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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화된 인간이어서 발생하는 돌봄

인간은 평생 누군가의 돌봄을 필요로 한다.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어린아이는 양육자에게 모든 것을 전적으로 기대어 돌봄을 받는다. 그 후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과 교육은 끊임없는 돌봄의 연속이다. 성인이 된 후에도 일상생활의 모든 것은 돌봄의 연속이다. 성인이 다른 연령대의 사람과 다른 것은 스스로 그것을 할 수 있느냐 –실제로 하느냐 와는 다른 문제이다- 의 차이일 뿐이다. 고령의 노인이 되면 다시 돌봄을 필요로 한다. 특히나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우리 사회에서 이는 대단히 심각하고도 중요한 문제이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돌봄은 자연 상태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낳자마자 한 시간 내에 걷고, 뛸 수 있는 동물의 새끼에 비해 인간의 어린아이는 지나치게 나약하다. 동물은 학교라는 체계 속에서 집합 교육을 하지 않으며 거대 집단에 적응하기 위한 긴 사회화 과정 없이 바로 성체가 된다. 나이 들어 스스로 먹이를 찾지 못 하는 동물은 도태된다. 인간의 돌봄은 문명화 이후에 자연 상태에서는 생존할 수 없는 약한 존재들을 살 수 있게 하는 행위들이며, 많은 물건의 사용과 다양한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것들이다. 또한 우리가 구축한 기술과 문명의 발전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활동의 토대이다. 돌봄 없는 일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의 시민권 박탈 원인이 된 돌봄

필수 불가결한 '돌봄' 개념이 핵심적인 공적 논쟁의 장에 등장한 적은 없었다. 대부분 이러한 돌봄은 사적 영역에서 이루어져 왔으며 여성들이 담당해 왔기 때문이다. 공적 영역으로 진출하지 못한 돌봄은 그 가치가 저평가되었고, 숨겨진 그림자 노동이 되어 왔다. 전업주부를 '집에서 논다'고 말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지금껏 우리 사회는 여성이 단지 생물학적으로 출산과 수유 능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에게 돌봄을 떠넘겨 왔다. 한걸음 나아가 돌봄에 적합한 신체와 심성을 가졌고 본시 돌봄에 특화된 존재라는 신화를 끊임없이 재생산해 왔다. 여성들에게 지워진 돌봄 책임은 그 무게만큼 인정받지 못했고 기록되지 못했다. 처음 아이를 낳고 돌봄의 책임을 떠맡은 엄마들은 절규한다. 왜 아무도 신생아가 이렇듯 까다롭고 24시간 손이 가며 다루기 어려운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돌봄 책임은 여성에게 보상과 인정을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에게 시민권을 박탈하는 원인으로 작용해 왔다. 여성이 노동시장에서 노동자로서 역할 하려 할 때마다 뒷덜미를 잡아 챈 것은 바로 이 돌봄이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은 결혼, 임신, 출산, 육아, 가사, 가족 돌봄으로 이어지는 돌봄의 1차 책임자로 설정되면서 장시간 노동과 야근과 회식을 감당할 수 없는 2등 노동자로 취급되고 있다. 20대 여성들조차 채용 면접자리에서 결·남·출(결혼, 남자친구, 출산 계획)이라 불리는 질문 -얼마나 반복되었으면 합의된 약어까지 존재하는가- 을 무수히 반복적으로 받고 있다. 결국 이들은 이를 이유로 채용에서 배제되거나 거부한다는 이유로 난생처음 본 면접관으로부터 버릇없고 제멋대로라는 꾸지람을 듣고 배제된다. 반면 배우자가 있는 남성은 안정적 기반을 확보한 능력 있는 노동자로 인식된다. 돌봄 책임의 불균형한 분배는 평등권을 침해하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일도 하고 시민 역할도 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누군가는 불공평하게 돌봄의 의무를 떠안고 있다면 민주주의 이론은 아직 그 임무를 다 하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돌봄 책임을 누가 어떻게 분담할 것인가는 평등권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는 매우 정치적인 논쟁을 가져온다. 돌봄과 민주주의가 결합되는 지점 또한 여기에 있다. 민주주의는 시민권을 확대함으로써 차별과 배제를 철폐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누구도 차별받거나 배제되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라면 현재 돌봄이 가진 불평등성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돌봄 '할' 권리와 '받을' 권리를 인정하면 확장된 논의의 장 열려

한편 돌봄을 책임으로만 인식하지만 돌봄은 양면성을 가진다. 책임의 다른 면은 돌봄을 할 권리이다. 내 아이를 돌볼 권리를 박탈당한 이 시대의 아버지들은 가족으로부터 소외와 배제를 당한다. 책임은 권리의 이면이다. 책임을 수행한 만큼 유대감과 가족 공동체 소속감은 증가한다. 그러나 어린 딸이 아버지에게 "아빠, 또 놀러 와요"라고 말하는 광고가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돌봄을 할 권리는 결국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이는 좀 더 확장된 논의를 불러온다. 회사에 매인 시간 빈곤자는 돌봄을 할 권리를 박탈당한다. 시간의 측면에서는 일·생활 균형 논의를 촉발시키고 이는 다시 노동시간 단축, 휴가의 자유로운 사용 등으로 확장된 논의를 가져온다.

