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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세월호참사국민조사위원회'와 '4월16일의 약속 국민연대'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연구활동을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국민조사위는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세월호 팩트리포트'를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2017년 4월 1일 목포신항 화이트 마린호 위의 세월호
 2017년 4월 1일 목포신항 화이트 마린호 위의 세월호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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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팩트리포트⑧] '유대균 순살 치킨 시켜먹어' 기사는 어떻게 나왔을까?

지난 팩트리포트 7호(관련 기사 : "저 방안에 살아있어요" 해경은 끝내 구하지 않았다)에서 세월호 참사 관련 해경의 구조행위를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바 있다.

"세월호 참사에서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구조계획'이다. 476명의 승객이 탑승한 여객선이 침몰하고 있는 상황에서, 선원들은 무엇을 하고, 해경은 무엇을 하고, 또 해경이 이동하는 동안은 무엇을 하고, 도착 이후에는 무엇을 하는 등의 구조계획을 수립하고 시간대별로 잘 이행이 되고 있는지 확인한 존재는 대한민국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당시 어떤 형식으로든 '구조계획'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우리는 이 '구조계획'을 수립할 책임이 있었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세월호 참사 당시 구조에 책임이 있는 해경 지휘라인은 목포해양경찰서장 - 서해지방해양경찰청장 – 해양경찰청장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참사 당시 이들은 하나같이 소재가 불확실하거나, 행적이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다시 말해 어디에 있었는지, 아니면 무엇을 하였는지가 하나같이 불분명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참사 당일 행적이 불확실한 대표적인 인물을 또 한 명 떠올릴 수가 있다. 바로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근혜이다. 지금부터 당시 해경지휘부와 대통령의 불분명한 행적에 대해 한 번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 목포해양경찰서장

사실 목포해양경찰서장(아래 목포서장)은 세월호 참사에 있어 직접적으로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목포해양경찰서(아래 목포서) 관할에서 여객선이 침몰하였으므로 목포서장의 지휘 하에 상황실이 현장을 제대로 파악하고, 해경이 현장으로 출동하여 승객들을 안전을 도모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본인의 진술에 따르면 목포서장은 참사 전날인 4월 15일에 목포서 소속의 1508함을 타고 중국어선 단속을 나갔다가, 1508함에서 헬기 B-512호를 타고 4월 16일 오전 9시경 3009함에 착함하였다. 그리고 9시 3분경 3009함 부장의 보고로 세월호 소식을 최초로 인지하게 된다.

이후 헬기 B-512호는 9시 17분경 세월호 참사 현장으로 출동하게 되는데 목포서장은 이 헬기에 탑승하지 않고 계속 3009함에 머물러 있었다. 본인 주장으로는 이후 TRS교신을 청취하고, e-mate 메신저(해경 문자상황방)를 주시하면서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이 말이 과연 진실일까? 우선 다음과 같은 해경 문자상황방의 내용을 볼 필요가 있다.

본청상황실님의 대화(오전 9:37): 목포서장도 현장 복귀 지휘할 것

9시 37분에 해경 문자상황방에 올라온 내용이다. 인천에 있는 본청상황실이 보기에 목포서장이 그 시간대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으므로 현장에 복귀하여 지휘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지휘'를 하라고 지시한 것이 아니라 현장에 '복귀'하여 '지휘'하라고 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TRS 교신 쪽을 살펴보자. 목포서장의 목소리가 처음 등장하는 시각은 9시 59분경이다.

목포서장: 현장, 여기 서장.
123정장: 예, 여기 123. 말씀하십시오.
목포서장: 기울었으면 그 근처에 어선들도 많이 있고 하니까 그 배에서 뛰어내리라고 고함을 치거나 마이크를 이용해서 뛰어내리라고 하면 안 되나? 반대방향으로?


위 교신의 내용적 타당성을 평가하기 이전에 9시 59분경에 이르러서야 처음 목포서장의 목소리가 등장한다는 것을 먼저 검토할 필요가 있다. 9시 3분에 최초 인지를 하였다는 사람이 지금까지 등장하지 않다가 9시 59분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TRS 교신을 한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무엇을 한 것일까? 참고로 당시 목포서장이 타고 있던 3009함은 단 한 번도 세월호와 교신하지 않았다.

내용도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하다. 목포서장이 9시 59분에 한 이야기는 고함을 치거나 마이크를 이용해서 반대방향으로 뛰어내리라고 하면 안 되냐는 질문이었다. 이는 얼핏 보면 타당한 이야기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TRS에서 있었던 교신들을 살펴보면 위 질문은 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9시 48분경> TRS
123정장: 여기는 123. 현재 배가 잠시 후에 곧 침몰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
123정장: 현재 승객이 절반 이상이 지금 안에 갇혀서 못 나온답니다. 빨리 122구조대가 와서 구조해야 될 것 같습니다.


