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메인포스터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메인포스터 ⓒ 인디스토리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01.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그리고 올해 무주산골영화제에서 상영되며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작품이 하나 있다. 이 영화는 지난 2014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단편 영화 <만일의 세계>로 우수 작품상을 받으며 이제 막 데뷔한 임대형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기도 하다. 100분이 조금 넘는 시간 내내 흑백으로만 진행이 되며, 어느 한 장면도 화려하거나 과장되게 꾸며지지 않는다. 등장인물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다. 그동안 이름은 잘 몰랐지만 어디선가 분명히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었던 중년 배우가 나와 차분한 가운데 극을 주도해 나간다. 때때로 요즘의 영화들에서는 보지 못했던 장면들이 나오기도 한다. 영화 속 그들이 말하는 찰리 채플린이 그랬던 것처럼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유치하기도 하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은 모두 하나같이 감동적이라고 말한다.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에 대한 이야기다.

02.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충남 금산 시내에서 오랫동안 이발사로 살아온 모금산(기주봉 역)이라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대충 눈치를 챘겠지만, 그가 바로 이 작품의 타이틀에 등장하는 미스터 모다. 아내를 일찍 떠나 보내고 외아들인 스데반(오정환 역)은 영화를 찍겠다며 서울로 떠나 홀로 외롭게 살고 있다. 잠을 자기 위한 집과 일터인 이발소, 수영장과 맥주 한잔을 위한 치킨집만 전전하는 지루하고 외로운 삶. 그 외로움을 달래고 싶어서였을까, 수영장에서 만난 은행원 아가씨 자영(전여빈 역)과 맥주 한잔 딱 했을 뿐인데 벌써 온 동네에 소문이 날 정도로 갑갑한 인생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보건소에서 암 선고를 받는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순간에 자신의 오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아들과 그의 여자친구 예원(고원희 역)을 불러 직접 쓴 시나리오를 내놓는 금산. 영화는 그런 그의 꿈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함께 나아간다.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스틸컷 두 사람은 단순히 부자 지간의 모습이라기보다 세대 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스틸컷 두 사람은 단순히 부자 지간의 모습이라기보다 세대 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 인디스토리


