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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직접 취재 외에 <한겨레> 2010년 6월 1일자부터 10월 8일자까지 김중미 작가가 구술 정리한 '다시 길을 떠나다', <통일뉴스>의 '문정현-죽음을 건너 순교자의 삶 살고파', <인물과 사상>(2008년 3월호) 등을 참고했습니다. -기자말

11월 8일 광화문에서 서각기도를 하시는 문정현 신부
▲ 전쟁은 생명을 죽이는 끔찍한 폭력이다 11월 8일 광화문에서 서각기도를 하시는 문정현 신부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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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9일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옆에는 문정현 신부가 13일째 서각 기도를 하고 있었다. 트럼프 방한에 반대하는 기도였다. 문정현 신부 앞에는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온몸으로 깎는 반전 평화 새김展', 그 뒤로는 '반전 평화'라고 글자가 쓰인 커다란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문정현 신부는 나무에 새긴 글자를 조각칼로 정성스럽게 파고 다듬었다. '평화로운 한반도 나라다운 나라', '반전 평화', '전쟁은 생명을 죽이는 끔찍한 폭력이다'라는 글자를 새겼다. <작은책>은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며 올곧게 한길을 걷고 있는 문정현 신부를 올해의 인물로 뽑았다. 문정현 신부의 일생을 엿본다.
  
문정현 신부는 어떤 사람일까. 1990년 폭로된 보안사의 디스켓에 담긴 그의 신상은 이렇다.

"개인 번호 169 문정현. 전북 지역의 대표적 문제 인물. 외고집에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으로 별명은 '깡패 신부'. 3, 4공화국 당시 반정부 활동으로 수감."

문 신부는 그 뒤로 깡패 신부, 전문 시위꾼 등으로 불렸다. 하지만 문정현 신부는 누구보다도 생명과 평화를 사랑한다. 생명을 경시하고 폭력을 숭배하는 자들 때문에 1966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거의 일생을 길에서 보냈다. 아직도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와 싸우고 있고, 미 공군기지로 의심되는 제2공항 건설을 저지하는 싸움을 하고 있다.
 

문정현은 1940년 8월 20일, 전북 익산시 황등면 황등리에서 태어났다. 옛날 지명이 이리였던 현 익산시는 충남 논산과 전북 군산 사이에 있다. 황등면은 조그만 마을이다. 서쪽으로는 아직도 전라선 완행열차가 다니는 황등역이 있고 동쪽으로는 KTX 기찻길이 지나가고 있다.

문정현의 집안은 5대째 천주교 가정이었다. 친가 할아버지 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셔서 '외할아버지 무릎'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는 주일이 되면 황등에서 익산(당시 이리) 시내까지 8킬로미터가 되는 길을 걸어서 미사를 다녔는데 문정현도 늘 따라다녔다.

열 살 무렵 익산본당(이리본당, 지금의 창인동성당)의 이기순 신부가 문정현을 보더니 세례명을 불렀다.

"바르톨로메오, 이리 와 봐라. 너 신부님 안 될래? 신학교 가라."

문정현은 어리둥절했지만 그 말이 머릿속에 탁 박혔다. 문정현은 그때부터 신학교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문정현이 열 살 무렵 한국전쟁이 터졌다. 1950년 6월 말께 남하한 인민군과 남쪽 경찰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실탄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나고 대포 소리가 요란했다. 곧 이어 살던 마을은 인민군 세상이 되었다. 문정현이 다니던 황등초등학교는 인민군 의용군 훈련소가 됐다.

인민군들이 떠나자 다시 미군이 들어와 황등초등학교를 차지했다. 미군들은 동네 아이들을 뽑아서 설거지를 시켰다. 아이들은 난로에 주전자 물을 데워서 설거지를 해 주고 시레이션(C-Ration)이라는 미군 전투식량과 다른 먹을 것들을 받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앞에서 미군 두 명이 문정현을 불렀다. 흑인과 백인 병사였다. 손짓 발짓으로 문정현을 언덕배기에 세우고 머리 위에 국방색 깡통을 올려놓았다. 문정현은 군것질거리라도 생길까 싶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데 그들이 5~6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카빈총을 꺼내더니 머리 위에 올려놓은 깡통을 겨냥해서 쏘는 것이 아닌가. 문정현은 혼비백산했다. 미군 병사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훗날 문정현은 그 미군 녀석의 하얀 이가 두고두고 떠올라 화가 났다.

문정현은 신학교를 거쳐 1958년, 대신학교에 입학했다. 평범한 신학생이었던 문정현은 순종하는 모범생이었다. 신학교는 보수적이고 엄격하기 때문에 학생들의 정치의식이나 사회의식은 전무했다. 철학과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갔다.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지만 문정현은 그냥 군사정변이 일어났나 보다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군에서 전역한 뒤 2년 만에 복학을 했다.

