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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접시가 내려앉기라도 한 건가? 불빛이 사정없이 창문에 내리꽂힌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한참 잠에 빠져있던 나는 놀라 벌떡 일어났다.

내일 모레면 베트남으로 가는데, 가기 전에 그곳 풍물이라도 구경할까 하고 텔레비전에서 지나간 여행 프로그램을 찾아봤다. 베트남을 다룬 것도 있었지만 모두 내가 생각하는 여행과는 달라서 얼마 보다가 그만둬 버렸다. 내가 그리는 여행은 한 곳에 머물러 살아보는 것이다. 후딱 훑고 오는 게 아니라 천천히 둘러보고 싶다. 그러자면 오래 머물러야 한다.

산책하듯 하는 여행

시간 여유가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은 장기 여행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잠시 짬을 내어 외국여행을 왔는데, 한 곳이라도 더 보고 싶은 게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휘뚜루마뚜루 훑고 다니는 여행담들이 인터넷에는 많았다. 안 그래도 바쁘게 사는데 여행까지 와서 그렇게 휘둘릴 것이 있단 말인가. 많이 안 봐도 괜찮고 맛있는 것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된다. 그저 산책하듯이 놀고 싶다.

강화도의 겨울은 춥다. 10월에 입었던 내복을 이듬 해 4월께에야 벗을 정도로 겨울이 길다.
 강화도의 겨울은 춥다. 10월에 입었던 내복을 이듬 해 4월께에야 벗을 정도로 겨울이 길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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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내 바람은 남편의 퇴직과 함께 찾아왔다. 33년간이나 아침에 출근, 저녁에 퇴근하는 남편의 리듬에 맞춰 살았다. 이제는 우리 둘 다 느긋하게 아침을 보낼 수 있다. 성실하게 살았으니 우리에겐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는 자찬을 하며 우리는 여행 계획을 짰다. 

여행 프로그램에서는 주로 젊은 층들을 위한 이야기들을 보여주었다. 우리처럼 나이 든 사람들, 현역에서 퇴직한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는 왜 없는 걸까? 유행에 조금은 둔감하고 감각도 그리 세련되지 못해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걸까. 컬러풀한 의상을 입어야 화면이 예쁠 텐데 우리는 그렇지 못해서 텔레비전에서 잡아주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겐 시간도 있고 생활의 여유 역시 조금은 있다. 일하느라 놀아보지 않아서 잘 놀 줄은 모르지만 우리에게도 신명이 있고 호기심 또한 많다. 자리만 깔아주면 잘 놀 자신도 있다. 다리에 힘 빠지기 전에 실컷 하고 싶은 것 다 해보고 싶다. 그중에 여행은 1순위이자 0순위인데, 해보지 않아서 주저하고 있을 뿐이다.

다리에 힘이 있을 때 떠나자

"형님, 형님~"

밖에서 남편을 부른다. 자동차의 헤드 라이터 불빛을 비췄는데도 아무 기척이 없자 큰 소리로 불러대기까지 한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전화벨까지 요란하게 울린다. 새벽 4시도 채 안 된 시각, 무슨 일로 재영 아빠가 왔을까. 놀라 일어난 남편은 겉옷을 하나 급하게 걸쳐 입고는 마당으로 나가 재영 아빠를 맞았다.

가진 것 다 놔두고 달랑 배낭 두 개만 메고 갔다.
 가진 것 다 놔두고 달랑 배낭 두 개만 메고 갔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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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으로 가는 비행기는 이른 아침에 있었다. 돈을 좀 아껴보자는 마음에 저가항공을 선택했더니 그런 불편이 따라왔다. 공항에서 거쳐야 할 여러 수속 등을 생각한다면 새벽 4시 이전에는 집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서 재영 아빠에게 공항까지 좀 태워다줄 것을 부탁했다. 그 시간에는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할 수도 없고, 우리 차를 가지고 간다 해도 두 달간 둘 곳이 마땅찮다. 걱정하는 우리에게 재영 아빠가 흔쾌히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도시에서 살다 강화도로 이사를 왔고, 한 지역에서 오래 근무하다 보니 어지간한 사람은 다 알고 지낸다. 대부분이 학부모와 교사로 관계로 맺어졌지만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변한 관계도 많다. 남편이 정을 주고받으며 산 덕분이다.

일요일 신새벽의 해프닝

우리가 출발할 요일은 월요일의 이른 아침이었다. 일요일 밤을 지나 월요일 새벽 4시께에 태우러 와주면 되는데 재영 아빠가 착각을 한 것이다. 일요일 새벽 4시에 왔으니 그 난리를 칠 수밖에. 출발 시각이 한낮이나 저녁이면 혼동을 할 일이 없는데 새벽이었으니, 애매했을 것이다. 월요일에 출발한다고 재차 삼차 말했는데도 혼동을 한 것이다.

일요일 신새벽의 해프닝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요일 오후에 재영 아빠에게 갑자기 일이 생겼다. 그래서 월요일 새벽에 우리를 태워다 줄 수 없게 되었다.

달랏의 오늘 최저기온은 19도, 최고기온은 27도. 겨울을 보내기에 이만한 곳이 또 있을까 싶다.
 달랏의 오늘 최저기온은 19도, 최고기온은 27도. 겨울을 보내기에 이만한 곳이 또 있을까 싶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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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영이가 군대에 가게 된 것이다. 내도록 가만 있다가 입대일 하루 전에야 부모님에게 알렸으니, 재영 아빠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재영이 나름으로는 스스로 자기 앞가림을 한다 싶어 알리지 않았겠지만, 유난히 아들을 사랑하는 재영 아빠로서는 모든 일정을 접고 아들에게 집중해야 할 판이었다. 월요일 오전 아홉 시까지 강원도에 있는 입소장까지 재영이를 태워다 줘야 했다. 우리가 출발할 날과 겹친 것이다.

무사히 월남(越南)에 안착하다

그래서 택시를 예약했다. 처음부터 택시를 예약했다면 이런 해프닝이 없었을 텐데, 서로 돕고 또 도움을 받는 관계가 어떤 때는 더 일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출발일인 월요일 새벽, 혹시라도 못 일어날까 봐 알람을 세 개나 해두고 잤다.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이 저절로 눈이 떠졌다. 뜨끈한 국물이라도 한 모금 할까 싶어 라면을 끓였는데, 미처 한 술도 뜨기 전에 택시가 왔다. 약속한 시각보다 이십 분이나 일찍 온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우리는 비행기를 탔다. 얼음이 얼고 영하의 기온을 자랑하는 우리나라를 떠나 따뜻한 남쪽 나라로 날아갔다.

호찌민공항에 도착하니 베트남 시각으로 오전 10시 30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훅하고 열기가 몰려왔다. 한국에서는 눈이 오고 얼음도 얼었는데, 여기 베트남 호찌민은 기온이 섭씨 30도였다. 여러 겹 겹쳐입고 온 얇은 가을옷들을 하나씩 벗는 것으로 베트남, 즉 월남(越南) 안착을 스스로에게 알렸다.


태그:#베트남여행, #달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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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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