서 필터는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법' 혹은 '어둑어둑한 기억 속 어딘가'를 시각화하는 방법이다.

대중에게 유명한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1995)를 예로 들어보자. <러브레터>에서 여자 주인공 '이츠키'는 죽어버린 첫사랑을 그리워하며 그가 사망한 산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이때, 뿌연 필터는 산 전체에 안개가 낀 느낌을 주며 우리에게 '이츠키'의 희미한 기억 속을 전달한다. 말하자면 '추억 속 어딘가'다. 그런데 그것은 '추억'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감독의 다른 영화 <릴리슈슈의 모든 것>(2001)에서도 관찰되는 '뿌연 필터'는, 왕따를 당하는 주인공에 덧씌워지며 '눈 비빈 후 회복되지 않는 시선'같은 느낌을 준다. 말하자면 '자기만의 세계'다. 종합하자면 이와이 슌지에게 뿌연 필터란 '인물의 개인적인 추억'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이와이 슌지는 인물에 따라 카메라를 달리한다. <쏘아올린 불꽃>(1993)에서 주인공이 초등학생인 만큼, 카메라는 인물의 여리고 풋풋함을 표현하기 위해 사정없이 흔들린다. 왕따 당하는 중학생을 다루는 <릴리슈슈의 모든 것>에서 카메라는 사춘기를 표현하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쓴다. 사춘기 아이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의 '넓고 평평한 각도', 혼란스러운 마음을 대변하는 '흔들리는 각도'다.


고등학교 여학생을 다루는 <하나와 앨리스>(2004)의 카메라는 '정적이고 유연함'을 유지한다. 그런데 이러한 카메라는 이와이 슌지가 다루는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하나와 앨리스>의 카메라가 '정적이고 유연한' 것은 주인공들이 발레를 하고 있다는 것과 결합해 고고한 느낌을 준다. <릴리슈슈의 모든 것>은 작품 내에서 캠코더 촬영을 하는 인물들을 빌려 '흔들리는 각도'를 유지하며, <쏘아올린 불꽃>은 인물이 당황하는 상황에서 떨림이 심해진다. 

이와이 슌지에게 이야기가 덤인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이야기를 소홀히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가 감독이기 이전에 각본가이기 때문이다. 즉 그가 만드는 이야기는, 어떻게 연출하고 어떻게 촬영할 것인지가 미리 결정되어 있다. 그렇기에 '이와이 슌지'는 '이와이 슌지' 영화일 수밖에 없다. 당신이 그의 영화를 좋게 느끼든 나쁘게 느끼든 간에, 그 영화는 이와이 슌지가 아니면 만들 수 없다. 따라서 그의 이야기를 각색해 다른 감독이 만든 <쏘아올린 불꽃(2017)>은 당신에게 원작의 감동을 전하지 못한다. 이 애니메이션에는 흔들리는 카메라가 없고, 뿌연 필터가 없다.

둘째, 단순히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거나, 삽입곡이 좋아서

 영화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2017)의 한 장면

영화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2017)의 한 장면 ⓒ 미디어캐슬


이쯤에서 <쏘아올린 불꽃(2017)>을 옹호한다면 두 가지 정도를 들 수 있다. 원작과 리메이크는 별개의 작품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것과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의 차이를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전자의 경우에 대해 먼저 언급하자면, 영화 외적인 요인이 크다. 이 작품의 제작사와 배급사, 한국 배급사조차 '이와이 슌지' 원작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이와이 슌지 작품은 이와이 슌지가 만들어야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원작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큰 축을 뒤틀어버리는 '우'를 범하고 만다. 첫 번째로, 주인공의 연령대가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으로 올라간 점. 두 번째로, 상영시간을 늘리기 위해 이야기의 핵심을 '상상'에서 '초현실'로 바꾼 점이다.

아마 당신은 이 영화에 나오는 성적묘사를 불편하게 여길 것이다. 불편하지만 인물의 캐릭터, 남자 중학생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점으로 납득할 수 있다. 이러한 납득은 '정치적 올바름'이 아니라 '영화적 허용'이라는 선에서 이루어진다. 총 쏘고 담배 피는 마피아가 없다면 범죄영화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다른 부분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 이 작품에 나오는 성적묘사는 원작에서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원작의 주인공이 초등학생, 이번에 개봉한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은 중학생이라는 데 있다. 2018년을 사는 중학생이 여자 선생님을 성적으로 희롱하는 장면을 버젓이 담았다는 건 좀 납득하기 어렵다.

