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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10월 28일 국제백신연구소(IVI) 세계본부 건물 증정식에 참석한 자리에서 '어린이의 생명을 구하는 일은 바로 인류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대한민국은 60~70년대까지 콜레라, 장티푸스와 같은 전염병으로 큰 고통을 치렀고, 국제사회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던 나라다. 그랬던 대한민국이 IVI 국제본부를 유치했다는 건 인류 건강과 행복에 기여하는 나라가 되었다는 뜻이다.

한국이 아시아 6개국과 경합 끝에 유치한 IVI는 비엔나 협약에 따른 독립적 국제기구다. 개발도상국을 위한 새로운 백신 개발과 도입 촉진에 전념하는 세계 유일의 국제 연구기관으로 1997년 설립 이후 공공 및 민간으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다. 그 중 지금까지 가장 많은 연구기금을 지원한 재단은 빌앤멜린다 게이츠재단으로 알려져 있다.

IVI의 설립 목적만 놓고 보면 빌게이츠 재단의 기부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빌게이츠재단의 기부 행위와 방식 등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의료 서비스를 시장에서 사고파는 상품이 되어야 한다는 빌게이츠재단의 접근 방식에 이의를 제기한다. 지불 능력과 관계없이 권리로 보장되는 보건 의료 시스템을 구축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빌게이츠재단은 의료뿐만 아니라, 공교육과 아프리카 농업 등에 있어서도 신자유주의적 발전과 기업 지배 모델을 강요하고 있다. 그래서 비판자들은 빌 게이츠가 '한 손으로 기부하고, 다른 손으론 강탈한다'고 주장한다. 박애 자본주의로 포장한 빌게이츠의 기부는 손해볼 것 없는 영악한 투자, 비지니스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니콜 애쇼프 지음, 황성원 옮김. 도서출판 펜타그램
▲ 자본의 새로운 선지자들 니콜 애쇼프 지음, 황성원 옮김. 도서출판 펜타그램
ⓒ 도서출판 펜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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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새로운 선지자들>의 저자 니콜 애쇼프는 그 중 한 사람이다. <자본의 새로운 선지자들>은 미국을 대표하는 새로운 급진주의 저널인 자코뱅과 서구사회의 진보적 사상을 대표하는 출판사 버소(Verso)가 협업을 통해 만들어내고 있는 자코뱅 시리즈 중 한 권이다.

니콜 애쇼프는 이 시대에 각광받고 있는 슈퍼엘리트들이 전하는 이야기들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그는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 셰릴 샌드버그, 홀푸드 최고경영자 존 매키, 언론계 유력 인사 오프라 윈프리, 게이츠재단 설립자인 빌과 멀린다 게이츠, 네 사람이 자본주의 선지자 행세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선지자는 개인적인 부름과 동시에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설파하는 카리스마적인 인물이다. 선지자의 권력은 계시와 카리스마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선지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 사회가 어떻게 잘못되어 있고 어떻게 하면 바로 잡을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새로운 스토리텔러가 된다는 뜻이다. 그들은 이 시대의 선지자들이다.

니콜 애쇼프는 선지자들인 스토리텔러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자본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본다. 즉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시대의 신화라는 것이다. 스토리텔러 신화로 인해 우리 모두는 더 많은 이윤을 영속적으로 축적하기 위해 고안된 시스템 안에 갇혔다고 지적한다.

니콜 애쇼프의 주장처럼 스토리텔러들이 오랜 세월 동안 풀어놓은 이야기들은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이윤 추구를 합리화하는 신념 체계인 자본주의 정신은 그들에 의해 강화되고 있다.

"노동은 미덕이고 이윤 역시 미덕이라는 이런 이야기들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제 평생 죽도록 일하는 것은 완벽하게 자연스러워 보인다." -12쪽

스토리텔러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그들이 제시한 비전과 해법은 오히려 자본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비판함으로써 비판을 흡수하여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자본의 새로운 선지자들은 핍박을 받던 예전 선지자들과 다르다.

그들이 갖고 있는 카리스마는 부를 축적하는 능력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빈곤과 불평등을 안겨 준 자본주의를 비판한다. 이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을 장악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는 강력하다.

저자는 스토리텔러들이 성공의 책임을 오롯이 개인에게 떠넘기고, 소외와 불평등에 도전하는 집단의식을 차단하고 있다는 점을 이렇게 꼬집는다.
"오프라를 비롯해 자수성가를 찬양하는 여러 선지자들은 개인의 성공 전략
을 강조함으로써 실제 우리 사회의 권력 구조와 불평등을 가벼운 것으로 치부한다." -28쪽

오프라는 "원하는 일을 하라", "열정을 따르라"고 충고한다. 오프라의 이야기들은 아메리카드림이 성취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하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교정할 수만 있으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게 한다. 과연 그럴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은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다. 그러나 경쟁에서 도태된 가난한 노동자의 꿈이 짓밟히는 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

사회 불평등을 해소하고 변화 가능성을 모색하려고 해도 스토리텔러들이 만들어놓은 신화는 이미 이데올로기가 되어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변화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스토리텔러들의 이야기를 헛소리라고 규정하는 저자의 주장은 그런 면에서 설득력을 갖는다.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고 덤빈다 해도 세대가 바뀔 때마다 부를 새로 만들어 내지 못한다. 부는 관대한 세법과 사회 및 문화 자본의 성실한 이전을 통해 세습되고 보존되며 확대된다." -153쪽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고 했다. 나라다운 나라, 사람이 먼저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지금껏 관행적으로 이어져왔던 적폐, 사회 불평등을 키우고 변화 가능성을 일축해 왔던 시스템에 변화를 가져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탈정치화된, 현실에 안주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들은 시스템에 거의 혹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촛불 혁명으로 변화를 이끌어내었다 하더라도,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신화가 최고의 가치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은 세상을 바꾸기 위한 도전을 치기어린 도전으로 취급해 버린다.

<자본의 새로운 선지자들>은 유명 인사들의 기부를 그저 '좋은 일한다'고 단순하게 보지 않는다. 그 이면을 살피려 든다. 이러한 시도에 대해 모든 것을 삐딱하게 보는 불평불만 가득한 자들의 시선이라고 무시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기부를 기업 홍보 수단으로, 부도덕한 경영인 혹은 정치인들의 면피성 출연을 너무 많이 보아온 탓에 21세기 슈퍼엘리트들의 기부 행위를 박애주의로 포장하며 이들의 행위를 무작정 칭찬하는 것을 탓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비판론자들이 "왜 유명 인사들이 애초에 기부를 하게 됐을까" 하는 질문은 정당하다. 탐욕스런 자본주의자들이라는 인식에 면죄부를 얻으려는 행위는 아닌지 살펴본다고 문제될 게 없다. 그들은 비즈니스적인 접근법으로 기부를 조직화하고, 효율성과 성과 측정을 요구하는 기부행위 때문에 투자에 가깝다는 비판을 자초했다.

빌게이츠가 기부하는 이유는 이윤을 남기는 확실한 투자이기 때문임을 <자본의 새로운 선지자들>은 까발렸다. 니콜 애쇼프는 영악한 자본주의의 자선 행위가 왜 힘을 갖고 있는지 따져 물어봄으로써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질문은 변화를 이끄는 힘이 되는 법이다.


자본의 새로운 선지자들 - 21세기 슈퍼엘리트 스토리텔러 신화 비판

니콜 애쇼프 지음, 황성원 옮김, 펜타그램(2017)


태그:#선지자, #자본, #빌게이츠재단, #오프라,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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