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브레터> 포스터 및 스틸 이미지.

ⓒ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이 예쁜 겨울, 서울극장에서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가 재개봉을 했다. 2013년 재개봉과 2016년에 이어 벌써 세 번째 재개봉이다.

1999년 처음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참 많은 논란이 있었다. <러브레터>는 말 많던 일본 대중문화 전면 개방 이후 두 번째 상영작이다. 한국 영화의 발전에 저해가 된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도 그 당시 이 영화 개봉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지금 재개봉에도 꼭 우호적인 목소리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오래전 영화를 두 번씩이나 극장에서 상영하는 것을 '추억팔이'가 아니냐고 비난할지 모른다. 그런 지적에도 경청할 데가 있을 것이다. 젊은 영화인들이 땀 흘려 만든 수많은 영화가 지금도 상영할 곳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좀 더 젊은 시절이었다면 최초 개봉 시의 우려든, 아니면 재개봉의 비판이든 간에 치열한 담론 속에 '무엇이 맞다', '무엇이 옳다'는 답을 내는 걸 더 선호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위 세파(?)라는 것에 부딪히며 오히려 심경이 '센티멘탈'해진 이 나이에, '뻔한 상술'이라며 이 영화의 재개봉을 비판하기에 나도 좀 지쳤는지도 모른다. 나는 일단 이 영화의 재개봉이 반갑다.

이 영화가 개봉했던 1999년은 말 그대로 세기말이자 밀레니엄의 끝이었다. 지금 대학생들은 들어보지도 못했을 Y2K 바이러스에 대한 괴담이 횡행했고, 21세기를 예측하는 서적이 잘 팔리던 그런 시대였다. 그때 어떤 교수는 미래에는 영화관이 사라질 것이라는 대담한 예측을 했다. 인터넷의 발달로 영화 파일을 수초 내로 내려받고, 집에서 컴퓨터나 안방극장으로 관람하는 시대에 영화관은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 그 교수 주장의 논지였다.

실제로 우리는 그런 기술이 발전된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영화관은 사라지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아직 설렘이 남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같은 공간에서, 같은 영상을 보며, 장소와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우리 부모님이나 내 세대에게도, 그리고 더 젊은 세대들에게도 여전히 행복한 일일 테니까 말이다. 지금도 4차 산업 혁명이라는 표어 아래, 수많은 예측이 있다만 그런 클래식한 아름다움을 지닌 극장이라는 공간은 존속하기를 바란다.

그 시절 기다림과 기억을 복기하고 싶어, 재개봉한 <러브레터>를 관람했다.

오래 전 필름이라 더 아름다운 영화 

 영화 <러브레터> 포스터 및 스틸 이미지.

ⓒ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일본의 '홋카이도'와 '고베'이다. 롱 테이크로 촬영한 홋카이도의 설경은 대단히 아름답다. 넓은 들판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하얀 눈과 대조적으로 햇살 가득한 청명한 하늘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탁 트인다.

반면 주인공의 소소한 이야기가 진행되는 고베는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있다. 낡은 교실과 고전적인 졸업앨범 그리고 촌스러운 교복. 따스한 햇볕과 낙엽이 들어오는 학교 도서관에는 예쁘게 쓰인 손 글씨와 풋풋한 십 대 남녀의 사랑이 있다.

정사 장면은 물론이고, 흔한 남녀 주인공의 키스 신 하나 없다. 똑같은 이름(후지이 이츠키)을 가진 남녀 주인공. 영화 내에서 그들이 상대에게 직접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는 장면은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감독은 그들의 미묘한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그 유명한 커튼 뒤의 이츠키(男)가 사라지는 장면이나, 이츠키(女)가 이츠키(男)가 좋다는 여자 동기에게 이츠키(男)을 소개시켜 주며 퉁퉁거리며 쓸데없이 성질을 부리는 장면, 멀찍이서 이츠키(男)를 바라보다 모른 체하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 전학을 간 이츠키(男)의 책상에 올려진 국화 병을 부수어 버리는 장면을 보면 등등. 순수하지만 그래서 더 미숙한, 그 감정을 드러내는 표현 방식은, 누구에게나 있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를 다시 봐야만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장면도 있다. 그것은 영화 초반부, 와타나베 히로코가 눈 속에서 숨을 멈춘 채로 참다가 다시 숨을 쉬는 장면이다. 설원에서 조난해 죽은 그녀의 남자친구 이츠키(男)의 마지막을 생각하며, 자신도 그 순간을 느껴보고자 애쓰는 것이다.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는 이런 장면이 있었던 것도 알지 못했는데, 다시 영화를 보니 그녀가 죽은 남자 친구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이런 것이 재개봉의 묘미겠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영화 <러브레터> 포스터 및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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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과거로 돌아가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바로 그 시절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듣는 것이라고 한다. 그 시절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보는 것도 한 방법은 아닐까? 타임머신이 개발되는 걸 기다리는 건 너무 막연하니 말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던 게 거진 20년 전이라니. 그 시절의 내게, 20년 후 미래는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어느새 지독한 현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당시의 나는, 나이가 들어 후회나 그리움 같은 것을 남겨두지 않는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했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젊은 날의 객기였던 것 같다.

이 영화를 관람했던 그 시간이 그립다. 지금 어딘가에서 혼자서든 아니면 누군가의 배우자나 엄마로든 간에 틀림없이 잘살고 있을, 그때 영화를 함께 보았던 그녀도 그립지만, 그뿐만 아니라 그 시절과 그 시절 전부가 말이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이름을 적고자 빌린 책의 이름이 떠오른다. 바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추억은 추억이기에 아름다운 것일지 모른다. 어쩌면 영화 <러브레터>의 주제 중 하나는 그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한눈에 반했다던 죽은 그 남자 친구가, 실은 십 대 시절 자신과 꼭 닮은 동급생 때문에 자신을 사랑했다는 것은, 그녀의 말 마냥 용서할 수 없는 상처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립지만,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사람들과 다시 연락해볼 용기는 없다. 변해버린 현실을 직면할 용기는 없으니까.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래도 위안은 되지만, 결국 다시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는 점에서, 오래전 이별이란 영화 속 여주인공이 겪는 것처럼 죽음과 동일한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장 좋은 방법은, 영화 <러브레터>에 나오는 것처럼 회신받을 수 없는 주소에 편지라도 써보는 것 아닐까.

과거의 시간이 주는 가치는 변함이 없을 것으로 믿는다. 어쨌든, 그때 함께 했던 시간은 줄지도 늘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또 지금 순간을 꿋꿋이 살아내는 것이 자기 자신과 과거의 추억에 대한 예의겠지. 그래도 현실을 잠깐 잊고 과거의 시간을 여행하게 해준 이 영화의 재개봉에 깊은 감사를 표한다.

"お元?ですか、私は元?です!(잘 지내고 있나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그 시절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여러분들 모두 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냅니다. 모두 잘 지냅시다.

러브레터 이와이 슌지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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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투자자, 소설가, 아마추어 기자. "삶은 지식과 경험의 보고(寶庫)이자 향연이다. 그러므로 나 풍류판관 페트로니우스가 다음처럼 말하노라." - 사티리콘 中 blog.naver.com/admljy19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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