문정현은 1966년 12월 16일, 스물일곱 살에 전주 중앙성당에서 한공렬 주교의 주례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서품을 받을 때 선택한 성서 구절은 '주의 제단에 돌아가리라'였다. 사제로서 첫 미사는 바로 다음 날 고향 본당인 이리의 황등성당에서 올렸다.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첫 부임지는 전주 전동성당이었다.

1974년 7월 6일 지학순 주교가 일본에서 김포공항으로 오던 중 행방불명이 됐다.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연행된 것이다. 민청학련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사건이었다. 민청학련의 관련자 180여 명이 불온 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 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혐의로 구속·기소한 것이다. 1972년 10월 '유신 체제 발족'과 1973년 8월 8일에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 반대 투쟁이 거세지자 박정희 정권이 반대자들의 뿌리를 뽑고자 조작한 사건이었다.

1974년 5월 27일 이철, 김지하를 포함한 55명이 반공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등으로 사형과 징역 2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민청학련에 자금을 대 준 혐의로 윤보선 전 대통령, 박형규 목사, 지학순 주교가 구속됐다. 문정현은 "감히 주교를 구속해?" 하는 분노로 정권의 실체와 사회를 깨닫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정현은 명동의 서울대교구청을 갔다. 김수환 추기경의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에 들어서자 초췌한 모습으로 바닥에 앉아 있던 부인들이 문정현이 입고 있는 신부복의 로만칼라를 보고는 대뜸 서명용지를 내밀었다. 그이들은 1964년 8월 박정희가 조작한 인민혁명당(인혁당) 주범으로 몰린 우홍선·이수병·김용원 씨의 부인들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0년 뒤인 1974년 4월 25일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가 있으며, 이들이 인민혁명당을 재건해 민청학련의 국가 전복 활동을 지휘한 것'으로 발표했다.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이다.

구속된 인혁당 관련자 23명 가운데 8명은 사형, 나머지는 무기에서 15년까지 중형을 받은 상태였다. 이들은 빨갱이로 몰려 그 가족들까지도 친척과 이웃들에게 기피 인물이 되어 있었다. 서명용지엔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 선생, 윤보선 전 대통령, 윤형중 신부의 서명이 있었다. 문정현은 두말없이 서명을 했다.

"그때 나는 인혁당에 대해 처음 들었다. 이럴 수가 있나. 그때부터 나는 성당에서 강론할 때 인혁당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바로 정보부, 경찰, 보안대 들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밀착 감시였다. 전주 효자동 성당 주임 신부로 있었는데 내 침실 창문 바로 밑에서 나를 감시하고 길 건너 남의 집 담, 소금집이라는 데가 감시 본부였다. 나중에 알아보니까 수시로 내 방문을 따고 들어와서 뒤졌다. 통장을 찾으려고. 솔직히 난 통장이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사회에 발언하기 시작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을 판결하는 날이었다. 그때 문정현 신부는 대법원에 와 있었다.

"BBC 방송하고 국제앰네스티에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취재하러 왔는데 난 통역과 안내를 맡았다. 법정에 올라가는데 판결이 끝나고 가족들이 오열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족들이 들고 있는 가방이랑 물건들을 가지고 법대고 뭐고 막 까무러치듯이 휘젓고… 사복 경찰들이 몸부림치는 유족들을 끌어내리고, 처절했다."

그날 문 신부를 비롯한 다른 신부들은 응암동 성당에서 잤다. 새벽에 유족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함세웅 신부가 받았는데 얼굴이 노래졌다. 처형한 거다. 우리는 바로 서대문구치소에 갔다. 전투경찰이 꽉 차고 유족들이 와 있었다. 선고하고 바로 사형시킨 거니까. 거기서 몸부림치고 유족들 끌어안고. 그런데 시신 한 구를 태운 장의차 한 대가 응암동로터리에서 잡혔다고 하더라. 택시 타고 쫓아갔다. 장의차를 못 가게 하루 종일 씨름했다. 함석헌, 윤보선 씨 부인, 문동환 목사. 또 누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정신이 없었으니까. 나는 장의차 바퀴 바람을 빼기도 하고, 껌을 씹어서 키를 넣는 구멍에 집어넣기도 하고, 신문지를 말아서 머플러(배기통)에 집어넣기도 했지. 경찰이 나를 끄집어내려고 기를 썼다."

경찰은 결국 크레인을 동원해 그 장의차를 달고 가려고 했다.

"정권은 고문한 흔적을 없애려고 벽제화장터에 넣으려고 했던 거지. 나는 크레인을 타고 올라가 그 위에서 연설했다. '인혁당은 조작이다, 하루도 안 돼서 죽이는 법이 어딨냐'고."

