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파하는 이청용 지난 10월 7일 오후(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VEB 아레나에서 열린 축구 국가대표 평가전 대한민국 대 러시아의 경기. 이청용이 돌파하고 있다.

▲ 돌파하는 이청용 지난 10월 7일 오후(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VEB 아레나에서 열린 축구 국가대표 평가전 대한민국 대 러시아의 경기. 이청용이 돌파하고 있다. ⓒ 연합뉴스


'블루 드래곤' 이청용의 신세가 참으로 처량하다. 이제 리그는 고사하고 컵대회에서도 출전 기회를 얻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지난 9일 이청용의 소속팀 크리스털 팰리스는 브라이턴 앤 호브 앨비언의 FA컵 3라운드(64강) 경기에서 1-2로 패하며 탈락했다. 이청용은 대기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이번에도 경기에는 출장하지 못했다.

통상적으로 컵대회는 로테이션 차원에서 리그에서 많은 출장 기회를 얻지 못했던 선수들에게 경기감각을 찾아주기 위해 출전시키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이날 경기는 팰리스가 시종일관 끌려다니며 만회골을 넣어야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로이 호지슨 감독은 공격 자원인 이청용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팰리스는 이날 3장의 교체카드 중 2장만 활용한 채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이청용의 팀내 위상이 팰리스에서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다.

한때 포스트 박지성이었던 이청용, 그러나 지금은

한때 '포스트 박지성'의 1순위 후보로 거론될 만큼 촉망 받던 이청용의 재능을 감안하면 격세지감이다. 이청용은 K리그 FC 서울에서 프로에 데뷔해 2009년 당시 프리미어리그 1부 소속이었던 볼턴 원더러스에 입단하며 유럽파의 반열에 접어들었다. '단짝' 기성용조차도 유럽진출 초기 셀틱(스코틀랜드)에서 고전을 면치못했던 것과 달리, 이청용은 프리미어리그 입성과 동시에 적응기도 없이 단숨에 주전을 꿰차며 혜성처럼 떠올랐다. 정교한 패스와 탁월한 축구센스는 이전 한국 축구에서 보기힘든 테크니션의 탄생을 알리는 듯했다.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는 한국대표팀의 주전 측면 공격수로 2골을 터뜨리는 활약을 펼치며 사상 최초의 원정 16강 진출에 기여하기도 했다. 좌측의 박지성-우측의 이청용으로 이루어진 좌우 날개 조합은 한국 축구의 측면 조합 중에서도 역대급으로 꼽혔던 환상의 콤비였다.

하지만 2011년 다리 골절 부상에 이어 소속팀 볼턴의 2부리그(챔피언십) 강등까지 연달아 덮친 악재는 탄탄대로를 달리던 이청용의 축구 인생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웠다. 볼턴은 이후 다시 1부리그로 승격하지 못했고 이청용은 수년간 2부리그에 머물며 기량이 정체되는 모습을 보였다. 부상이후 예전만큼의 활동량과 창의성을 보여주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한때 볼턴에서 승승장구하던 초기 시절만 해도 빅클럽 이적설까지 나올만큼 주목 받던 선수였지만 2부리그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며 이청용의 주가도 곤두박질쳤다.

2015년 마침내 볼턴을 떠나 팰리스에 입단하여 꿈에 그리던 프리미어리그 복귀에 성공하는 듯했지만 결과적으로 또다른 시련의 시작이었다. 이청용은 그해 1월 호주 아시안컵에 출전했다가 또다시 부상을 당하며 이적 초반 공백기를 가져야 했고 주전 경쟁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밀려났다. 이후 팰리스에서 벌써 4번째 시즌을 맞이하고 있는데도 지금까지 이청용의 팀내 위상은 '벤치 워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소속팀에서 오랫동안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대표팀에서도 자연히 영향력이 추락했다.

이청용의 몰락은 한국 축구로서도 큰 손실이었다. 이청용이 순탄하게 성장했더라면 지금쯤 축구 선수로 한창 전성기를 보내야 할 시기다. 한국 축구의 왼쪽 측면에 부동의 에이스 손흥민(토트넘)이 건재했던 것과는 달리, 오른쪽은 이청용의 부진 이후 마땅한 대체자를 찾지 못하고 오랫동안 고전해야 했다. 또래 세대인 기성용(스완지시티)이나 구자철(아우스크부르크) 등도 비록 부침은 있었지만 유럽 무대에서 한 팀의 주축으로 자리매김한 것과 달리 이청용은 수년째 '전력외' 신세로 전락하며 점점 잊힌 선수가 되어가고 있다.

어느덧 팰리스와의 계약도 2018년 6월이면 만료된다. 올여름에는 러시아월드컵 본선도 기다리고 있다. 지금쯤 한창 소속팀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며 경기감각을 끌어올려도 모자랄 시점에 이청용은 팰리스에서 하루하루 의미없는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다.

K리그로 돌아오기는 싫고, 대표팀은 되고 싶고?

