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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가을의 어느 날이었나 보다. 아빠는 코즈웨이 베이의 복잡한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서 동료들과 아침 인사를 나누고 있었지. 그때 한 친구가 놀란 눈으로 내게 다가와 말했어.

"YJ, did you know North Korea missile test today? Are you all right?(YJ, 오늘 북한이 미사일 실험한 거 알아? 너 괜찮아?)"

밤사이 있었던 북한의 미사일 발사 소식을 들은 동료가 휘둥그레한 눈으로 내게 말했지. 북한이 미사일을 쏘았다는 소식이 이렇게 놀라운 일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었어. 그러면서 반대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아빠는 왜 아무렇지도 않을 걸까?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나라에서 태어난 운명답게 이젠 그런 위기와 함께 살아가는 게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것이었을까? 아니면 진짜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세대여서 그런 걸까?

거제 포로소용소 전시관 사진
▲ 북한 잠수정 거제 포로소용소 전시관 사진
ⓒ 허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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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에게는 북한에 대한 2가지 강렬한 기억이 있단다. 첫 번째는 아빠가 군대에 있을 때였어. 이등병에서 막 일병이 되던 때쯤이었던 것 같구나. 더웠던 여름이었는데, 부대에 비상이 걸리고 실탄이 지급되기 시작했어. 강릉으로 무장공비가 넘어왔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지.

사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이제 무장공비라는 표현은 꽤 사용되지 않은 지 제법 된 터라, 그 사실이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어. 하지만 잡지 못한 공비들에 의해서 죽은 군인들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어. 결국 열 명이 넘는 공비가 사살되었지만, 끝내 한 사람을 잡지 못했어.

반대로 우리나라 군인들도 십 수명이 죽고 수십 명이 다쳤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실탄을 받고 매복작전에 투입되었던 첫날의 두려움이 아직도 기억이 나는구나. 평소에 그렇게 용기 있어 보이던 고참들도 모두 약간의 공포에 떨고 있었지. 고참이라고 해봐야 지금 돌이켜 보면 스물 두어 살 되는 청년들이었으니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끝내 잡지 못한 한 사람 때문에 매복작전에 지루하게 이어졌고, 시간이 흐르니 그 상황에 익숙해지면서 여유가 생겼던 기억이 난다.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도 동일한 상황이 반복되면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단다.

두 번째는 제대한 아빠가 한 방송국의 다큐멘터리에 우연히 출연했던 경험이란다. 중국으로 가서 두만강과 압록강 접경지대를 돌아보면서 2000년 밀레니엄을 맞는 북한과의 관계를 대학생의 시선으로 보는 기획 프로그램이지.

중국에 맞닿은 북한의 국경에 다다르기 직전 아빠도 모르게 휴전선 너머로 들리던 방송과 우리 쪽을 향한 대포, 그리고 서로 무표정으로 서서 아빠 쪽을 바라보던 북한 군인들 같은 풍경이 떠올랐지. 그런데 막상 코디네이터는 청계천보다 조금 넓은 냇가처럼 생긴 물을 가리키며 두만강이라고 하더구나. 휴전선도 없고, 심지어 그 물가에서 빨래하는 북한 아주머니도 보였지. 평화로운 풍경이었어.

지금은 경계병이나 철조망 같은 게 많이 쳐졌다고 하는데, 어떻게 북한 사람들이 탈북할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지(아빠도 쉽게 건널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렇게 아빠는 또 다른 북한을 보았던 것 같아.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러서 북한에 대해서 다른 계기로 생각하게 되었지.

내 아이가 15년 후에도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아빠는 걱정하는 동료들에게 '익숙한 상황이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둘 다 돌이킬 수 없다는 걸 북한과 우리 둘 다 알기에 최악의 상황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며 괜찮다고 말해주었어. 그건 어찌 보면 한반도에 태어난 자의 숙명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 숙명에는 스무 살 청춘의 2년이 넘는 시간을 군 복무라는 이름으로 나라에 봉사하는 것도 있을 테고, 더 크게는 네 아이들이 살아갈 이 땅에 더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어른으로서 기여해야 하는 부분도 있겠지.

홍콩 역사박물관 전시물
▲ 일본 지배 시기의 홍콩 홍콩 역사박물관 전시물
ⓒ 허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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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서 만난 다양한 아시안 동료들에게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유독 홍콩 친구들은 'Hongkongnese(홍콩사람)'라고 대답을 하곤 해. 비록 홍콩이 영국의 100년 지배를 끝내고 중국으로 다시 반환되었지만, 자신들은 중국인(Chinese)이 아니라는 정체성이지.

그들은 오랜 선진국의 지배 속에 더 나은 경제적 지위와 문화를 누리고 살았는데, 어느 날 '한 수 아래'라고 생각했던 중국 본토인들이 홍콩에 유입되고 많은 것에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한 거야. 그러면서 홍콩인이라는 정체성이 더욱 강해지는 듯한 분위기란다.

사실 홍콩은 남쪽 항구에 위치한 지역적 특성에 따라 영국이 들어오고, 아편전쟁이라는 명분 없는 전쟁으로 중국에서 항구 주변의 땅을 강탈당하면서 역사가 시작됐지. 아마 그 옛날 홍콩에 살았던 사람들은 아편전쟁, 일본의 점령 등으로 아픈 상처를 받았을 거야. 실제로 홍콩역사박물관에 가보면 그 시대의 역사가 잘 기록되어 있단다. 그 시기들을 거쳐서 동북아시아 최고의 거점 도시가 되었지. '나는 홍콩인'이라고 대답하는 동료들이 홍콩의 모든 역사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 거야. 그저 그들이 그 땅에 살면서 벌어지는 일들에 반응했을 뿐이었겠지.

무장공비 침투사건처럼, 한 해를 차지했던 큰 사건의 현장을 겪었으면서도 '그걸 왜 겪어야 하지'라든가, '위험하니까 이민 가서 살아봐야지' 하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 그리고 설사 옮긴다고 해서 그 선택이 과연 최선일까? 하는 의문도 여전히 남아 있기도 하고 말이야.

'I'라는 이니셜을 쓰는 외국인 여성이 올해 2달간 아빠 회사에 파견 와서 근무를 했을 때 이야기야. 한 달이 지났을 무렵 둘이 점심을 같이하는 데, 그녀도 비슷한 걸 물었지. 아들이 다음 달에 한국에 놀러 오기로 했는데, 북한 위기 때문에 오라고 하는 게 맞는지 걱정이 된다. 북한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느냐 등.

사실 좀 더 친절하게 대답해줄 수도 있었는데 그날 아빠가 기분이 좋지 않아서 좀 까칠하게 이야기를 했었어. 내 부모가 태어났고, 내 아이가 자라고 친구와 동료, 그리고 내 밥벌이가 있는 땅을 누구라도 쉽사리 떠나기 힘들 거야. 그렇다면 위기에 대비하며 하루하루 현실을 살아내는 게 너무 당연한 일 아닐까?

생각해보니, 너희가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나라의 분단 현실이 계속되고 있다면 아빠가 받았던 질문은 너희들의 몫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다. 한 15년쯤 흘러 이런 질문을 네가 외국인들로부터 받게 된다면 너는 어떤 대답을 하게 될까? 좀 궁금해지는구나. 그때는 이런 질문을 던질 일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때의 너는 아빠보다 좀 더 현명한 대답을 그들에게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볼게. 우리 가끔 이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덧붙이는 글 | electricjin.blog.me 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개인 블로그)



태그:#북한미사일, #위험한나라한국, #분단국가, #북한, #북핵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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