경찰이 문정현 신부를 끌어내리는 과정에서 아스팔트로 떨어졌다. 무릎 연골이 파열됐다. 문 신부는 그때 다친 무릎 때문에 평생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장애인이 됐다.

문정현 신부는 종로5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회관에서 목사들이 진행하는 목요기도회를 알게 됐다. 그해 7월부터 시작된 기도회에는 여러 성직자들과 인혁당, 민청학련 학생 가족들이 함께했다. 문정현은 사제단의 시국 미사나 기도회를 빠지지 않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혁당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전하며 억울함을 알렸다.

문정현 신부는 1976년 명동성당에서 감행된 ‘3.1 구국선언’에 참여한 대가로 옥살이를 해야 했다. 수인번호 1003번이 그의 이름이었다.
 문정현 신부는 1976년 명동성당에서 감행된 ‘3.1 구국선언’에 참여한 대가로 옥살이를 해야 했다. 수인번호 1003번이 그의 이름이었다.
ⓒ 평화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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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구국선언, '당당히 죽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김지하 시인 구명 운동을 하고 있던 가톨릭과 개신교는 함께 뜻을 모아 1976년 3월 1일 저녁 6시 명동성당에서 3·1절 기념 미사를 거행했다. 문정현 신부는 2부 구국 기도회에서 김지하 시인의 어머니가 쓴 호소문을 대신 읽었다. 그리고 문동환 목사가 설교를 했고 마지막으로 이우정 교수가 '3·1 민주구국선언문'을 낭독했다.

유신정권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3·1절 미사를 '3·1 명동사건'이라고 이름 붙이고 국가 전복 내란을 기도했다며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관련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중앙정보부는 3·1절의 종교 행사를 개신교와 가톨릭의 성직자들을 한꺼번에 탄압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이튿날 새벽 경찰은 문정현 신부가 자고 있던 전주 해성학교 기숙사에 들이닥쳤다.

"기숙사에서 잠자는데 새벽에 경찰이 들이닥쳐 연행됐다. 마당까지 다 파헤쳤더라. 전주경찰서에서 서울시경으로 갔다. 거기 들러서 남산 육본 밑에 한성산업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곳으로 갔다. 2층집이었다. 몇 사람이 와 있었다. 얻어맞지는 않았다. 안기부 요원 세 명이 붙어서 며칠 동안 잠을 한숨도 안 재웠다.

다시 중정 6국으로 끌고 가더라. 거기서 4일 밤낮으로 조사받았다. 옆방에서도 누군가 조사를 받는지 비명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소리에 겁이 나기보다는 더 이가 갈리고 용기가 났다. 다시 검찰청으로 가서 구속됐다. 김대중, 문익환, 문동환, 신부 셋이 모두 구속됐다는 소문을 거기서 들었다."

문정현 신부는 연행된 뒤인 두 달 만에 면회가 허락됐다. 동생 문규현이 신부 서품을 받는 날인 5월 3일, 어머니와 문규현 신부가 면회 와 처음으로 만났다.

"언젠가는 어머니를 뵐 텐데 울까 봐 걱정 많이 했다. 어머니가 나를 보고는 쫓아오더니 허리를 잡고 '우리 아들 김대건 신부 돼야 돼' 아, 참. 대견한 어머니다. 울고 그럴 줄 알았더니. 대견한 어머니다. 평생 우리를 위해서…."

문정현 신부가 감옥에 있던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었다. 문정현 신부는 '유신정권'이 종지부를 찍는다는 생각에 희열을 느꼈지만 곧 공포심이 생겼다. 철창문이 열릴 때마다 '나를 데려가려고 오는 건가?' 무서움에 떨었다. 좁은 방을 뱅뱅 돌며 기도를 했다.

"'내 생명을 구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었다. '내가 끌려가 죽더라도 비굴하지 않게, 당당하게 죽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아무 일 없이 1979년 12월 8일 문정현 신부는 석방됐다. 1980년 1월 16일 전주 중앙성당으로 발령이 났다. 전주 중앙성당은 주교좌성당이었다. 감옥에서 갓 나온 문정현 신부를 그곳으로 보냈다는 것은 김재덕 주교가 대외적으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을 지지한다는 뜻이었다.

문정현 신부는 전두환 정권에서도 굽히지 않았다. 미사 때마다 정치에 군인들이 나서면 안 된다고 말했다. 미사 중에 정보 계통 사람들이 눈에 띄면 미사를 중단하고 내쫓아 버렸다. 신자들 중에는 겁먹는 사람도 있었고, 문 신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다. 1985년 문정현 신부는 전주 중앙성당에서 전북 장수군 계내면 장계리에 있는 장계성당으로 부임했다.

