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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이 부옇다. 몇 시나 되었을까? 눈짐작으로 시간을 가늠하며 머리맡에 두었던 스마트폰을 더듬대며 찾았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예수가 이 세상에 온 날이다. 평화가 온 세상에 가득한 날이었지만 내게는 그렇지 못했다. 일상이 산산이 부서졌고 손발이 묶여버렸다. 모두 잠자는 이른 새벽에 절망감에 빠져 대성통곡했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베트남 나짱(나트랑)의 바닷가 풍경.
 베트남 나짱(나트랑)의 바닷가 풍경.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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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 맞는 크리스마스는 조용했다. 열대의 나라여서 산타클로스도 찾아올 수 없는 건지 나쨩(나트랑)의 크리스마스는 다른 날과 다름없었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면 청년들이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성탄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는데, 이곳에서는 그런 풍경도 볼 수 없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마당에서 이 노랫소리가 들려오면 얼마나 고맙고 기뻤던가.

"메리 크리스마스,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십시오."
"고맙습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입니다."

우리는 미리 준비해놓은 과자봉지를 찬양대에게 건네주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베트남으로 여행을 왔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 우리 부부는 천리만리 떨어져 있는 강화도 우리 집을 떠올렸다. 성탄 축하 노래를 불렀을 청년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따뜻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추운 밤길을 걸어 우리 집에 찾아왔건만 아무도 반겨주는 이가 없었을 테니, 고맙고도 미안했다.  

우리를 찾아온 밤손님, 착한 산타가 아니었다

베트남에서 맞는 크리스마스날, 우리에게 '산타클로스'가 찾아왔다. 그러나 그 산타는 착한 산타가 아니었다. 그는 우리가 잠잘 때 몰래 찾아와서 선물 대신 재앙을 주었다. 내 노트북과 스마트폰 그리고 남편이 보다가 놔둔 태블릿PC를 몽땅 챙겨 가버렸다.

그것은 단순히 물건을 도둑맞았다는 의미 이상이었다. 그는 우리의 여행을 망쳐버렸다. 태블릿PC로 여행 정보를 검색하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노트북으로 여행기를 썼는데, 이제 어떡해야 하나.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노트북으로 여행기를 쓰며 행복했던 나날.
 노트북으로 여행기를 쓰며 행복했던 나날.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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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나 이제 어떡해. 이제 어떡해."

눈앞에 벌어진 일이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나, 돌아갈래. 베트남이 좋았는데, 이제 무섭고 싫어. 나, 집에 돌아갈래."

소름이 끼치도록 무섭고 끔찍했다. 우리가 깊게 잠든 틈을 이용해 몰래 들어와서 머리맡에 둔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훔쳐갔다. 생각할수록 섬뜩했다. 오래 정들었던 노트북과 생이별을 한 것도 내내 가슴 아팠다. 무생물인 노트북이 마치 생물인 양 미안했다.

앞으로 어떻게 여행을 해야 하나. 노트북 없이 무슨 재미로 사나. 마치 내 손발이 꽁꽁 다 묶인 듯 막막해서 여행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꺽꺽 울었지만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통곡을 하여도 절망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베트남으로 여행을 온 지 한 달, 여행기를 쓰며 재미있게 지냈다. 아침 해가 뜨면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맞이했고 저녁 해가 저물면 숙소로 돌아와 일기를 썼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재미에 여기가 천국이구나 생각했는데, 노트북 없이 이제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인가. 글을 쓰지 않는 내 여행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다.

 호텔이 아닌 홈스테이를 구했던 우리, 도둑은 현지 사정에 어두운 여행자들을 노린 것 같다.
 호텔이 아닌 홈스테이를 구했던 우리, 도둑은 현지 사정에 어두운 여행자들을 노린 것 같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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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달랏에서 근 한 달 지내다 나짱(나트랑)으로 왔다. 달랏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라면 나짱은 해변을 끼고 있는 도시라서 그런지 활발하고 분주했다. 집도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담장이 높았다.

그 담장에는 어느 집 할 것 없이 가시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저 그러려니 여기고 넘어갔다. '아, 여기는 달랏보다 더 큰 도시라서 방범 시설을 이렇게 하나 보다' 생각했지 내가 도둑을 맞을지는 꿈에도 몰랐다.

도둑은 주방의 쪽창을 통해서 들어왔다. 출입문과 발코니로 통하는 문은 잠그고 잤지만 주방의 쪽창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 좁은 창을 통해 도둑이 들어올 거란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우리는 도둑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았다. 도둑이 들어 물건을 잃어본 경험도 없을 뿐더러 내 주변에서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찾아온 '진짜' 산타

서울에 사는 애들을 보러 한 번씩 가면 딸과 아들은 내게 신신당부를 했다.

"어머니, 문 잠그는 것 잊지 마세요. 여기는 강화도가 아니에요. 현관문을 꼭 잠그고 있어야 해요."

아이들은 마치 내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기라도 한 양 문단속을 잘할 것을 재삼재사 가르치곤 했다. 세상이 아름답고 따뜻하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다면서 애들은 내게 당부했다.

 베트남의 길거리에서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베트남의 길거리에서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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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이 그렇게 말할 만도 했다. 나는 문단속이 뭔지를 모르는 곳에서 산다. 우리가 사는 강화도는 인심이 순후해서 울타리도 치지 않고 담장 역시 없다. 문을 잠그지 않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 그런 곳에서 우리는 산다. 긴 여행을 떠날 때도 걱정할 게 없다. 이웃이 잘 살펴주기 때문이다. 두 달 동안 베트남으로 여행을 떠나면서도 집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런 우리였으니 문단속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도둑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베트남에서 물건을 잃어버렸다는 글을 더러 보기는 했지만 그것이 내 일이 될 줄은 몰랐다. 이제 어떡해야 하나. 아직 한 달 더 여행 기간이 남았는데, 무슨 재미로 계속 여행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울어도 울어도 해결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진 듯 통곡하는 나를 바라보던 남편이 정신을 수습하고 길을 찾았다.

"며칠 뒤에 처형이 오실 때 헌 핸드폰 하나 챙겨오라고 부탁하자. 노트북도 하나 사다 달라고 그러자."

 나짱(나트랑)의 바닷가 공원에서 여행 일정을 의논중인 남편과 형부, 그리고 언니.
 나짱(나트랑)의 바닷가 공원에서 여행 일정을 의논중인 남편과 형부, 그리고 언니.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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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다 잃어버린 것처럼 막막했는데 한 줄기 빛이 보였다. 

'그래, 언니에게 부탁하자. 며칠만 참자. 그러면 다시 재미있게 여행할 수 있어.'

크리스마스 날에 만난 횡액에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신은 또 다른 길을 준비해주셨다.

그러고 보니 언니는 내 인생의 산타클로스였다. 내가 대학교에 가서 더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도 언니였고 부모님이 다 돌아가신 뒤로는 맏이로서 동생들을 거두고 챙긴 것 역시 언니의 몫이었다. 도둑은 내게 절망도 주었지만 언니에 대한 고마움도 느끼도록 해주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도둑이 든 것도 가볍게 넘어갈 수 있었다.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맞이했던 크리스마스는 내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겼다. 다시 떠올리기조차 싫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추억이 되었다. 노트북과도 마음으로 이별했다. 그동안 내 것이었지만 이제는 다른 곳에서 잘 쓰이길 빌었다.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베트남을 찾아올 언니와 형부를 기다렸다. 아니, 언니가 들고 올 노트북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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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