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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이직을 할 때마다 공백기가 있었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여러 달. 속상하게도, 그때마다 몸이 아팠다. 책을 질리도록 읽겠다, 가능한 한 먼 곳으로, 가능한 한 길고 긴 여행을 떠나겠다, 생각은 무성했지만 오래도록 실현하지는 못했다.

딱히 별다른 이유 없이 아파오는 몸을 추스르느라 시간을 보내고, 재취업을 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은 멀쩡해졌다. 스스로 일개미가 체질이라며 농담하곤 했지만, 아마도 월급과 소속이 없어진다는 불안감을 이겨내지 못한 것일 테다.

서른 즈음, 또 한 번의 퇴사를 앞두고 무작정 오스트레일리아행 항공권을 끊었다. 특별한 계획도 없었다. 집에 있으면 또 병치레로 허송세월을 할 것만 같아서 내린 무모한 결정이었다.

그곳에서 열 살 가까이 어린 친구를 만났다. 고교 졸업 후 대기업의 생산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워킹 홀리데이를 왔다고 했다. 붙임성이 좋다고만 생각했는데, 어느 날 그녀가 말했다. 퇴사하길 잘했다고, 수고했다고 칭찬해준 것은 언니뿐이었다고. 그래서 언니가 좋았다고.

주책맞게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실상, 그건 나에게 하는 말이었으므로. 앞으로 무엇을 할지 계획은 있냐는 질문이 아닌, 남들 다 참고 다니는데 너는 왜 못 참아서 그만뒀냐는 핀잔이 아닌, 그간 수고했다고. 그만두길 잘했다고(물론, 이미 퇴사한 이후니까 가능한 말이라는 사족을 붙인다).

<회사 그만두고 어떻게 보내셨어요?> 책표지
 <회사 그만두고 어떻게 보내셨어요?> 책표지
ⓒ 종이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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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있던 지난 일들을 소환해가며, 이 책을 읽었다. 안미영 작가의 옴니버스 퇴사 에세이, <회사 그만두고 어떻게 보내셨어요?>. 콕 짚어낼 수 있는 슬픈 일은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데 나는 눈물이 핑 돌았으니, 담담한 문체에 묻어나는 저자의 필력에 감탄을 보낸다.

"다음 거처를 정하지 않고 회사를 나온 이는 막막한 미래를 불안해하며 '하루빨리' 자신을 설명할 새로운 타이틀을 찾아 나서야만 하는 건가? 이제는 쉬어가는 시간에 대해서도 가치를 부여할 만한 시대가 되지 않았나?"


저자는 직장생활 13년 차에 세 번째 퇴사를 하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 역시 궁금해졌다고 한다. 이 책이 퇴사 이후의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내는 방법을 알려주는 자기계발서는 아니라고 저자는 분명히 하지만, 그 어떤 자기계발서보다 시간을 "가치 있게" 활용하도록 도울 거란 확신이 든다. 물론 이 말을 덧붙여야겠다.

"여기서 '가치 있다'는 말이 눈에 보이는 생산적인 무언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쉬어가는 시간을 통해 예전보다 자신을 조금 더 잘 알게 된다면 그것도 아주 큰 성과이니 말이다."


열 명의 이야기가 실렸다. 뭉뚱그려 말하자면, 다니던 직장에 회의를 느껴 퇴사했다는 것은 같다. 그 어느 이야기들 사이에서 나를 발견할 수도 있으니, 고개를 주억거리며 보는 맛이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모두가 다르다. 공통점으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재미도 있지만, 그 다름에 이 책의 더 큰 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열정페이'를 합리화하며 심신이 피폐해지도록 일했던 A. 퇴사 후 또 다른 좋아하는 일을 찾아, 현재 티 소믈리에 활동과 강의를 하고 있다. 잡지 에디터였던 K는 자연과 함께 하는 일을 하고 싶어 퇴사 후 관련 공부를 했고, 도시에 숲을 조성하는 NGO단체에 들어갔다. 약속되었던 정규직 전환이 무산된 L은 자신의 본연의 모습대로 살고 싶었다. 지금은 회사에 다닐 땐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자신의 가게를 운영하게 되었다.

위의 사례가 업종 전환에 성공한 미담으로 들린다면, 이건 어떨까. 퇴사 후, 온전히 '덕후로 살아보는 시간'을 보낸 O도 있다. 그녀는 좋아하는 취미생활에 푹 빠져 지낸 덕분에 일상을 풍요롭게 보낼 수 있었고, 완벽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돈과 시간과 온 마음을 좋아하는 대상에게 쏟는다는 건 스스로의 관심과 감정에 매우 솔직하게 몰입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자신을 위한 일이다. 그 열렬함을 통해 얻는 에너지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는, 경험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뿐인가. 퇴사 후 아봐타(AvatarⓇ)와 원네스(Oneness)를 통해 마음공부에 전념한 M, 퇴사한 직장의 부조리와 업계의 적폐를 해소하기 위해 힘든 투쟁을 결심한 Y, 광고업계에서 탄탄한 커리어를 쌓았음에도 육아에 집중하고자 커리어를 중단한 B, 영양사로 일하던 직장을 퇴사한 뒤 육아와 밴드 활동에 전념했던 C 등 실로 다양한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선택은 모두 다르지만, 그 모두에게, 또한 이 책에 실리지 않은 모든 직장인들과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모든 이들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어진다. 다양한 삶을 접할수록 내 삶의 선택지가 늘어나고, 서로를 알지 못하는 우리지만 충만한 에너지를 함께 주고받는 기분에 휩싸인다.

저자는 퇴사를 미화하거나 종용하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일상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직장인의 노력과 자세를 무의미하게 말하거나, 퇴사한 이들에게 모두 다 잘될 거라는 희망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밝힌다. 감히 말하건대, 그녀의 노력은 성공했다. 내가 느낀 건 이 불안정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순수한 동지애다.

에필로그에서 밝히듯, 이 책은 퇴사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결국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가 되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행동하고 새로운 희망을 찾는 것이다'라는 레베카 솔닛의 말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직장생활과 퇴사에 적용해본다.

"회사를 다닐 땐 퇴사 이후를 염두에 두고 좋아하는 것들을 간직하며 살 것, 퇴사 이후에는 불확실성을 감당하며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것들을 시도하고 실험해볼 것, 실패하더라도 새로운 방향을 찾을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질 것.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쥔다는 것은 이런 태도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이 책에 등장하는 열 명의 인터뷰이는 모두 여성이다. 성별불문, 직장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들이지만, 그럼에도 오직 여성만의 이야기가 실린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계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담아" 내겠다는 저자이니, <회사 그만두고 어떻게 보내셨어요? 남성편>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그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를지, 퍽 궁금해진다.


회사 그만두고 어떻게 보내셨어요? - 옴니버스 퇴사 에세이

안미영 지음, 종이섬(2018)


태그:#회사 그만두고 어떻게 보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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