"가톨릭 농민회 활동을 많이 했다. 함평 고구마 사건부터 노풍 피해 보상 운동, 취락 구조, 소 파동 싸움도 굉장했다. 군청을 점거하고 경찰지서에다 농민 깃발을 꽂고, 잡혀가고, 꺼내 오느라고 단식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 시골 바닥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성당에 최루탄이 날아 들어오고… 무전기를 뺏긴 경찰이 소방차를 가져와서 성당 화장실을 퍼 내고… 피 터지게 싸웠다."

'분신 같은' 오두희와의 만남, 노동운동의 시작

문정현 신부는 1988년 익산(당시 이리) 창인동 본당 신부로 부임했다. 거기서 '익산 노동자의 집' 실무자로 온 오두희를 만났다. 학생운동 이후 '전북 지역 최초 여성 위장 취업자'였다. 수배 생활은 길었다. 꽤 오랫동안 공권력을 피해 성당에 숨어 살았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이른바 '유화 국면'이 시작됐을 때 많은 수배자들처럼 오두희도 수배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가톨릭 전주교구에서 운영하던 '군산 노동자의 집' 사무국장이 됐다. 지금도 평화바람에서 함께하고 있는 그는 26년 넘도록 분신처럼 문정현 신부의 사목 활동을 받쳐 준 동지가 되었다.

그 무렵 익산에서는 쌍방울·한성·경성고무 따위의 크고 작은 사업장에서 노조 결성과 어용노조 반대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의 집'으로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새로 부임한 문정현 신부에게 쉽게 신뢰를 보이지 않았다. 문정현 신부 역시 핍박당하는 노동자들 속에 있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소통에 미숙한 점이 많았다. 노동자의 집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가진 거라고는 몸뚱이밖에 없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고 가톨릭 신자도 아니었다.

노동자들이 마음에 안 들 때도 많았다. 어느 날 노동자의 집에 들렀다. 사제관 아래 아주 가까이 있던 노동자의 집에서 밤새도록 소주병 부딪치는 소리, '찍찍' 베 찢는 소리가 났다. 화염병을 만드는 소리였다. 참다못해 인터폰으로 소리를 질렀다. "밤새워 화염병을 만들 거야?" 노동자들은 들은 척도 안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집회 나가잖아. 경찰이 페퍼포그 쏘잖아. 시위 현장에서 어린 노동자들이 경찰한테 맞아 다친 채로 끌려가는 걸 보면서 '화염병 더 없냐? 왜 그거밖에 안 만들었어?' 하고 소리쳤어. 이율배반이야. 당하다 보니까 노동자 계급성을 깨달아. 그 사람들한테 뭐 이익, 도덕을 따지냐. 굼벵이가 밟혔어. 꿈틀거리는 건데. 이런 의식으로 변하더라고."

문정현 신부는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의 노동자들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노조를 만들기 위해 헌신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코디언을 배우고 연주하게 된 것도 노동자들과 어울리려는 마음에서였다. 그때 한참 유행하던 행진풍의 노동가요를 멋지게 연주해 노동자들과 같이 어울려 노래를 부르고, 시위 현장에서는 격려해 주고 싶었지만 쉽지가 않았다.

성당은 늘 경찰의 사찰 대상이었고, 집회의 마지막 집결지는 항상 그곳이었다. 그때는 창인동성당이 '노동자 투쟁의 메카'라는 소리도 들었다. 노동자들이 성당으로 모이면 경찰들은 성당을 향해서 최루탄을 쏘아 대고, 노동자들은 돌멩이로 막으며 대치를 했다. 그때마다 문정현 신부는 노동자의 편에 서서 앞막이를 충실히 했다. 그렇게 차츰 노동자들의 신뢰를 얻어 갔다.

조성만의 유서, 실형 받은 동생... "이겨 내자"

5공화국이 막을 내릴 무렵 문정현 신부는 또 다른 의식을 일깨워 준 존재를 만난다. 그이가 직접 영세를 주었던 제자, 조성만이다. 조성만은 1988년 5월 15일,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5·18 광주민중항쟁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던 성당 벗들을 바라본 뒤 할복 투신했다. 스물넷 짧은 삶이었다. 유서에는 '한반도 통일, 미군 철수, 군사정권 퇴진, 서울올림픽 남북 공동 개최'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서울시청에서 장례 행렬이 100만 인파였다. 모교에 왔고, 집을 들러서 망월동으로 갔지. 나보다도 걔가 지금도 눈을 부릅뜨고 있다니까. 당시는 내가 성만이의 스승이었지만 지금은 성만이가 나의 스승이지."

