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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살을 해서라도 학생운동을 저지해야 한다!"

전두환 정권은 칼을 뽑아들었다. 학생운동을 뿌리 뽑을 기세로 극단적인 강경책을 내밀었다. 삼민투 수사 결과를 발표한 이튿날인 1985년 7월 19일, 노신영 국무총리는 공권력을 총동원해서 법질서를 확립하겠다고 공언했다. 각부 장관들도 나섰다. 내무부, 법무부, 문교부, 노동부 등 학생운동을 관장하는 관련 부처들은 지금까지의 정책을 과감하게 수정하여 더욱 강경한 방법으로 대처하겠다고 언명했다.

뭔가를 꾸미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정권의 의도는 7월 25일에 드러났다. '학원 소요'를 근절하기 위한 강경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는 보도가 신문 지면을 시커멓게 장식했다. '학원안정법'이라는 명칭의 특별법을 입안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1985년 민주화운동 39개 단체들이 결성한 학원안정법반대투쟁전국위원회에서 김대중 김병걸 송건호 계훈제 등 재야인사들이 모여 학원안정법 철회 요구 성명을 발표하는 장면
 1985년 민주화운동 39개 단체들이 결성한 학원안정법반대투쟁전국위원회에서 김대중 김병걸 송건호 계훈제 등 재야인사들이 모여 학원안정법 철회 요구 성명을 발표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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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학생을 영장 없이 체포 및 구금하여 6개월 동안 집단적인 '선도 교육'을 이수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인적이 드문 오지에 '감호소'를 설치하고, 그곳에 내무반 별로 10-20명의 학생들을 수용하여 훈련시키겠다는 복안이었다. 만약에 교육 중에 단식, 탈출, 집단행동 등의 방법으로 저항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에게는 가혹한 형사처벌을 가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야수적인 강제수용소 정책이었다. 전두환 집권 초창기 6만여 명의 시민을 '불량배 소탕'이라는 이름아래 영장 없이 연행하여 짐승보다 못한 고초를 겪게 했던 삼청교육대의 이른바 '순화교육'을 연상케 하는 조치였다. 그뿐인가. 1981~1983년 시기에 강제로 징집된 운동권 대학생 출신 사병들 4백여 명을 대상으로 가혹행위와 고문을 서슴지 않았던 이른바 '녹화사업'의 부활이나 다름없었다.

사회 저변에 긴장과 공포감이 흘렀다. 광주학살에 버금가는 무서운 탄압이 도래하고 있는듯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근거 없는 두려움이 아니었다. 정권 수뇌부는 광기마저 드러내고 있었다.

예를 들면 대학생들이 미문화원을 점거한 다음날 안전기획부 간부회의에서 장세동 부장은 폭언을 내뱉었다. "주요 보안 목표에 대한 공격이 있을 때에는 총살을 해서라도 저지해야 한다"고 격분했다는 것이다. 무서운 말이었다. 정권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제2의 학살도 불사한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전두환 정권 수뇌부의 심리 상태를 대변하는 말이었다.

학원안정법은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입안된 것이었다. 그들은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 여름방학 중에 학생운동을 근절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놓겠다고 작정했다. 즉 8월 15일경 임시국회를 열어서 학원정상화 임시조치 법안을 단독 통과시키겠다는 것이 정권 수뇌부의 복안이었다.

들끓는 학원안정법 반대 운동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학생과 시민사회, 야당 측에서 격렬한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민청련도 앞장섰다. 민청련은 8월 10일자로 '학원안정법 반대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장기집권을 획책하려는 「학원안정법」 제정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단호히 투쟁"하겠다고 결의를 표명했다.

1985년, 시위가 금지된 상황에서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학원안정법 철회를 주장하는 전단지를 거리로 살포하는 광경
 1985년, 시위가 금지된 상황에서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학원안정법 철회를 주장하는 전단지를 거리로 살포하는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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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3일에는 학원안정법 저지를 목적으로 하는 여러 세력의 공동행동기구가 결성됐다. 민주화운동 39개 단체와 민추협이 공동으로 결성한 '학원안정법 반대투쟁 전국위원회'가 그것이다. 이는 민주화운동 세력과 야당 세력의 연합기관이었다. 전국위원회의 송건호 위원장과 민추협의 김대중, 김영삼 공동 의장은 그날 공동회견을 갖고, 성명을 통해 "학원안정법 입법 추진은 마땅히 철회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에 더하여 천주교와 기독교 등의 종교 세력도 나섰다. 8월 17일에 '한국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산하 인권위원회'가 신구교 합동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들도 학원안정법 제정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명백히 했다.