인물의 나이가 많아졌다면 그에 따른 책임과 정신적 성숙을 보여주었어야만 한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 몸에 달라붙은 곤충을 떼주는 장면이나, 남몰래 얼굴을 붉히는 장면은 원작에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 그 나이 기준으로, 남자 주인공의 시선은 성적묘사가 아닌 '풋사랑의 호기심'으로 기능한다. 초등학생이 무슨 연애냐고 물을 법한 시절, 자아가 형성되는 사춘기 이전의 아이들에게 찾아온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기에 그것만큼 제격인 게 없었던 것이다.


또한 원작에서 아이들은 불꽃이 납작한지 동그란지와 같은 사소한 일에 매달릴 정도로 순수함을 유지하지만, 사랑에 관해서 만큼은 어른들의 세계로 진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들이 보여주는 어른의 모습은 자칫하면 어색해지기에 십상이나, 이와이 슌지는 노련한 연출을 통해 그것을 덮어준다.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에 그런 건 없다. 이와이 슌지라는 연출이, 보호장치가 사라진 뒤 이 영화는 '풋사랑'이 아니라 '성적묘사'의 길에 들어선다. 

두 가지 중 하나. 순수함과 비 순수함

 영화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2017)의 한 장면

영화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2017)의 한 장면 ⓒ 미디어캐슬


아울러 초등학생의 순수함과 어른의 사랑이 동시에 등장했을 때 생겼던 재미가 사라졌다. 나이에 맞지 않은 순수함을 지닌 중학생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다. 위에서 '영화적 허용'이라고 말했던 것도, 깊게 파고들면 반박의 여지가 있다. 캐릭터 구축을 위해 성적묘사를 허용했다는 말은, 그것 없이 순수한 사랑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는지에 대한 반문을 불러올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성적묘사를 통해 캐릭터 구축이 이루어졌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색했던 것이 맞다. 하지만 그건 '이 이야기가 그대로 보존됐을 경우'에만 그렇다. 연애감정은 갑작스러운 성욕에서만 발원하지 않는다. 남녀는 서로 알아가며 '친구'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성적인 호감은 짧은 시간 안에 캐릭터를 설명하기에 편리하지만, 이 영화가 무리하게 러닝타임을 2배로 늘렸다는 점에서 '꼭 그럴 필요가 있었나'라고 반문하게 한다. 애니메이션 감독은 50분의 원작을 2시간짜리로 만들기 위해 영화적 장치를 '상상'에서 '초현실'로 바꾸었는데, 차라리 '상상'을 유지한 채 인물 간의 감정을 싹틔울 수 있는 장치를 공들여 준비하는 게 나았다.

화의 주요 장치가 '상상'에서 '초현실'로 바뀌었다는 건 생각보다 큰 문제다. 상상이라는 말은 '공상', '망상', '허상'등 여러 단어로 변용되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거나 지나간 것을 후회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나 두 의의에는 공통점이 있다. '지금 당장'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상상이다.

현재를 밟고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기에 그렇다. 원작에서 '나즈나'는 '노리미치'와 '유스케'에게 수영시합을 시켜 이긴 사람과 '도피'하기로 마음먹는데, 예상과는 달리 유스케가 이기고 만다. 유스케는 나즈나의 도피 제안에 응하지 않고, 나즈나는 노리미치가 보는 앞에서 부모님에게 끌려가고 만다.

그때, '노리미치'는 "만약 내가 수영에서 이겼더라면…"이라는 마음으로 상상해본다. 원작은 노리미치가 상상하는 그 순간부터가 시작이고, 그것은 거대한 사족이기도 하다. 사족이 없었어도 하나의 단편으로 완결성이 있던 작품은, 그 사족 탓에 오히려 순수함의 담화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일반적으로 지나간 것을 떠올린다면 '현재'에서 '그때'를 떠올리며 '애도' 혹은 '추모'하는 것일 텐데, 원작처럼 직접 상상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건 흔치 않다.

다시금 <러브레터>를 떠올려 보자. 그 작품 또한 현재에서 과거를 떠올리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추억을 되새기기만 할 뿐 추억 그 자체가 되려 하진 않는다. 즉 초등학생이라는 나이, 세상 물정을 모를 나이, 사랑이 뭔지 모를 나이는 원작의 풋풋함을 더하는 게 아니라 '풋풋함 자체'로 기능하는 요소다. 나이가 들수록 현실에 충실해지기 때문이다. 가족 중 누군가 숨지면 무척 슬퍼하면서도 한편으로 장례식 비용을 알아보는 게 우리가 아니던가. 