조성만의 죽음은 통일 논의에 물꼬를 텄다. 주한미군 문제와 통일 문제를 하나로 바라보게 해 준 계기가 됐다. 그동안 문정현 신부가 매달려 왔던 우리 사회의 모든 부조리들이 결국 하나의 원인에서 비롯됐음을 깨닫게 됐다. 그 무렵 임수경이라는 대학생이 방북을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마침 문정현 신부의 동생 문규현 신부는 미국 메리놀 신학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새로운 부임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문정현은 정의구현사제단으로 하여금 문규현 신부를 이북으로 보내 임수경과 함께 분단의 장벽을 넘어오게 했다. 문규현은 판문점에서 돌아오자마자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3년 5개월 실형을 살아야 했다.

"문규현 신부가 임 씨와 함께 걸어서 휴전선으로 들어온 뒤에 감옥에 갇혔을 때 어머니와 면회를 갔지. 몸이 반쪽이더라고. 이게 다 내 작품인데, 피눈물이 흘렀지. 동생을 사지로 몰아넣었지만 자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야. 어머니는 김대건 신부 이야기를 했고, 나는 '고생했다, 이겨 내자'라고 한마디 했지."

문정현 신부는 1995년 메리놀 신학교에서 신학석사(MTH) 학위를 받은 뒤에 페루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해 8월 말 전북 군산의 오룡동성당으로 발령이 났다고 연락이 와서 서둘러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군산에서는 미군기지 활주로 사용료 문제가 불거져 있었다. 우리 민항기들은 군산 미군기지 활주로를 사용했고 사용료와 유지보수비를 미군 측에 지불해 왔다. 그런데 1997년 초, 미군 측은 그 비용을 4배 이상 올려 달라고 요구했다.

"말이 되지 않지. 우리 땅을 공짜로 내주고 기한도 없이 사용하면서 우리 민항기가 활주로를 사용한다 해서 사용료를 받고 유지보수비까지 내고, 거기다 또 4배까지 올려 달라 한단 말인가?"

문정현 신부는 '활주로 사용료 반대를 위한 군산시민모임'을 조직해서 매주 금요일 오후 2시에 집회를 하기 시작했다. 문 신부는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했다. 반미 투쟁의 시작이었다. 결국 활주로 사용료 인상안 일부는 철회됐다. 문 신부는 또다시 1998년 5월 '군산 미군기지 우리땅 찾기 시민모임'을 만들었다.

문정현 신부는 매향리 폭격장 폐쇄 투쟁과 3년간의 군산 미군기지 싸움에서 비로소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소파)의 불평등을 실감했다. 미군기지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피해나 미군의 범죄에 대해 한국 정부는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었다. 오히려 한국정부는 군산 미군기지에 무단침입을 했다는 혐의로 문정현 신부에게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이런 모순은 군산만의 일이 아니라 미군기지가 있는 이 땅 곳곳의 문제이며, 오키나와·괌·하와이·타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문정현 신부는 이런 모든 원인이 소파(SOFA), 즉 한미행정협정 또는 주둔군지위협정을 불평등하게 맺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소파 개정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끈질긴 투쟁 끝에 2001년, 소파는 또 한 차례 개정됐다. 살인, 강간, 유괴 등 12개 중범죄를 저지른 미군 범죄자의 신병 인도 시점이 '재판 종료 후'에서 '기소 시점'으로 바뀌었고, 미군은 한국의 환경 법령을 존중한다는 특별 양해 각서를 체결했다. 소파의 불평등 조약이 어느 정도 개선된 셈이다. 그 이후 미군 범죄가 꾸준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문정현 신부가 바라는 세상은 아직 아니었다. 2002년 여름, 미군 장갑차 사고로 두 명의 여중생이 죽었다. 한국은 소파협정을 맺은 이후 처음으로 미군 측에 재판권 포기를 요청했지만 미군 측은 이를 거부한 채, 자기들끼리 재판을 했고 가해자들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2002년 겨울, 분노한 시민들 10만이 광화문 일대에 모여 촛불 시위를 했다. 문정현은 그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봤다. 언젠가는 이 땅에도 평화가 흐를 것이라 믿었다.

"약장수처럼 평화를 공유하자" 평화유랑단의 시작

그 무렵 미국이 9·11 사건을 빌미로 석유를 겨냥한 이라크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국정부에 파병을 요청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했다. 국익을 위해서 전투 병력이 아닌 의료·후방 지원을 맡는 지원부대를 파병한다고 결정했다. 문정현 신부는 놀랐다.

"우리도 이미 전쟁을 겪어 그 비극으로 말미암아 아직까지 분단이 된 상태이고, 이로 인해 아픈 상처가 치유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한 박정희 정권 때도 국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전쟁에 파병한 아픈 역사가 있다. 그런데 또다시 미국이 일으킨 전쟁에 국익을 앞세워 참여한다는 것은 명백한 전쟁범죄였다. 정부가 파병을 하면 우리는 전범국가의 국민이란 오명을 써야 했다."