임박한 폭풍에 대비한 5차 총회

폭풍이 곧 몰아칠 기세였다. 피신을 권유받은 김근태 등 민청련의 공개 지도부 성원들은 대응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구속과 탄압이 다가오고 있었다. 탄압의 강도는 통상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대대적인 것이 되리라고 예측할 수 있었다.

속히 대응 조치를 만들어야 했다. 탄압의 표적이 될 공개 간부들을 보호하고 비공개 활동을 강화하는 방안이 요구됐다. 특히 김근태 의장이 맡고 있는 역할을 축소시킬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민청련 의장 직책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러려면 총회 개최를 서둘러야 했다.

그래서 민청련 제5차 총회 준비 작업이 은밀하게 시작됐다. 통상 총회를 6개월 주기로 연 것에 비하면, 두 달이나 이른 시점에 총회 준비 활동을 개시했던 것이다. 여느 총회 때와 마찬가지로 총회준비위원회(총준)가 조직됐다. 각급 기구와 비공개 기반 조직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총준은 총회 개최에 요구되는 정치적, 실무적 준비 업무를 추진했다. 준비 업무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그런데 총회 개최 날자와 장소가 결정된 시점에 기밀 유출 사고가 터졌다. 총회 개최지를 홍제동 성당으로 정했는데, 어떤 연유인지 그 정보가 경찰에게 누설됐다. 경찰은 성당 안팎을 통제하면서 출입자들을 감시했다. 속히 새 장소를 마련해야만 했는데, 다행히 기독교 측의 협력을 얻었다. 총회 개최지를 마포구에 위치한 신촌교회로 변경했다. 장소 변경을 알리는 은밀한 통지가 대의원들에게 전달됐다. 제5차 정기총회가 1985년 8월 10일 서울 마포구 신수동 신촌교회에서 열렸다.

20쪽 분량의 5차 총회 보고서 표지와 5차총회 결의문. 미리 인쇄된 보고서에는 장소가 홍제동 성당으로 돼 있지만, 실제 장소는 마포구에 있는 신촌교회로 바뀌었다.
 20쪽 분량의 5차 총회 보고서 표지와 5차총회 결의문. 미리 인쇄된 보고서에는 장소가 홍제동 성당으로 돼 있지만, 실제 장소는 마포구에 있는 신촌교회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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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의사 진행은 김근태 의장이 아니라 김희택 운영위원장이 맡았다. 김근태는 체포당할 위험을 감안해서 이날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총회가 열리는 시간 동안에 회의장 근처를 배회하며 소식을 전달받았다. 

총회에서 임원 개선이 이뤄졌다. 새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한경남(전 부의장), 부의장으로 최민화(전 부의장), 김희택 (전 운영위원장), 김병곤(구속중, 전 상임위원장)을 선출했다. 신임 의장 한경남은 김근태 창립 의장에 뒤이어 두 번째로 막중한 사령탑을 맡게 됐다.

새 의장 선출 문제는 총준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진 사안이었다. 처음에 신임 의장직 물망에 오른 이는 장준영이었다. 그는 5차 총회 이전에 비공개 부의장직을 수행하면서 비공개 기별 대표 조직과 계반 관리에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그래서 많은 간부 회원들의 신뢰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힘껏 사양했다. 연령과 학번 상으로 역량 있는 선배들이 두텁게 포진해 있으므로 자신이 의장에 취임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장영달 부의장을 새 의장에 선임하는 방안도 한때 고려했지만, 채택되지 않았다. 결국 의장직 선임에 적극성을 보인 한경남이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총준위 내부에서는 의장 후보들에 대해 다각적인 토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타협과 절충에 의하여 한경남을 새 의장직에 추천하기로 합의가 이뤄졌다.