<9시 54분경> TRS
123정장: 현재 여객선 상태, 좌현이 지금 완전히 침수됐습니다. 완전히 침수돼가지고 현재 좌현 쪽에서는 구조할 수 없고, 현재 상태로 봐서 항공, 헬기로만 구조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상


현장에 나가 있는 123정장이 9시 48분경에 곧 침몰할 것 같다고, 잠수를 통한 구조를 전문으로 하는 122구조대가 와서 갇혀 있는 승객들을 구조해야 될 것 같다고 보고하였다. 9시 54분경에는 좌현은 완전히 침수되어서 항공 구조만 가능할 것 같다고 보고하였다.

09:54:27경의 세월호. 좌현이 완전히 물에 잠겨 있다.
 09:54:27경의 세월호. 좌현이 완전히 물에 잠겨 있다.
ⓒ 해경 채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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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현이 완전히 침수되었다는 것은 선박이 완전히 왼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승객들의 이동은 극도로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보고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9시 59분경에 마이크를 이용하거나 고함을 쳐서 반대방향으로 뛰어내리라고 하면 안 되냐고 제안하는 것은 이 사람이 지금까지 TRS를 계속 듣고 있었는지를 의심하도록 만든다.

[둘] 서해지방해양경찰청장

다음은 서해지방해양경찰청장(아래 서해청장)의 차례이다. 본인의 진술에 따르면 서해청장은 참사 당일 오전 07시 50분경 서해청으로 출근을 하였고 청장실에서 09시 02분경 세월호 소식을 보고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09시 05분경 상황실에 임장하였고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리다가 11시 30분경 팽목항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진술 역시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다. 우선 서해청장 역시 앞서 목포서장처럼 문자상황방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본청상황실님의 대화(오전 9:34): 서해청장 현장 지휘 바람

본청상황실이 보기에 서해청장 역시 앞서 본 목포서장처럼 별다른 지휘를 하지 않고 있으므로 현장을 지휘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문자상황방 다음으로는 서해청 경비안전과장의 검찰 진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해청 경비안전과장은 참사 당시 서해청장의 자리와 2.5m 떨어진 곳에 있으면서 서해청장에게 보고를 올리고 지시를 받는 역할을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문: 사고 접수부터 4.16. 24:00까지 서해청 시차별 주요조치사항 중 상황실 책임관이면서 광역구조본부장인 서해청장이 조치한 사항이 있는가요.
답: 답변드리기 곤란합니다.
문: 진술인의 진술을 보면 사고 접수부터 4.16. 24:00까지 상황실 책임자인 서해청장은 세월호 사고와 관련하여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어떠한가요.
답: (작은 목소리로) 잘 모르겠습니다.
문: 세월호 사고 당시 서해청장은 상황실에서 무엇을 하였는가요.
답: 상황보고를 받으신 것은 알고 있는데 무엇을 하셨는지는 상세히는 모르겠습니다.
문: 서해청장은 TRS를 직접 교신하였는가요.
답: TRS는 서해청장님도 가지고 계신데 교신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문: 서해청장이 상황실에 임장한 09:05경부터 11:30분까지 TRS로 교신한 사실이 있는가요.
답: 보지 못해 정확히 말씀드리기 힘듭니다.
문: 서해청장이 상황실에 임장한 09:05경부터 11:30분까지 TRS로 교신하지 않고, 상황 조치도 하지 않았다면 서해청장은 상황실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답: 답변드리기 곤란합니다. 


서해청장과 지근거리에서 보고를 올리고 지시를 받는 역할을 했던 사람에게 서해청장이 어떠한 조치를 취했는지, 어떠한 교신을 하였는지를 물어보았는데 전혀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서해청장은 참사 당시 서해청 건물 안에 있기는 했던 것일까? 아니면 어디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일까? 그는 당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셋] 해양경찰서장

다음은 해경의 최고 우두머리 해양경찰청장(아래 해경청장)의 차례이다. 해경청장의 진술에 따르면 참사 당일 8시경 출근을 하였고, 9시 5분경 세월호에 대한 최초 상황보고를 들었으며 9시 10분경 해경 청사 5층에 있던 집무실에서 6층에 있는 상황실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9시 10분경 중앙구조본부를 편성하고 이후 상황실 옆에 붙어 있는 위기관리회의실에서 상황보고를 하고 지시를 했다고 한다. 다음 표는 해경청장이 국회 국정조사 때 국회에 제출한 자신의 동선이다.