문정현은 평화유랑단을 만들고자 했다. 옛날 '약장수'처럼 사람들이 모인 곳곳을 돌아다니며 만담을 나누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유랑을 하자는 생각이었다.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각 지역의 환경운동단체·노동운동단체·인권운동단체·사회복지운동단체를 만나서 평화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자, 또 각 지역의 현장에서 판을 벌여 노래하고 춤추면서 사람이 모이면 같이 이야기를 나누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시작하려니 음향시설도 필요하고, 영상시설도 필요하고, 또 기본적으로 흥을 돋울 수 있는 악기도 필요했다. 다행히 70년대산 독일제 벤츠 미니버스를 마련했다. 미술행동센터에서는 차에 그림을 그려 주어 일명 '꽃마차'란 평화유랑단의 마스코트가 탄생하게 됐다.

인터넷을 이용해 단원을 모았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였다. 생태·환경·인권운동을 하던 사람, 아나키스트, 윤여관 선생, 노래 잘하는 보리, 고철. 전주·인천·공주·대구 등 전국 각지에서 7명이 모여 '평화유랑단 평화바람'을 결성했다. 거기에 문정현과 오두희까지 아홉 명이 2003년 11월 14일 광화문 시민열린마당에서 발대식을 했다.

지난 2006년 9월 13일, 국방부는 빈집을 철거하겠다며 대추리에 다시 포클레인과 용역깡패들을 앞세우고 들어왔다. 대추리 노영희 할머니는 경찰을 막아세우고 "당신들도 낳아 길러준 부모가 있을 텐데, 부모같은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절규했다. 국방부는 사람이 살고 있는 집마저 부수길 서슴지 않았다.
▲ 대추리 노영희 할머니 지난 2006년 9월 13일, 국방부는 빈집을 철거하겠다며 대추리에 다시 포클레인과 용역깡패들을 앞세우고 들어왔다. 대추리 노영희 할머니는 경찰을 막아세우고 "당신들도 낳아 길러준 부모가 있을 텐데, 부모같은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절규했다. 국방부는 사람이 살고 있는 집마저 부수길 서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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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까지 옮긴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

평택에 미군기지를 확장한다고 했다. 문정현 신부가 2004년 12월 평택 대추리에 직접 들어가서 들어 보니 주민들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군이 들어와 군용 활주로를 만든다고 쫓아냈다. 새로 마을을 일궈 정착하나 했더니 1952년 한국전쟁 때 다시 미군 활주로를 연장한다고 해서 쫓아냈다.

보상 따위를 꺼낼 수도 없는 시절이어서 미군들이 마구잡이로 불도저로 밀어 버렸다. 그래서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갯벌에다 움막을 짓고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새로 땅을 만들어야 하니 일손이 모자라 도두2리에서는 네 살짜리 아이를 바구니에 넣어서 나무에 걸어 놓고 일하다가 아이가 도랑에 빠져 죽은 일도 있었다. 그렇게 고생을 해서 황새울을 문전옥답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대추리에는 그때 생겨난 '황새울영농단'이 있었다. 김지태 이장을 중심으로 김택균·신종원 세 사람이 나서서 마치 형제처럼 이심전심으로 일을 했다. 영농단에는 온갖 농기계와 연장이 다 갖춰져 있어 그 넓은 땅에 짓는 농사를 모내기부터 추수까지 기계로 할 수 있고, 농기구도 스스로 고쳐 쓸 수 있었다. 사람들은 함께 일하며 밥을 먹고 술도 한잔 마시며 구수한 입담을 나누었다. 대추리만의 고유한 풍경, 오랫동안 만들어진 마을 공동체와 문화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삶 자체가 평화였다. 그 평화를 빼앗긴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황새울영농단의 세 지도자는 공동체를 보존하려고 애썼다. 이들은 2003년 7월 1일 대추리·도두2리·안정리 주민들로 '미군기지 확장 반대 평택시 팽성읍 대책위원회'를 꾸려 줄기차게 투쟁했다. 그러던 2004년 9월 1일, 주민 동의 없는 국방부의 일방적인 특별법 공청회에서 항의하던 주민 대표들과 평택 지역 사회단체 회원들이 경찰에 강제 연행되었다. 그날 저녁부터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은 '우리땅 지키기 팽성주민 촛불행사'를 시작했다.

문정현 신부는 그동안 어떤 투쟁에 참여하든 이름만 얹고 마는 형식적인 투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는 곳까지 옮겨서 싸운 적은 없었다. 대추리 주민들과 함께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하기로 결정한 뒤, 아예 마을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2004년 12월 문정현 신부, 오두희, 여름, 반지, 밥, 마후라, 해밀, 팥공, 두시간, 이렇게 모두 아홉 명이 대추리로 들어갔다.

