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윤석

영화 <1987>로 김윤석은 다시 한 번 강력한 악역에 도전했다. 기존 작품과 차이라면 이번엔 실존했던 현대사 인물이라는 점. ⓒ CJ엔터테인먼트


영화 <1987> 속 박처장이 된 김윤석은 곤혹스러웠다. 단순한 악역을 넘어 실제로 존재했던 우리 사회 악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다는 장준환 감독의 제안을 받았을 때 김윤석은 함께 고민했고, 기꺼이 그 역을 맡기로 했다. "제가 이 역을 맡아야 촬영이 시작될 것 같았다"며 지난 언론시사회 직후 그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그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인터뷰는 지난 15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됐다.

<1987> 인터뷰 중 김윤석은 눈물을 흘렸다. 장준환 감독이 언론 시사 때 격하게 운 것과 같은 이유였다.

"올해 1월 17일 광복동에서 동문들이 주최한 행사가 있었다. 제 고등학교 2년, 3년 선배들이기도 하다. 박종철 열사가 그때 그 모습으로 남아 있는 걸 봤다. 제가 이제 50대잖나. 당시 대학생이었고, 연극만 하던 때였다. 시위? 당시에 참여 안 해본 대학생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 한 번씩은 나간 게 그때 시위였지. 

다만, 50대를 맞아 난 가족이 생겼는데 그 두 열사는 멈춰 있잖나. (박종철, 이한열 열사가) 그 때 무엇을 알았겠는가. 갓 성인이 됐고, 술을 합법적으로 먹을 수 있는 나이고, 세상을 알고 싶었으며 모든 게 벅차올랐을 때 아닌가. 그때 자신의 삶이 (고문과 최루탄으로) 마감된 것 아닌가."

 영화 <1987>의 한 장면.

영화 속 박 처장은 평안도 말투를 쓰며 부하들을 시종일관 강력하게 쥐고 흔드는 인물. ⓒ CJ엔터테인먼트



정리되지 않은 역사

올해로 30주년이다. 민중을 억압하고 거기에 발맞춰 온갖 폭력을 일삼았던 권력의 하수인들 상당수가 법의 심판을 받았다지만 여전히 일부는 사회 곳곳에 남아 자신들을 합리화 하거나 피해자들을 조롱하곤 한다. 아직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역사에 김윤석이 극영화로 대공수사처 수장을 맡는다는 건 누군가에겐 아픈 기억을 상기시키는 일일 수 있었다.

"유족 분들에게 먼저 말씀드렸다.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형님과 누님께 허락을 구했지. '지독한 악역을 할 겁니다. 그래야 이 영화가 만들어 질 수 있습니다' 이 말에 오히려 형님은 날 걱정하시더라. 지난 시사회 때 오셔서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박처장은 개인의 악역이 아닌 시대의 악역이다. 이 한 사람을 통해 당시 권력자들의 모습을 표현하려 했다. 부하들을 기만하면서 당근과 채찍을 주는 인물이다. 다 거짓말이잖나. 자기가 다 책임질 테니 따르라고. 근데 이게 은연중에 세뇌하는 게 있다. 연기하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이다.

이 역할에 사실 감독님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영리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강력한 안타고니스트(극에서 악역을 말함)를 넣고 대결하게 하는 게 좋은 선택이었다. 그를 빼면 긴장감이 생기지 않거든. 흔쾌히 이 한 몸 바치기로 했다. 면가 역(영화 <황해>에서 면정학을 뜻함-기자 주)도 했는데 뭘(웃음)"

이 작품을 하게 된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부채의식이 커 보였다. 김윤석은 인정했다. "그때 당시 대학생이었다면 마음의 빚이 다 있다"며 그는 "그 마음이 이 작품을 하게 된 동력 중 하나는 맞고 박종철 열사의 형님 말을 빌리면 '촛불정신이 6.10항쟁 때부터 나와 이어졌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고 말했다.

 배우 김윤석

ⓒ CJ엔터테인먼트



철저한 고증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선 제대로 알아야 했다. 김윤석은 "그 박처장(실제인물 이름은 박처원)에 대한 자료가 참 없었다"며 고증에 신경 썼던 부분을 언급했다.

"여러 경로를 통해 그 사람이 전두환에게 훈장 받는 장면 등을 군 쪽에 묻기도 했다. 딱 그 사람 장면만 편집됐더라. 당시 정권은 대공수사라는 것 자체를 남기고 싶지 않았던 거다. 약간 섬뜩했다. 여러 블로그를 뒤져 보니 인터뷰한 사진과 담배 피는 장면이 있더라. 거기에 <1987> 시나리오를 쓴 김경찬 작가가 본래 방송국 피디 출신이다. 이 분이 가진 자료들도 많이 참고했다. 

자료에 따르면 그는 평안도 출신이고 1950년대에 혈혈단신 월남했다. 화가 나면 이북 말을 쓰는데 아랫사람들이 무슨 뜻인지 못 알아먹어서 더 무서워했다고 한다. 굉장히 거구였고, 인텔리였다. 사진 상 하관이 두드러져서 나도 마우스피스를 끼고 연기했다. 권력지향적인 이미지를 살리려고. 대사하기가 어려워서 따로 연습을 많이 했어야 했다."