다음 표는 해경청장이 국회 국정조사 때 국회에 제출한 자신의 동선이다.
 다음 표는 해경청장이 국회 국정조사 때 국회에 제출한 자신의 동선이다.
ⓒ 세월호 팩트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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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이야기 역시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우선 해경 유선전화 내역을 보면 해경청장이 상황실로 올라간 것은 9시 10분이 아니라 9시 28분이다.

해경 유선전화 내역을 보면 해경청장이 상황실로 올라간 것은 9시 10분이 아니라 9시 28분이다.
 해경 유선전화 내역을 보면 해경청장이 상황실로 올라간 것은 9시 10분이 아니라 9시 28분이다.
ⓒ 세월호 팩트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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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경 유선전화 내역을 보면 9시 28분에 해경청장이 상황실로 올라간 것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9시 10분에 중앙구조본부를 편성했다는 것을 비롯하여 9시 28분 이전에 자신이 했다는 지시 모두가 정말 존재했던 것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저 유명한 10시 30분 대통령과의 통화 문제가 있다. 박근혜 측도 해경청장 측도 모두 10시 30분에 서로 통화를 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통화가 실제로 존재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우선 해경청장의 동선에서 10시 30분은 해경 청사에서 영종도 헬기장으로 이동하는 차안에 있는 시간이다. 해경청장의 진술에 따르면 10시 25분경 위기관리실에서 나왔고, 자동차를 타고 해양경찰청 정문을 통과한 시간이 10시 29분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10시 30분은 그 1분 뒤인데 헬기 타러 가는 차 안에 있는 해경청장과 대통령이 통화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통령이 해경청장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2014년 7월 10일 국회 국정조사 기관보고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 김광진 위원: 대통령께서 직접 본인 전화로 그냥 전화를 하신 겁니까?
○ 국가안보실제1차장 김규현: 저희는 그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전화가 연결됐는지는 제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
○ 김현 위원: 해경청장한테 직접 전화를 하셨다고요?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을까요?
○ 대통령비서실장 김기춘: 뭐 저는 알지 못합니다.


대통령이 해경청장 핸드폰 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또는 본인이 직접 전화를 한 것인지 아니면 보좌진이 대신 전화를 걸어준 것인지 등 이 통화와 관련하여 확인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해경청장이 직접 밝힌 내용을 보아도 "VIP 지시사항 전국 특공대 구조대 투입 지시수신(10:30경)"으로 되어 있는데, '지시수신'이라고 표현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 해경청장이 대통령과 통화를 하였다면 통화를 했다고 적시하지 그냥 지시수신이라고 표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10시 30분에 대통령과 해경청장이 통화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셋] 대통령

지금까지 박근혜 청와대에서는 수차례 참사 당시 대통령의 행적을 발표하였다. 2014년 국정조사 때, 2014년 국정감사 때, 녹색당의 정보공개 소송 과정에서, 태블릿 PC가 발견된 이후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마지막으로 헌재 탄핵 심판 과정에서 대통령이 수많은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린 것처럼 주장을 했지만, 단 한 번도 근거를 제시한 적은 없다.  

통화기록이라도 제출하면 적어도 그 통화가 있었다는 것은 믿어줄 수도 있는데, 통화기록 하나 제출한 적이 없다. 서면 보고를 수차례 받았다고 하는데 그 서면 자체를 공개한 적도 없고 문서 수발신 내역조차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참사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근혜의 행적과 관련하여 우리가 아는 유일한 것은 오후 5시 15분에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에 나타났다는 것, 그리고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뿐이다.

"다 그렇게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 지금요."

그리고 우리가 한 가지 더 아는 것이 있다면 대통령은 그 중대본에서 일정을 마치고 청와대로 돌아가서도 회의 한 번 열지 않았다는 것이다. 4월 16일뿐만 아니라 4월 16일부터 20일까지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은폐하고 조작한 내용을 밝혀내야 한다

지금까지 내용을 정리해 보자. 목포서장은 3009함에 있었던 것은 확인되지만 그가 어떠한 행위를 하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서해청장은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하였는지 전체적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해경청장은 적어도 9시 28분 이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끝으로 대통령은 하루 종일 어디서 무엇을 하였는지 제대로 확인되지 않는다.

목포서장에서부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세월호 참사에 막중한 책임을 갖는 존재들의 행적을 일제히 모르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절대로 모를 수 없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어떤 강력한 힘이 진실을 은폐하고 있는 것이라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힘은 지금도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은 일부 기구나 전문가들에 의해 이루어지기는 힘들다. 최소한의 진실이라도 발견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강력한 힘이 있어야 한다. 사회적 참사법에 의해 새롭게 건설될 특별조사위원회는 오직 국민의 힘과 함께 나아갈 때에만 소기의 성과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태그:#세월호, #팩트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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