다시 말해, 우리는 그렇게 상상할 수 있었던 '시절'을 부러워했던 것이다. 그것은 순수의 영역이기에 개인에 따라 다르다. 마흔 넘어도 때 묻음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마찬가지로, 이 애니메이션에서도 중학생들의 '상상'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상상의 영역을 넘어 '공상'으로 넘어가면 그게 힘들다. 공상은 현재를 밟지 않고 시작된다. 분명 현재로부터 비롯되었지만, 미래의 어딘가에 뚝 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게 공상이다.

'공상'과학 영화를 떠올려보자. 그 영화에 나오는 기술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짐작하며 보는 관객은 없을 것이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기술'이면 몰라도 '감정'은 어딘가에서 뚝 떨어질 수가 없다. 기술은 외계인이 나와서 전수해주던가 묻힌 고대의 것을 발견했다는 것으로 넘어갈 수 있지만, 감정만큼은 그것이 발달할 만큼의 개연성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영화 중간의 사진 한 장으로 사랑에 대해 설명한다. 나즈나를 짝사랑하는 남학생이 너무 많고, 그들 개인에게 모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닐 테니 남자 주인공도 그럴 것으로 생각하게 될 여지가 충분하다. 사진 한 장으로 사랑이 느껴지기엔 빈약한 이야기 구조다.

두 가지 중 하나, 둥글거나 납작하거나


 영화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2017)의 한 장면

영화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2017)의 한 장면 ⓒ 미디어캐슬


이야기가 집중된 곳도 문제다. 원작의 제목에서 거론된 아이들의 순수 담론, 쏘아올린 불꽃의 모양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괜히 언급되는 게 아니다. 50분의 시간에서 절반 정도를 주인공이 아닌 아이들에게 할애한 건, 그들의 여정이 주인공의 여정에 이유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사랑이라는 것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여자애가 다짜고짜 손을 붙잡아 어딘지 모를 곳으로 '사랑의 도피'를 떠나자는데,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그걸 덥석 잡아버릴 사람이 있을까?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것, 불꽃의 모양을 찾아 떠나는 아이들은 사실 사랑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다. 불꽃놀이는 불꽃이 아름다운 것이지 모양이 중요한 게 아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영화는 그렇게 항변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주객이 전도되어 노리미치와 나즈나의 도피에만 집중한다. 이유 없이 떠도는 그들의 여정에 공감이 가지 않을 수밖에 없다. 애니메이션에서 아이들은 그저 노리미치를 방해하는 방해꾼처럼 묘사된다.

아마도 이 애니메이션은 그것을 '상상'에서 '초현실'로 바꾸며 나름의 합리화를 꾀했던 모양이다. 분명 '초현실'이라는 소재는 '마술적 사실주의(신비한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세계관)'라는 것을 설명하기에 적합하다. <너의 이름은.>에서 '무스비'라는 것으로 등장했던 그것이다. <너의 이름은.>은 불필요한 성적묘사를 제외하고 '마술적 사실주의'를 자연스럽게 응용한 영화다. 이 애니메이션은 (그나마도 비판점에 가까운) 불필요한 성적묘사가 <너의 이름은.>보다 적다는 점을 제외하곤 모든 면에서 떨어진다.

영화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온 마술적 도구, 투명한 구슬은 노리미치에게 '시간을 돌릴 수 있다'고 믿게 해주는 도구다. 하지만 정말로 그것뿐이다. <너의 이름은.>은 '무스비'라는 우연성을 설명하기 위해 영화 초반부터 결말까지 할머니의 입을 빌려 계속 언급한다. 반면, 이 애니메이션은 그것이 노리미치의 상상인지, 혹은 정말로 시간을 거스른 것인지 추측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마술적'이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 그에 따른 합당함이 필요한 법이다. 아무런 설명이 없으니 관객은 그게 뭔지 끝까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여운을 남기기 위해 열린 결말을 택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그건 열린 결말이 아니라 만들다 만 것처럼 보인다.

결론은 불꽃의 모양이 둥글다는 것 

그래도 이 영화를 보아야 한다면, 혹은 좋게 기억하고 싶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이 영화 <쏘아올린 불꽃(2017)>은 당신이 오래전에 잊었던 감성을 일깨워 주었다고. 이와이 슌지를 이렇게나마 만나게 되어 기쁘다고. 이와이 슌지가 감독을 맡아 흥행에 성공했던 <하나와 앨리스:살인사건> 애니메이션은 잠시 접어두자. 이 영화를 이와이 슌지가 직접 감독했더라면 지금보다 나았을 것이 기정사실이지만, 변화를 맞이한 원작은 항상 다채롭게 다가오니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선호 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기사에 한하여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이와이 슌지 쏘아올린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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