정부는 2006년 5월 4일 '여명의 황새울 대작전'이라고 이름 붙인 행정대집행을 저질렀다. 새벽 5시, 동틀 무렵 포클레인을 앞세운 용역 700여 명과 12000명이나 되는 전투경찰이 새까맣게 몰려왔다. 군 병력도 2700명이나 됐다. 아비규환이 일어났다. 평택 지킴이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대추초등학교에서 끌려 나왔다.

노인들이 울부짖고 서러움과 분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까무러쳤다. 부상자가 200명이 넘었고, 연행된 사람이 600명이 넘었고, 200여 명이 입건되고 40여 명이 구속됐다. 다음 날 다시 전투경찰이 마을로 몰려와 군화를 신은 채 집 안으로 들어가 숨어 있는 사람들을 체포해 갔다. 935일 동안 들었던 평화의 촛불이 꺼졌다. 노무현 정부 때였다.

문정현 신부는 청와대 앞 화단에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하지만 세상은 대추리 주민의 삶이나 그의 단식에 관심이 없었다. 월드컵 응원하는 소리만 들렸다. 청와대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문 신부는 21일 만에 단식을 접었다. 공황 상태에 빠졌다.

대추리에서 지적장애인들의 공동체인 '작은자매의 집'으로 돌아왔다. 텃밭을 일구어 보려고 했지만 힘에 부쳤다. 약해지는 자신이 서글퍼졌다. 문정현 신부는 작은자매의 집을 그만두고 은퇴하기로 했다. 교구의 허락을 받고 난 뒤에 2008년 1월 24일, 은퇴 미사를 했다.

작은자매의 집을 눈물로 떠난 뒤 그는 그쪽으로 발길조차 하지 않았다. 마음을 다스려 보자고 대추리에서 어깨너머로 본 서각을 해 보기로 했다. 대추리에서 만난 이윤엽 작가가 인사동에 함께 가서 서각 도구를 마련해 주었다. 문정현 신부는 '껍데기는 가라',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같은 문구를 붓글씨로 써서 서각을 했다.

문정현 신부는 군산 옥봉리로 내려갔다. 2007년 1월 23일 무죄로 판결난 인혁당 사건으로 받은 배상금으로 허름한 집을 사서 수리했다. 그해 3월 15일 집들이를 하고 오두희, 구중서, 딸기와 함께 공동체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제주 서귀포 강정마을에서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다. 제주 해군기지 유치 결정을 내린 뒤, 건설을 강행하고 있었다. 강정마을 해안엔 길이 1.2킬로미터, 너비 150미터에 달하는 보기 드문 거대한 단일 용암너럭바위로서, 용천수가 솟아나 국내 유일의 바위 습지를 형성하고 있어 매우 보전 가치가 높은 구럼비 바위가 있었다.

문정현 신부는 2011년 7월 6일 제주도 강정마을로 이사했다.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동 이어도로 000-0. 문정현 신부의 새로운 주소지다. 문 신부는 이날 새벽 5시에 군산 집에서 일어나 오전 10시 반에 장흥 노력항에서 선박 오렌지호를 타고 2시간 가까이 비안개를 헤치고 제주 성산포에 도착했다.

"정부와 해군에 대한 분노보다,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보다, 국가 권력에 의해 고통받고 있는 강정마을 주민들의 절규가 내 가슴을 치고 내 몸뚱이를 제주로 향하게 했다."

평화바람 식구들과 시민들은 아직도 해군기지 앞에서 깃발을 들고 있다.
 평화바람 식구들과 시민들은 아직도 해군기지 앞에서 깃발을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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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후에서 활동하는 참모' 오두희는 망설였다. "대추리의 아픔이 너무 컸고, 국가가 한다고 하면 할 것이기에 신부님 혼자 갔다 오시라"고 했다. 며칠 뒤 모두가 싸움이 끝나 간다고 하는 시점에서 오히려 "이제야 공간이 열리고 있다"는 걸 역설하며, "진짜 평화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얘기해 나가겠다"고 말하면서 강정으로 갔다. 오두희는 강정마을 투쟁에서 시급한 건 '재정 사업'과 '장기 투쟁 대비'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하는 건 주민들 지원이다, 언젠가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정현 신부와 평화바람 식구들은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립 반대운동을 지원하려고 '강정평화상단'을 꾸렸다. 평화상단에서는 강정에서 직접 만든 소라와 전복젓갈을 비롯해 참조기젓갈, 다시마, 소금, 고등어를 판매하고 있다. 문정현 신부는 "많은 분들이 한 번이라도 제주 강정에 찾아오면 좋겠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고, 이곳이 콘크리트로 덮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직접 제주에 찾아오기 어려운 분들도 평화상단을 통해 제주 강정 바닷가를 지키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문정현 신부와 평화바람 식구들은 2017년 제 18대 선거 때 문재인이 당선되기를 바라면서 선거운동을 했다. 하지만 박근혜가 당선됐다. 오두희는 박근혜가 당선된 뒤 주민등록을 아예 강정으로 옮겼다. 살려고 보니 공간이 필요했다. 2년 동안 준비한 끝에 2015년 '성프란치스코센터'가 완공됐다. 문정현 신부가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옥살이해 받은 국가배상금을 종잣돈으로, 시민 모금을 더해 강정에 평화의 거점을 세웠다.

