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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으로 가는 열차가 화순 능주벌을 지나고 있다.
 부산으로 가는 열차가 화순 능주벌을 지나고 있다.
ⓒ 마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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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기차가 비행기와 속도 경쟁을 벌이는 고속철 시대지만 한때 기차는 느림과 낭만, 삶의 기표 같은 것이었다.

입영열차는 스무 살 청춘을 싣고 눈물 흘리는 애인이 서 있는 플랫폼으로부터 무심하게 멀어져 갔다. 아버지가 소 판 돈을 인생밑천처럼 가방에 감추고 청년은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 갔다. 단둘이 처음으로 여행 가던 날, 부산행 기차가 덜커덩거릴수록 가슴도 콩닥콩닥 뛰었다.

기차가 드나드는 플랫폼은 만남과 헤어짐이 엇갈리는 교차로였다. 기차는 예정된 시간에 맞춰 오갔지만 사랑은 기약처럼 오지 않았다. 사랑과 이별이 교차하는 곳마다 개미집만한 역이 똬리를 틀고 앉았다. 기다림으로 쇠잔해진 대합실에 새벽을 달려 온 조간신문이 뿌려지고... 끝이 보이는 사랑에 지친 사람들은 먹고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며 서둘러 국수 한 그릇을 말았다.

전남 화순은 경전선이 통과하는 곳이다. 일제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쌀과 면화를 수탈하기 위해 두 도의 첫 글자를 따서 '경전선(慶全線)'을 만들었다. 현재의 경전선은 경부선인 경남 밀양시 삼랑진역과 호남선인 광주광역시 송정역을 잇는 철도로, 총길이는 약 300km이다.

화순에는 모두 8개의 경전선 역이 있었다. 기차가 화순으로 들어오는 순서에 따라 앵남역, 화순역, 만수역, 능주역, 석정역, 입교역, 이양역, 도림역이 있었다. 이 가운데 보통역은 화순역과 능주역, 이양역이었는데 2013년 10월 23일 이양역도 간이역으로 격하되었다.

화순은 간이역을 여행하는 철도동호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화순 간이역들은 거의 대부분 폐역 신세를 면치 못했다. 도로 개설 등으로 기차의 여객 운송량과 화물 운송량이 떨어지니 문을 닫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화순 간이역들을 찾아 나선다.

나주 남평을 지나 화순으로 들어서면 첫 간이역 앵남역이 있었다. 앵남역이 폐역된 후 한 방문자가 그 자리를 찾아 '영원한 사랑'을 새겼다.
 나주 남평을 지나 화순으로 들어서면 첫 간이역 앵남역이 있었다. 앵남역이 폐역된 후 한 방문자가 그 자리를 찾아 '영원한 사랑'을 새겼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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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간이역은 앵남역이다. 1932년 11월 1일 직원이 없는 '무배치 간이역'으로 철도영업을 시작했다가 해방 직전인 1944년 6월 15일에 폐역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6년 6월 11일에 영업을 재개한 앵남역은 2006년 11월 1일에 '여객 취급 중지' 처분을 받았다가 2008년 1월 1일 끝내 폐역되었다.

광주나 나주 등지로 출근하던 이들을 실어 나르던 통근열차가 하루 두 번 운행될 정도로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앵남역. 지금은 철도청 직원 두 명이 12시간 교대로 철도 건널목을 관리하고 있을 뿐이다.

대합실 구실을 하던 간이역사는 세월의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다. 바람 불면 흩어지는 먼지처럼 무수한 사연들이 밀려 왔다 밀려 갔다. 그래도 사람들 가슴엔 추억이라는 멍에가 있어서 지워진 역사(驛舍)를 다시 찾아 와 기필코 담벼락에 사랑을 낙서한다. 앵남역이 문 닫은 지 8년이 넘은 2016년 3월, '영원한 사랑'을 새긴 그대의 사랑에 안부를 전한다.

화순군 능주면 만수리, 강아지들이 컹컹거리는 석재상을 지나 철길이 나 있는 곳으로 몸을 틀었다. 허름한 집에 '만수'라고 적힌 양철판이 해바라기처럼 삐죽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곳이 1932년 11월 1일 무배치 간이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던 만수역이다.

앵남역과 마찬가지로 1944년 6월 15일 폐지됐던 만수역은, 1965년 7월 1일 '무배치 간이역'으로 영업을 재개했다. 그리고 1966년 9월 26일자로 배치 간이역으로 승격해서 소급 화물을 취급하기도 했는데 강영순(71) 할머니가 신랑과 함께 한동안 간이역지기를 했다.