자신이 맡은 캐릭터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면서 김윤석은 "다시는 나와서는 안 될 인간"이라 잘라 말했다. 혹여나 연기하면서 인간적으로 이해된 것은 없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그는 "조직의 리더로서 최소한의 개똥철학 같은 의리는 지키려 한 모습이 있는데 그건 인간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일말의 모습"이라며 "그것마저 없으면 인간이 아닌 괴물이었을 것"이라 표현했다.

"근데 난 감독님께 그런 행동 또한 거짓말 같다고 얘기했다. 마치 무슨 신념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신념이라는 건 권력에 빌붙을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은 그걸 신념과 조직을 위한 명분이라고 왜곡시킨 거지. 그는 자신의 조직을 유지하려 갖은 애를 쓰지만 결국 외부에서부터 갈등이 일어난다. 국민들에 의해서."

 배우 김윤석

"박 처장은 개인의 악역이 아닌 시대의 악역이다. 이 한 사람을 통해 당시 권력자들의 모습을 표현하려 했다. " ⓒ CJ엔터테인먼트


<1987>에 대한 지적

김윤석이 가장 우려한 건 이야기의 설득력이었다. 실존 인물들을 통해 실제 역사를 어떻게 지금 관객에게 가장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이 고민을 하면서 그는 가장 강력한 악역을 자처한 셈이다. 여기엔 장준환 감독의 뚝심이 한 몫 했다. <지구를 지켜라> 등 가상의 이야기를 자신만의 감성으로 전달하던 그가 아픈 역사 이야기를 영화화 한다? 김윤석은 "그 감수성 예민한 사람이 자신의 청년 시절을 다 기억하고 있더라"며 마음이 동했던 사연을 전했다.

"초고 이후 정리한 시나리오가 제법 잘 나왔다. 감독님이 그걸 하정우씨에게 보냈다더라. 그래서 제가 정우씨에게 전화했다. '형, 하실 거예요? 형이 하면 저도 할게요' 정우가 묻더라. 바로 막걸리 집에서 만나서 얘기하다가 감독님도 불렀고, 그러다 강동원도 부르자는 말이 나와 지금의 조합이 된 거다.

장준환 감독님은 사람 마음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다. 또 자신이 하는 이야기가 결국 무엇에서 출발했는지 놓치지 않는다. 제가 아는 가장 순수하면서도 섬세한 감독이다. 저 역시 나이가 들수록 순수해져야겠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한다. 살면서 비겁해지지 않을 수 있으려면 순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 여러 감정들이 들어도 툭툭 쳐내고 그러는데 순수하게 많은 것에 대해 성의 있게 느껴야 한다. 이걸 못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 좁고 고립된 시각을 갖더라. 위험하고 무서운 일이다."

이런 이유로 일각에서 제기된 <1987>에 대한 비판, 즉 특정 세대의 회고록 내진 계몽적 이야기라는 평에 김윤석은 "그런 시각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답했다. "100명이 보고 100명이 모두 좋다고 할 수 없는 일"이라며 그는 "<레미제라블>이나 <쉰들러 리스트> 등도 다분히 계몽적이라 볼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북받쳐 감동받을 수도 있는 작품인데 그건 결국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라 답했다.

다만 그에게도 아쉬움은 있었다. "영화가 좀 더 일찍 6월에 개봉했으면 참 좋았을 것"이라며 그는 "유족들에게 그 시대를 살아온 분들에게 누가 되면 안 되기에 완성도를 고민하다 이렇게 시간이 지났는데 올해가 30주년인 만큼 올해라도 놓치지 않은 게 다행"이라 설명했다.

 배우 김윤석

ⓒ CJ엔터테인먼트


"박처장을 비롯해 그의 가족들이 (독재 정권 몰락 후) 다 이민을 갔더라. 역사에서 영원히 삭제된 삶을 살지 않았을까. 권력의 하수인이 이렇게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전두환 사진을 박처장이 바라보는 게 나오는데 속 시원하게 째려본 기억이 난다. 진실을 숨기다가 결국 터진 건데 아무리 누르고 억압해도 곧 진실은 밝혀진다고 본다. 물론 당시 언론과 시민들이 자기 역할을 해서 가능했다고 본다. 이런 것들을 영화로 묘사하려 했다.

지금의 언론? 일개 배우가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나. 다만 그때 시대가 '애들은 가라'였다면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지. 애들은 가지 않는다. 다 보고 생각한다. 은폐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지 않나. 바람이 있다면 언론은 시민들이 혜안을 가질 수 있게 도와달라는 것이다. 세상은 진보한다고 믿고 싶다. 그 힘이 바로 세상을 보는 혜안이라고 생각하거든."

해를 딱 4일 남기고 개봉하는 사실이 아쉬운지 김윤석은 "농담이 아니고 2018년에도 <1987>로 터뜨렸으면 좋겠다. 2017년이 너무 짧다"며 "그 정도는 돼야 이 영화에 참여한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솔직한 속내를 보였다. 동시에 그는 "아이들이 이제 아빠가 연기하는 사람인 걸 아는 나이라 이 영화를 같이 보면서 다 이야기 해 줄 것"이라 덧붙였다. 여러 모로 그에겐 의미 깊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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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석 1987 장준환 하정우 강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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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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