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얼마전 상견례가 있었다. 아들은 내가 야근을 하던 그제 밤에 집에 왔단다. 야근을 마치고 어제 아침 집에 들어서니 아들이 문을 열어주며 인사했다.

"12시 반이지?"
"네, 야근하시느라 힘드셨죠?"
"아녀, 사돈댁 뵐 생각에 마음이 부풀어서 벌써부터 가슴이 콩닥거리는구나."

잠시 눈을 붙인 뒤 일어나니 오전 11시가 다 되었다. 아내가 사다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맸다. 카디건과 양복에 이어 두툼한 아웃도어로 마무리를 하자니 아내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흑채 뿌려야 되니까 옷 도로 벗어!"
"앗, 깜박했다!"

참고로 '흑채'는 나처럼 머리카락이 없는 사람, 또는 머리숱이 없는 사람에게 유용한, 머리에 뿌리는 검은색 고체 가루형태의 물질이다. 가발보다는 간편하게 머리에 뿌리는 것만으로도 흰 모발까지를 감출 수 있어 요긴하다. 원래는 검은 유약을 바른 도자기란 뜻이었으나 제조업체에서 '검은 머리'라는 의미의 흑채(黑彩)로 이름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흑채는 작년 봄에 산 것이었다. 당시 딸의 결혼식을 앞두고 세월이 앗아간 내 머리칼의 복원(?) 차원에서 구입한 것이다. 하지만 동서형님께서 만류하는 바람에 사용의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자칫 땀이라도 흘려 흑채가 까맣게 흘러내리는 따위의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어쩔 껴?" "듣고 보니 그렇네유."

그랬다. 금지옥엽 딸을 시집 보내노라니 어찌나 긴장되던지. 그래서 예식 내내 땀은 흡사 오뉴월처럼 줄줄 흘러내렸지 않았던가! 뿐이던가. 참았던 눈물마저 아내가 먼저 터뜨리는 바람에 부화뇌동으로 나 역시 눈물의 둑이 그예 터지고야 말았으니까. 따라서 당일 흑채를 뿌리고 예식장에 갔더라면 필시 까만 물이 줄줄 흘러내려 가관이 따로 없었을 거다.

여하간 아내는 옷을 벗고 목욕탕에 들어가 구부리고 앉은 나의 머리에 흑채를 분사하기 시작했다. 오전 11시 30분을 넘기면서는 아내와 아들 역시 옷치장과 얼굴의 화장에 바빴다. 집을 나선 건 정오 무렵.

아들의 차에 올라 상견례 장소로 예약한 한정식 집을 향해 출발했다. 도중에 차에서 내린 나는 전국적으로 소문난 은행동의 명불허전 빵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튀김소보루 세트 등 두 상자의 빵을 샀다. 멀리서 오시는 사돈댁이 돌아가실 때 드릴 선물이었다. 한정식 집에 들어가 잠시 앉아 있노라니 아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사돈댁께서 들어서셨다.

"어서 오십시오! 처음 뵙겠습니다. 날도 추운데 멀리서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반갑습니다! 이처럼 환대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이른바 '코스요리'가 속속 식탁에 오르기 시작했다. 종내 참으려 했으나 이처럼 좋은 날에 술이 빠져선 안 되겠다 싶었다.

"소주 한 병만 부탁합니다."

며느릿감의 부친께선 건강 상 절주(節酒) 중이라고 하셨기에 혼자만 마셨다. 술김을 빌려 작심했던 얘기를 끄집어냈다.

"딸을 결혼시킬 적에도 그랬지만 저흰 예단을 단 하나조차 안 주고 안 받고자 합니다. 저처럼 보기만 해도 꽃보다 고운 따님을 저희에게 며느리로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거늘 거기에 예단이라는 경제적 부담까지 드려선 안 되겠다는 게 우리 부부의 어떤 신념입니다!"

아내도 거들고 나섰다.

"그래서 사돈댁의 의중을 듣고 싶습니다."

사돈댁 역시도 좋다며 흔쾌히 동의했다. 덕분에 기분이 더욱 낭창낭창해진 나는 거푸 술잔을 비웠다. 이윽고 다슬기 아욱 된장국이 나왔다. 내가 사는 이곳 대전에선 '올갱이'로 불리는 다슬기는 동의보감에서도 간과 숙취해소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다. 큰 그릇에 담겨져 나온 다슬기 된장국을 아내가 작은 그릇에 국자로 퍼서 각자의 식탁 앞에 놓았다.

내 앞에도 놓인 그 국을 떠먹으려 고개를 숙이는 순간, 아차차~ 그만 '흑채의 반란'이 벌어졌다! 긴장했던 바람에 그예 땀이 흘러내렸고 그 땀은 혈혈단신이 아닌 '동맹'의 그것을 이루면서 검은 알갱이의 흑채까지 국 안에 퐁당~ 빠뜨렸던 것이었다.

'아, 결국 니들도 날 배신하는구나!'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그 사달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나뿐이었다. 따라서 안 먹으면 그뿐이었다.

"당신도 좋아하는 올갱이국을 왜 안 먹어?"

아내의 지적에 뜬금없는 궤변을 동원해야 했다.

"아, 저 그게 ... 음식을 다양하게 많이 먹은 데다가 술까지 마시니 배가 불러서 당최."

이윽고 상견례는 화기애애하게 잘 끝났다. 집에 돌아왔으나 풍선처럼 팽창된 기분은 좀처럼 진정이 안 되었다. 하여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 더 마시고야 까무룩 잠에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흑채의 반란'은 계속되었다. 자고 일어나니 베개까지 까맣게 염색이 돼 있었으니까.

덧붙이는 글 | 없음



태그:#상견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 저서: [초경서반]&[사자성어는 인생 플랫폼]&[사자성어를 알면 성공이 보인다]&[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 대전자원봉사센터 기자단 단장 ▣ 月刊 [청풍] 편집위원 ▣ 대전시청 명예기자 ▣ [중도일보] 칼럼니스트 ▣ 한국해외문화협회 감사 / ▣ 한남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CEO) 수강 중

이 기자의 최신기사[사진] 단오엔 역시 씨름이죠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