문정현 신부는 해군기지 반대 미사를 하다가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2012년 4월 6일 미사 중 진입한 해경과 몸싸움을 하다 강정포구 방파제 주변에 쌓아 놓은 7미터 높이의 테트라포드(4개 뿔 모양의 콘크리트 구조물)에서 추락했다. 허리뼈 세 곳이 골절당하는 중상을 입었다. 평소 지병인 심근경색증이 있는데다가 단식 투쟁도 한 적이 있어 쇠약해진 몸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건강을 회복해 다시 길 위에 섰다.

결국 12일, 정부는 강정마을 구상권 소송을 철회했다. 법원의 강제조정을 수용한 것이다.
▲ 구상금 34억 원 결국 12일, 정부는 강정마을 구상권 소송을 철회했다. 법원의 강제조정을 수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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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민군복합형관광미항, 해군기지의 이상한 이름

제주 강정 주민들과 문정현 신부는 9년 동안 저항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정부는 국가안보사업임을 내세워 일방적으로 기지 건설을 강행했다. 이에 맞선 강정마을 주민과 활동가들의 저항은 처절했다. 하지만 결국 2016년 2월 26일 제주 해군기지가 들어섰다.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이라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요상한 이름을 달았다.

농사와 어로 작업밖에 모르던 주민들은 국가안보사업을 방해하는 '종북 세력'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게다가 해군은 해군기지 공사를 방해했다며 강정주민 등을 상대로 34억 5000만 원의 구상권을 청구하기도 했다. 기소된 피소송인이 121명이니 1인당 2850만 원가량 되는 돈이다. 결국 12일, 정부는 강정마을 구상권 소송을 철회했다. 법원의 강제조정을 수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둘째 문제다. 중요한 건 "지난 10년 동안 발생한 국가 폭력의 실체"를 밝혀내는 '진상 규명'이다. 진상 규명이 되면 잘잘못이 가려지고 구상권은 자연스레 정리될 것이다. 이들의 투쟁이 정당했다는 사실을 인정받고 사과를 받아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구상권 청구 소송은 철회하고 사법처리 대상자는 사면하겠다"는 공약을 내건 바 있다.

그런데 요즘 국토부가 그 좁은 제주에 제2공항을 세우겠다고 나섰다. 세계자연유산이니 유네스코 3관왕이니 하며 선전하는 중이다. 지난 4월, 김방훈 제주도 정무부지사는 "제주 제2공항 건설 관련 10개 오름 절취 계획은 전혀 없다"고 밝혔지만 주민들의 걱정은 여전하다.

문정현 신부와 활동가들은 제주 해군기지가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것처럼, 미공군기지의 또 다른 위장된 이름으로 '제2공항'이라고 하는 건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그래서 제주 시민단체들은 '제주 제2공항 반대 성산읍대책위'를 결성해서 천막 농성을 하고 있다. 김경배 위원장은 제주 제2공항 건설을 원점에서부터 재검토 하라고 요구하면서 35일째(2017년 11월 13일 현재) 단식 농성을 하고 있다.

2017년 11월 13일 문정현 신부는 다시 강정으로 돌아가셨다. 바로 다음날부터 다시 평화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 강정마을 평화미사 2017년 11월 13일 문정현 신부는 다시 강정으로 돌아가셨다. 바로 다음날부터 다시 평화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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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3번째 미사, 그는 어김없이 돌아갔다

광화문에서 트럼프 방한에 맞서 2017년 10월 26일부터 2017년 11월 11일까지 '길위의 신부 문정현, 온 몸으로 깎는 반전 평화 새김展' 서각 기도를 했던 문정현 신부는 11월 12일 다시 제주 강정마을로 되돌아갔다.

11월 13일, 문정현 신부는 어김없이 해군기지 앞에서 강정 생명 평화 미사를 봉헌했다. 그날이 3833회째였다. 문 신부는 2010년 6월 1일부터 광화문에서 보름 동안 있었던 일을 들려주며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가 끝난 뒤에는 또 '어김없이' 해군기지 앞, '제주민군복합형관광미항-해군제주기지' 표지판 앞에서 깃발을 들고 있었다.

"해군기지 없는 강정마을"

강정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그 앞에서 투쟁하고 있는 문정현 신부
▲ 해군기지 없는 강정마을 강정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그 앞에서 투쟁하고 있는 문정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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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월간 작은책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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