03.
일상, 계획, 여행, 작별, 그리고 성탄절, 총 다섯 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는 이 영화는 모든 시선이 주인공인 미스터 모, 모금산에게로 향해있는 작품이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 챕터에 해당하는 '일상'은 그의 삶을 오롯이 비춰내는 중요한 부분이다. 영화 속 미스터 모는 한국 전쟁 이후에 태어난 베이비붐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로 가난한 시대 속에 먹고 살기 위해, 또 그 가난을 자식 세대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던 많은 부모 세대들을 비춰낸다. 젊은 시절의 꿈을 포기하고서라도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기술을 배워 사회에 던져져야 했고, 자신의 삶보다는 가족의 삶이 먼저였던 청춘이 그들의 청춘이었다. 그 결과 지금 남은 것은 모두가 떠나고 텅텅 비어버린 가슴과 썰렁한 집뿐이지만 그들의 젊은 시절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04.
그런 미스터 모에게 젊은 시절의 꿈이란 사치였을지 모르나 그렇다고 쉬이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들인 스데반이 자영에게 했던 말처럼 그도 젊은 시절에는 서울에 올라가 오디션을 보러 다닌 적이 있었다. 어쩌면 미스터 모에게 배우라는 꿈은 손끝에 닿을지도 모르는 미련이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보이지 않으면 모를까, 원래 아스라이 먼 꿈이 현실을 더 괴롭히는 법이다. 그런 그의 마음은 매일 밤 잠이 드는 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용히 들여다보는 예원을 방 안으로 불러 자신의 병을 처음으로 고백하는 장면. 그 장면에서 점차 조명되는 그의 책장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수많은 시나리오 파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책장의 칸 가운데 부분이 휘어져 아래로 가라앉아 있다. 실제로 원목이 아니라 합판으로 만들어진 책장은 무거운 책이나 많은 책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장면에서 미스터 모가 간직해 온 꿈의 무게와 그 여한의 세월을 헤아릴 수 있다. 이 장면은 분명히 의도된 것으로 임대형 감독의 섬세한 연출이 돋보인 장면이라는 생각을 한다. 단순히 촬영을 위한 며칠만으로는 이 장면을 우연히 얻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05.
그런가 하면 그는 세대 간의 단절된 현시대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는 어느 한 쪽의 세대에만 부과되는 종류의 것은 아니며, 이 영화 속에서 양쪽에서의 불통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먼저, 미스터 모라는 인물에게서는 권위주의적이고 일방향적인 소통만을 일삼던 부모 세대의 모습이 여지없이 그려진다. 전후 맥락에 대한 설명도 없이 일방적으로 일을 처리하고자 하고, 말하기 곤란하거나 스스로에게 불리할 만한 이야기에는 상대의 이해를 구하기보다 답답함으로 일관한다. 자식 세대의 마음도 표면적으로는 헤아리지 않는다. 속으로는 깊이 생각하고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절대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더 거친 방법으로 대한다. – 영화 속 미스터 모 역시 그렇다.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것 또한 자신의 꿈만을 위한 것이 아닌 자리를 잡지 못하는 아들에 대한 마음이 내포되어 있다. – 그런가 하면, 아들 스데반에게서는 그런 부모 세대를 대하는 자식 세대의 문제들이 보인다. 부모 세대는 아무 것도 모를 것이라 생각하거나 자신이 해야 할 노릇은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서 부모의 책임만 찾는 모습.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찰리 채플린조차 모를 거라며 미스터 모를 무시했지만, 이게 웬걸, 그는 당대 스타들의 이름과 특징까지 읊어낼 정도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영화 속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되는 과정이기도 하고 다른 모습의 세대가 서로를 이해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스틸컷 영화 속 그의 모습이 실제 위에 오버랩되는 것만 같다.

▲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스틸컷 영화 속 그의 모습이 실제 위에 오버랩되는 것만 같다. ⓒ 인디스토리


06.
우여곡절 끝에 시작되는 마지막 챕터인 '성탄절'의 서두, 12월 12일부터 하루씩 일기 형식으로 읽어 내려가는 장면은 이전의 장면들이 쌓아온 내러티브와 결합하여 특별한 감정을 남긴다. 누군가의 삶이 끝나는 자락에서 읊어지는 마지막 유언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세대에게 남기는 위안의 말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리고 10명을 위해 시작된 그들의 특별한 상영회. 영화 속에서 우스꽝스럽게 그려지는 그의 모습은 이제 결코 우습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몸 속에 들어간 사제 폭탄으로 인한 불안을 어쩌지 못해 홧김에 터뜨리려다가도 그 앞을 지나가는 노인에, 또 아이가 탄 유모차 앞에, 결국 버튼을 누르지 못하는 모습이 실제로 그가 살아온 인생 위에 겹쳐지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과거의 어떤 선택을, 또 그 결과에 대한 불안을 끝내고자, 매듭짓고자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지금까지 미루어둘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삶이 말이다.

07.
흑백 영화에는 컬러 영화가 줄 수 없는 그만의 깊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흔들림 없이 중심을 잡고 극을 이끌어 가는 기주봉 배우의 묵직한 연기와 함께 한 번도 호흡을 흩뜨리지 않은 채로 섬세한 시선을 유지하는 임대형 감독이 있다. 미스터 모에게 12월 25일은 언제나 아내의 기일이었을 뿐이었다. 그 날이 되면 아마도 그는 강냉이를 꺼내 먹으며 오래전 찍어뒀던 홈비디오 테이프만 돌려 보았을 것만 같다. 올해는 그를 위해 이렇게 외쳐도 좋지 않을까.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

영화 무비 메리크리스마스미스터모 기주봉 임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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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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