돌봄은 또한 학습이 필요한 생존 기술이기도 하다. 독립하여 1인 가구로 생활한 지 5년이 지나도록 화장실 청소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한 연예인의 이야기가 그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내가 먹고 싶은 음식 한 그릇조차 내 손으로 만들지 못하는 현실은 취향을 떠나 건강에 대한 심각한 위협일 수밖에 없다. 청소년기 아이들에게 공부만 요구하는 우리의 교육환경은 집안의 모든 돌봄을 어머니에게 떠넘기고 있다. 분배되지 않은 돌봄은 생존 기술 습득 과정조차 박탈하고 있다. 이는 다시 교육과 문화의 문제로 확장된다. 오늘도 스스로를 돌볼 능력과 생존 기술을 습득하지 못한 이들이 독립해 1인 가구를 구성해 나가고 있다.

헌법에서 돌봄의 권리와 평등한 책임을 말하는 것은 지금껏 사적 영역에서 배제되어 있던 돌봄을 공적 논의의 장으로 끌어내는 큰 의미가 있다. 이는 다시 시장화된 돌봄 노동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돌봄 노동은 시장화되면서 사적 영역에서 여성이 무임금으로 해 오던 노동이라는 이유로 심각하게 저평가받고 있다. 당장 우리 정부부터도 사회서비스 바우처 노동자들의 돌봄 노동에 대해 최저임금 미만의 임금을 지급하고 있는 현실이다. 정부가 최저임금법을 위반하고 있지만 예산 부족을 내세우면서 최저임금도 주지 못 하겠다고 버티고 있다. 하지만 예산은 우선순위의 문제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돌봄 노동에 대해 그만큼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도 함께 말이다.

앙드레 고르는 인간 활동을 세 가지 차원으로 정리하고 임금을 얻기 위해 하는 타율노동, 개인 욕구와 일치하는 스스로 명령한 활동으로서의 자율노동, 그리고 생물학적인 인간이 생명과 성장, 유지를 위해 필요한 자활노동으로 나눈다. 고르는 인간의 자율성을 회복하고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타율노동에 의한 식민지화에서 벗어나 자율노동시간을 늘리고 그로 인한 소득감소 등은 그동안 경제이성에 지배되었던 사적 영역의 노동들을 다시 자활노동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젠더와 상관없이 누구라도 또는 누구든지 자급의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고르가 주장하는 자율노동과 자활노동의 능력 회복은 시장 의존적 소비자로 전락한 인간의 모습에 대한 비판이다. 돌봄이 자활노동과 동의어는 아니지만 앙드레 고르가 주장하는 젠더와 상관없는 자급 능력과 사적영역의 재탈환은 돌봄의 권리와 맥락적으로 닿아있다.

국가가 발전해 오면서 돌봄의 책무를 국가의 것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증가해 왔다. 영유아 돌봄부터 시작해서 장기요양보호제도 도입을 통한 노인 돌봄, 장애인, 저소득 한부모까지 사적 영역으로 치부됐던 돌봄을 국가 책임으로 확대하고 있는 추세이다. 아무도 이것이 가족 내 사적 문제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돌봄을 할 권리'와 '돌봄을 받을 권리'에 대해서 언제까지 하위법에서만 규정할 것인가.

 돌봄의 평등한 권리와 책임 실현은 민주주의의 진전

트론토는 돌봄의 '무임승차권(passes)'을 경계하고 돌봄의 책임과 권리를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가 진보했음에도 현재의 민주주의는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개인이나 의존하는 개인을 돌보는 이들을 시민으로서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차별과 배제는 돌봄 책임을 민주주의의 과제로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이상 해결할 수 없다고 덧붙인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본질은 돌봄 책임을 분배하는 것이며, 이러한 돌봄 책임을 민주주의 과제로 인식하지 못 하는 민주주의는 아직 그 임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민주정치는 민주시민이 이러한 돌봄의 책임분담 문제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확신과 돌봄을 위한 책임 분담을 그 논의의 중심에 두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돌봄을 할 권리'와 '돌봄을 받을 권리'를 헌법에 명시하는 것은 이렇듯 다양한 논의의 확장을 가져오며 우리 사회 전반의 변화를 이끌어올 수 있다. 이는 민주주의 진전에 크게 기여할 것임이 명백하다.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돌봄을 할 권리'와 '돌봄을 받을 권리'는 인간 생존의 기본조건이며 자유와 평등의 전제조건이라는 사실이다. 

덧붙이는 글 | 이 칼럼은 한국여성노동자회 기관지 <일하는여성> 104호에 공동 게재됩니다.



태그:#돌봄노동, #민주주의, #돌봄 민주주의, #개헌, #여성 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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