그동안 이청용을 둘러싼 이적설은 수차례 나왔다. 최근에는 친정팀 FC 서울이나 강원FC와 관련하여 K리그 복귀설도 나왔다. 하지만 이청용 측에서 이를 부인하며 여전히 유럽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가는데 우선 순위를 두고 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최근 유럽파 점검을 마친 신태용 축구대표팀 감독은 이청용과의 면담을 통해 '월드컵 출전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정리하자면 이청용의 현재 입장이란 '경기에 출전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유럽은 벗어나고 싶지 않다. K리그는 아직 가기 싫다. 하지만 올해 월드컵에는 나가고 싶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물론 유럽에 남든 K리그로 돌아오든 진로 선택은 선수 본인의 자유다. 하지만 이청용이 정말로 한국 축구에 기여할 의지가 있거나, 만일 월드컵 출전을 진지하게 목표로 생각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이청용이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일시적인 상황이 아니다. 2015년 이후 무려 지난 3년간 반복되고 있는 문제다. 이청용을 팰리스로 처음 영입한 앨런 파듀 감독 시절부터 샘 앨러다이스, 프랑크 데 부어, 로이 호지슨 감독까지 벌써 여러 명의 감독을 거쳐가는 동안에도 자신의 팀내 입지를 반전시키지 못했다면 거기까지가 실력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진작에 이적이든 임대든 변화를 모색하여 어떻게든 경기에 출전할 수 있는 길부터 찾아야 했다.

이청용의 행보는 묘하게도 친정팀 FC서울의 선배이기도 한 박주영의 4년 전 상황과 흡사하다. 당시 아스널 소속이던 박주영은 지금의 이청용과 마찬가지로 수년째 소속팀에서 경기 출전 기회도 제대로 잡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홍명보 감독이 이끌던 대표팀은 박주영의 재능과 경험을 대체할 선수가 없다는 이유로 그를 최종엔트리에 발탁했고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기용했으나 결국 재앙같은 경기력을 선보이며 한국축구 추락의 원흉이 됐다. 박주영은 월드컵 직후 아스널에서도 초라하게 방출 당했고 사실상 선수로서 더 이상 갈 곳 없이 떨어진 다음에야 K리그로 돌아와서 근근이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누가 뭐라해도 선수는 그라운드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한다. 그런 면에서 이청용에게 박주영은 좋은 반면교사가 되어야 했다. 아무리 유럽 무대에서 활동한다고 해도 수년째 제대로 경기도 나서지 못하는 선수에게 '도전'이라는 핑계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월드컵이 반년도 남지 않은 시점에 지난 몇 년간 보여준 것도 없는 선수가 세계 최고의 선수들만이 경쟁하는 월드컵 출전을 기대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욕심일 뿐이다.

이청용, '제2의 박주영' 되어서야

냉정하게 말해 이청용은 소속팀은 물론이고 대표팀에서도 지난 수년간 이렇다할 활약이 없었다. 이청용 역시 박주영과 마찬가지로 2014년 브라질월드컵에서 부동의 주전으로 나섰음에도 실망스러운 경기력으로 홍명보호의 조별리그 탈락을 만들어낸 데 영향을 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이청용은 슈틸리케와 신태용 체제를 거치면서도 러시아 월드컵 예선과정에서 기여한 것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현재의 대표팀은 더 이상 이청용이 없어도 손흥민, 권창훈, 이재성, 이근호, 염기훈 등 대체자들이 풍부하다.

지금 이청용이 본받아야 할 롤모델은 석현준(트루아)이다. 한국 축구의 대표적인 '저니맨'으로 불리는 석현준은 네덜란드, 포르투갈, 사우디, 터키, 헝가리, 프랑스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의 리그를 떠돌아다니며 '축구 난민'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석현준은 끊임없는 변화와 도전을 통하여 수많은 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선수경력을 스스로 개척해왔다. 진짜 '도전'이라는 표현은 이런 경우에나 어울리는 것이다.

이청용과 비슷한 처지였던 박주호도 최근 겨울 이적시장에서 유럽을 포기하고 K리그 울산행을 선택하며 월드컵 출전에 대한 간절함을 드러냈다. 그런데 이청용은 이제와서 이적할 팀을 찾는다고 해도 사실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최종엔트리 발표전 대표팀 최정예멤버들이 나와서 손발을 맞출 수 있는 마지막 기회는 사실상 3월 A매치뿐인데, 불과 두달 사이에 새로운 소속팀을 찾아서 적응하고 최상의 경기감각까지 되찾는다는 것은 호날두나 메시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또 다른 선수들과 형평성의 문제도 생각해봐야 한다. 예전 이름값이 좀 있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월드컵 본선이 코앞으로 다가와서야 '벼락치기'로 팀을 옮겨 겨우 몇 경기 나선 정도만으로 현재의 상태를 무시하고 월드컵에 데려간다면, 이는 지난 수년간 월드컵을 바라보며 묵묵히 노력해온 선수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이청용이 이대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올여름 자유계약 선수가 되어서도 유럽 무대에 잔류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어쩌면 이청용은 지금 축구 선수로서 자신의 커리어를 스스로 망치는 길을 선택하고 있지 않은지 냉정하게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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