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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혼잡한 지하철역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체 유동인구가 많은 곳인데 홀로 서있자니, 길을 물어오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나름대로는 성심성의껏 길을 안내하고, 좀 늦는다는 친구와 문자도 주고받는 와중에, 누군가 등을 툭툭 쳤다. 

"여기 3번 출구가 어디야?"

3번 출구가 어딘지 모르기도 하거니와 애써 찾아드릴 의욕은 생기지 않았다. 다짜고짜 던져진 반말도, 그녀가 분별없이 건드린 내 허리께도 마뜩치 않았다. 정중히 모른다고 대답한 내게 그녀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아무것도 몰라? 하나도 몰라? 아무것도 모르는데 여기 나왔어?"

당황스러워 아무 대꾸도 못하고 있는 새, 그녀는 멀어져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건 어떤 종류의 혐오는 아니었을까. 내가 남자였다 해도 그녀가 내게 똑같이 행동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은 접어두더라도. 아주 잠시라 할지라도, 내가 느낀 것은 분명한 악의였다. 나 또한, 찰나지만 그에 상응하는 감정을 품었음을 인정해야겠다.

<죽이러 갑니다> 책표지
 <죽이러 갑니다> 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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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죽이러 갑니다>를 포함해 7편의 단편이 실려있는 가쿠다 미쓰요의 소설집은, 우리 안의 크고 작은 혐오와 악의를 신랄하게 그려내고 있다. 자극적인 제목에 비해 특별한 사건사고가 나오진 않지만, 책을 보는 내내 섬뜩한 기분에 휩싸여야 했다. 다름 아닌 내 안의 부정적 감정들과 마주해야했으므로.

도쿄를 오랜만에 찾은 <죽이러 갑니다>의 구리코는, 그녀를 밀치듯 지나가는 남자들 때문에 금세 지쳐버린다. 매표소 앞에서 동전을 꺼내고 있는 틈엔, 누군가 "뭘 꾸물대고 있는 거야" 하며 그녀를 힐책한다. 화가 난 마음과 다르게, 구리코는 재빨리 사과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뜬다.

구리코는 자신의 의견을 묵살한 채 시댁 근처의 시골로 이사한 남편을 원망하면서도, "원흉은 유이치(남편)가 아니라 시어머니"라고 생각한다. 오랜만에 만난 히로에는, 여전히 시어머니에게 의지하고, 그녀와 같아지길 자신에게 요구하는 남편이 못마땅하다. 히로에는 자식이 삶의 전부인 시어머니와 같은 사람들을 혐오하면서도, 자신 역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친다.

구리코는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린다. 열두 살의 그녀를 절망에 빠뜨렸던, 그녀 생애 최초의 살의를 느끼게 했던 선생님, 사루야마. 그러나 나약한 노인이 된 사루야마는 구리코를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갈 곳을 잃은 악의는 그녀를 혼란에 빠뜨린다.

"지금 있는 곳이 좋아지지 않고, 그렇다고 새로운 곳을 찾을 수도 없다. 용서해주고 싶고 받아들이고 싶고 더 다가가고 싶은데, 혹시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거절하고 싶고 무시하고 싶고 단칼에 끝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다. 언젠가 그 어느 것을 선택할 수 있을까. 아니면 자신은 그 전부를 껴안고 갈 것인가."

<아름다운 딸>의 가요코는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 유별나게 아름답지는 않아도, "사람들보다 조금 더 행복해질 만큼은"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가요코. 그렇게 우월감을 가진 채 살아온 그녀는 타인의 인정에 매달리는 한편, 갈수록 포악해지는 딸을 추한 계집애라고 생각하며 그런 자신에게 놀라게 된다.

딸의 악의는 커져만 가고, 가요코는 상처받는다. 이 모녀의 애증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기대와 달리 아름다운 딸을 가질 수 없었다는 가요코의 실망감이 원인이었을까. 아니면, 사춘기를 맞이한 딸의 반항심이 시작이었을까. 이들 모녀가 살의에 가까운 악의를 주고받는 동안, 남편이자 아버지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스위트 칠리소스>의 미도리는 "남편과 굉장히 평화적으로 서로를 미워하고 있"는 상태다. 추레한 몰골로 도서관에 오는 낯선 여인에게 악의를 품었던 미도리는, 그녀와 자신, 그리고 제 어머니가 어느 순간 겹쳐 보이는 것을 깨닫는다. 제 안의 선의와 악의를 마주한 미도리.

"사랑한다는 것과 미워한다는 것은 같은 얼굴이라고 시게미치가 말했지만, 아니다. 그것은 섞일 수 없는 너무도 분명한 긍정과 부정이라고 미도리는 생각한다. 섞일 리가 없는 것, 사람의 내면에서 같은 강도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뚜렷한 칼날을 들이밀지 않아도, 악의는 사람을 두렵게 한다. <하늘을 도는 관람차>의 주인공 시게하루는 불륜 사실이 아내에게 발각된 뒤로, 두 명의 여인에게 동시에 저주받고 있다는 느낌에서 헤어 나올 수 없어 전전긍긍한다. 물론, 그럼에도 그를 일방적 피해자로 봐줄 순 없다.

선한 청년으로 알려져 있는 <맑은 날 개를 태우고>의 노리유키는,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녀의 개를 죽이고자 계획한다. 그것이 찐득한 악의라면, "기분 좋고 시원시원한" 악의도 존재한다. 노리유키의 동료들은 가벼운 장난치듯 사람을 헐뜯고, 중상모략을 일삼는다. 그것이 누군가에겐 흉기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우리의 도망>의 구라타는 리사의 세상을 향한 분노에 동조하면서도, 그 부정적 감정에 지쳐 그녀로부터 도망치듯 멀어진다. 그러나 문득 깨닫는다. 자신이 두려웠던 것은 어쩌면 리사가 아니라 제가 가진 악의의 증식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어느 한 편도 빠짐없이 일상의 악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안의 악의를 마주하며 뜨끔한 순간도 있었고,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던 타인의 악의를 떠올리며 새삼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그런 와중, <잘 자, 나쁜 꿈 꾸지 말고>의 사오리는 내 숨통을 트이게 한다. 헤어진 남자친구가 만들어낸 온갖 추문에 휩싸여 고통스러운 사오리. 그에게 복수할 기회가 왔지만, 뜻밖에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미안하다는 사과다.

그녀는 악의를 제 안에 가두지 않는다. 악의를 악의로 갚으려 하지 않는다. 또한 집안에만 있으려고 하는 동생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어떤 악의는 응징해야 마땅할 것이다. 다만 누구라도 한때 품을 수 있는 조악한 악의는, 어설픈 발차기 한 번 허공에 날리고 잊어버리는 것이 어떨까.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위해서. 순간일지라도 악한 마음을 품었던 나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죽이러 갑니다

가쿠타 미쓰요 지음, 송현수 옮김, Media2.0(미디어 2.0)(2007)


태그:#죽이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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