"이웃 주민이 하던 일을 돈이 좀 될까 해서 했제. 화순역이나 능주역에서 표 받아다가 한 장 팔면 얼마씩 받는 거였는데 돈이 되지 않아서 간이역 사무실 겸으로 쓰던 집에 점방도 같이 내서 과자나 음료수를 팔았어."

강영순 할머니는 철길 옆 집을 만수역 사무실겸 점방으로 삼아 기차표와 과자를 파는 간이역지기였다. 지금도 작은 안내판이 그대로 남아 옛시절을 말해주고 있다.
 강영순 할머니는 철길 옆 집을 만수역 사무실겸 점방으로 삼아 기차표와 과자를 파는 간이역지기였다. 지금도 작은 안내판이 그대로 남아 옛시절을 말해주고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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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폐역된 간이역인 만수역을 지나면 마을 입구에 철도 건널목이 있다.
 지금은 폐역된 간이역인 만수역을 지나면 마을 입구에 철도 건널목이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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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간이역지기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만수역이 1969년 8월 1일자로 '무배치 간이역'으로 격하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8년 1월 1일, 만수역은 폐역되었다. 할머니가 회한 깊은 눈으로 철로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부산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가 스쳐갔다. 아무리 느린 기차도 세월 앞에선 가속도가 붙는다. 무심한 세월이 할머니 얼굴에 기차 레일 같은 주름을 남겼다.

2008년 1월 1일자로 폐역된 입교역은 1956년 9월 19일에 '무배치 간이역'으로 출발했다. 여객 취급 중지는 2007년 6월 1일자로 받았는데 요새는 '입교 합동정류소'가 입교역 구실을 하고 있다.

입교역 플랫폼이 있던 자리에서 바라보면 화순군 청풍면 풍암리를 흐르는 지석천이 유려하다. 옛날에 한 관찰사가 이곳을 지나가는데 건널 다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갓(笠) 쓴 선비들이 부역으로 다리(橋)를 놓았는데 다리 이름이 '갓다리'가 되었다. 마을 이름인 '입교(笠橋)'는 '갓다리'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

간이역이었던 입교역이 했던 역할을 지금은  ‘입교 합동정류소’가 대신하고 있다.
 간이역이었던 입교역이 했던 역할을 지금은 ‘입교 합동정류소’가 대신하고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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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이었던 입교역은 폐역됐지만 플랫폼 구실을 했던 구조물은 그대로 남아있다.
 간이역이었던 입교역은 폐역됐지만 플랫폼 구실을 했던 구조물은 그대로 남아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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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교역 철길을 따라 지석천처럼 흐르다 보면 이양역에 도착한다. 이양역은 1930년 12월 25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1997년 12월 28일엔 지금의 역사(驛舍)로 새 단장을 했는데 십년도 채 안 된 2013년 10월 23일, 이양역은 간이역으로 격하되었다.

간이역이면 어떤가. 사랑은 봄·여름·가을·겨울 가리지 않고 무시로 그대를 기다릴 테고, 그대가 탄 기차는 밤낮 가리지 않고 언제든 이양역에 찾아와 뿌우 뿌우 사랑의 기적을 울릴 것이다. 언제든 오시고, 언제든 떠나시라. 그물이 바람을 잡을 수 없듯 예약하고 규정할 수 있는 사랑은 그대를 안을 수 없다.

이양역 대합실 의자에 앉아 그대를 기다린다. 좁쌀 눈꼽만한 이해타산으로 사랑을 저울질하는 옹졸한 세상, 나의 사랑은 죽을 정도로 섬세해서 태산 적벽처럼 당당하다고 고백한다. 잊힐 때 잊히더라도 지금은 오로지 그대만을 연모한다고, 그래서 후회는 없노라고 가슴을 확 연다. 사랑하는 그대, 이양역으로 오시라. 사랑의 간이역, 화순 이양역으로 오시라.

간이역으로 격하되었다고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랴. 이양역은 이제 사랑의 간이역이다.
 간이역으로 격하되었다고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랴. 이양역은 이제 사랑의 간이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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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으로 격하된 이양역 대합실 풍경.
 간이역으로 격하된 이양역 대합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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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간이역, #화순여행, #전라도, #경상도,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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