5차 총회에서 선임된 의장단. 1.한경남 의장 2.최민화 부의장 3.김병곤 부의장 4.김희택 부의장
 5차 총회에서 선임된 의장단. 1.한경남 의장 2.최민화 부의장 3.김병곤 부의장 4.김희택 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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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의장단은 곧 바로 집행부를 조직했다. 운영위원장 박우섭, 상임위원장 천영초, 사무국장 윤여연, 집행국장 이범영, 서원기, 교육선전부장 윤형기, 청년부장 김종복, 여성부장 조임숙 등 각 부서장을 임명했다. 새 집행부 성원은 의장단 4인, 위원장 2인, 국장 및 부장 6인 등 도합 12인으로 이뤄졌다.

이들이 험난한 학원안정법 국면 속에서 민청련을 이끌어갈 공개 간부들이었다. 이리하여 공개 간부와 비공개 기반 조직들로 구성된 새로운 조직 시스템이 짜였다. 예상되는 강력한 탄압에 대응하여 선제적으로 조직을 재편하는 데에 성공한 셈이었다.

제5차 총회는 학원안정법 국면이라는 삼엄한 상황 속에서 개최됐으므로 험난한 투쟁을 각오하는 결기를 세웠다. 제5차 총회 결의문과 시국선언문 속에는 그 당시 정세를 보는 민청련의 시각과 결의가 잘 드러나 있다.

즉 "온갖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그 어떤, 설혹 죽음으로 헌신하더라도 우리의 민주화 투쟁은 결코 종식되지 않는다"고 다짐했다. 또 '학원안정법 반대투쟁위원회' 조직을 결의한데 이어서, 그 투쟁의 전면화를 제창했다. "모든 민주화운동세력은 이 땅을 「강제수용소」로 만들고 전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압살하여 장기집권을 획책하려는 「학원안정법」 제정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단호히 투쟁하자"고 호소했다.

갑작스런 학원안정법 철회

민청련 제5차 총회가 열린지 1주일이 지난 때였다. 정국이 또 한 번 요동쳤다. 8월 17일 전두환 대통령은 학원안정법 제정을 일단 보류한다고 발표했다.

전혀 예기치 않은 조치였다. 사실상 철회한다는 의미였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한 달 가까이 정국을 긴장으로 몰아넣었던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 조치는 '드라마틱했다'고 표현해도 좋았다.

살기등등하던 전두환 정권이 왜 학원안정법 추진을 포기했을까? 민청련 사람들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진단했다. 하나는 반대운동이 각계각층에 걸쳐서 광범하고 대대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었다. 법 제정을 막무가내로 추진하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대규모였던 것이다. 민주화운동 세력에 더하여 김대중과 김영삼이 이끄는 양대 야당 정치세력이 가담했기 때문에 민심이 온통 그쪽으로 쏠릴 우려가 있었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미국 정부의 태도였다. 미 국무성, 국방부, 정보부 세 라인을 통해서 전달되는 미국 정부의 영향력이 학원안정법 제정에 대해서 우호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온 사회를 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던 학원안정법 제정 시도가 불발로 끝났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태가 조성됐다. 유화국면이 앞으로도 지속될 것인지, 아니면 야수적인 폭압 국면으로 되돌아갈 것인지 쉬 판단할 수 없었다. 불안한 정적이 흘렀다.

민청련 5차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문과 시국선언문
 민청련 5차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문과 시국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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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전 의장은 학원안정법 철회 이후의 정세를 낙관적으로 진단하는 편에 섰다. 학원안정법 보류 조치로 인해서 전두환 정권이 '대단히 유리한 정치적 입장'을 얻게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보류 조치가 모든 국민에게 일종의 선물이나 은혜처럼 해석되고 있었다.

정치 군부가 이러한  유리한 분위기를 자신의 손으로 깨트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대규모 구속 선풍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결국 김근태는 피신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민청련 의장직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노골적인 탄압 대상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라는 희망 섞인 예측이 그러한 결심을 굳히는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민주운동단체의 대표라는 자의식도 그 결정을 내리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당당하지 못한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설사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심각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앞서 구속된 김병곤이나 황인하의 경우와 동일하게 취급된다면, "최악의 경우 감옥에서 휴식을 취해 마음을 수련하는 시기로 삼자"는 계획조차 품었다.

김근태는 자신의 판단에 대해서 민청련의 가까운 동료들과 상의했다. 많은 간부들이 동의해 주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안이하게 생각한다는 충고를 들었다. 크게 다치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있었다.

그 경고가 현실이 되는 사태는 의외로 빨리 다가왔다.


태그:#민청련, #학원안정법, #한경남,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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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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