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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풋이 눈은 하늘빛을 문득문득 가리면서 새벽에 내렸다. 바람에 몸을 맡긴 듯, 춤을 추듯 지상에 일그러진 생명들에게 한 해의 소임을 마치겠다는 각오인 듯 눈은 내렸다. 2017년에 하늘이 행하는 마지막 거룩한 노동이 아닐까는 생각도 들었다.

겨울의 소회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새해를 뜻있게 보내고 싶은 소망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올 한해는 소스라치게 놀랄 만한 일들이 많았다. 일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전년부터 밝히던 촛불의 힘으로 결국 정권은 바뀌었다. 세계에서 유래 없는 평화 혁명이었다고 자부해도 좋았다. 상실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 상실은 끝난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잃어버림에 대해 좀 더 품에 안아도 좋을 듯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애란, 『바깥은 여름』, (문학동네/2017)
 김애란, 『바깥은 여름』, (문학동네/2017)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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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일상과 마음에, 그래도 '올 한해 나는 따뜻하게 살았구나' 하고 위로 받을 수 있는 책이 있지 않을까. 반짝 스타처럼 녹아버리기는 했지만, 매년 기다리는 첫눈처럼, 설렘이 있는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소설가 김애란의 단편 묶음집 <바깥은 여름>을 읽었다.

이번 단편집에는 2013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침묵의 미래>도 실려 있었다. 수상작 이외에 6편의 단편 소설이 곁들어 있었다. 소설들은 차분한 어조로 가슴 아픈 마음을 머금은 체 독자를 만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짤막하게나마 그의 소설을 들여다보려 한다.

*<입동> : 당신은 모르실 겁니다. 아이를 잃은 엄마는 아직 성하게 남아 있는 아이의 흔적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을요. 옹알이를 하고, 이제 글자를 조금씩 깨우친 아이가 엄마가 사는 곳과 다른 세계로 이사를 갔습니다. 아직 이 세계에 남아 있는 엄마가 할 수 있는 의식이란 무엇일까요. 작가는 자정 넘어 도배를 하자고 하는 아내의 의식이 흘러가는 과정을 남편의 눈으로 읽고 있습니다.

*<노찬성과 에반> : 어린 시절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을 키웠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 친구들과 사별을 했던 기억이 있으시다면, 당신은 죽음의 살갗을 조금은 만졌다고도 할 수 있지요. 조모와 함께 사는 찬성은 우연히 늙은 개 에반과 조우를 합니다.

그런데 에반의 삶의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에반의 털은 빳빳하다 못해 빠지고 있고, 눈과 귀는 점점 그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병원에 가보니, 개도 암에 걸릴 수 있다고 합니다. 에반을 위한 최선의 선택은 더 이상 아프지 않게 안락사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찬성은 전단지를 돌리며 돈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하필 안락사를 하러 간 날, 병원은 상중이라 문을 닫았습니다. 찬성은 그 돈을 조금씩 탕진하게 됩니다. 그러데 어느날 아픈 에반이 마치 작별 인사라도 하는 듯 찬성의 뺨을 핥는 겁니다.

그리고 며칠 후 에반이 사라졌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가 보이는 갓길에 선홍색 피가 흐르고 있는 자루를 찬성은 봤습니다. 사람들 말로는 개가 일부러 차에 뛰어 든 것 같다고도 하네요. 그것이 에반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건너편> : 대한민국 청년들은 모두 노량진에 산다는 말이 과언이 아닌 시대가 되었지요? 취업의 문턱은 높아지고, 그나마 취업한 일자리의 열악한 환경 때문에 청년들은 노량진을 억지춘향으로 돌아오고 있는 상황을 작가는 주목한 듯합니다. 이별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아니면 그 이별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내 안의 어떤 것이 사라졌다는 느낌을 작가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요. 소설의 말미를 살짝 스포일러하면, '더이상 고요할 리도, 거룩할 리도 없는, 유구한 축제의 뒷날, 영원한 평일, 12월 26일이었다'(119쪽)이라고 쓰여 있네요.

2013년 제 37회 이상 문학상작품집, 대상 수상작 김애란, 침묵의 미래
 2013년 제 37회 이상 문학상작품집, 대상 수상작 김애란, 침묵의 미래
ⓒ 문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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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미래> : 세계화를 뜻하는 글로벌이라는 단어도 이제는 식상하시죠? 거리에는 세계적 기업의 프랜차이즈가 드문드문 보이는 것이 한두 해의 일은 아니잖아요. 중국에서도 러시아에서도 콜라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을 보면 착잡한 마음도 드네요. 식생활의 문화가 어느덧 동일화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소수부족의 언어 역시 이제는 희귀화 되어 어쩌면 소설처럼 박물관이 만들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관람의 대상이 되어가는, 멸종 되어가는 언어와 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작가는 어떤 목소리로 우리에게 들려줄까요. 잠시만 조용히 해주실래요? "크허, 흐어어, 흐억"(143쪽) 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 같지만 사실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거든요.

*<풍경의 쓸모> : 저는 교수 임용을 앞둔 대학 강사입니다. 제게 아버지란 사람은 참 전형적인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부양에 대한 책임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참 열심히, 때가 되면 아버지는 제게 선물을 보내주셨죠. 그런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내가 암에 걸렸다고 제게 돈을 빌려 줄 수 있냐고 묻네요. 이것 말고는 제게는 또 다른 일이 있습니다.

곽 교수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의 차를 한번 빌려 탄 적 있습니다. 그는 약간의 반주를 걸쳤습니다. 마뜩찮았지만 그의 차를 탔습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사고가 났습니다. 그를 대신해, 저는 어차피 차도 없으니까 제가 대신 운전한 걸로 해서 사고 처리를 끝냈습니다.

그렇게 그와 저 사이에는 비밀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교수 임용이 있을 때 그 자리에 곽교수도 참여했다는 말을 제 은사님께 들었습니다. 곽교수는 저를 대면할 때와는 판이한 표정으로 임용 반대를 강력히 주장했다고 하네요. 잠깐만요. 죄송합니다. 휴대폰을 보니, 아버지께서 부고 소식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내셨네요. 참 피곤합니다.

*<가리는 손> : 엄마는 한국인이라 잘 모르는 게 많아요. 저는 아빠가 동남아쪽 사람이라고 했어요. 엄마 말로는 "재이야, 너희 아빤 여기 일하러 온 거 아니야. 공부하러 온 사람이었어. 고향집에 하인도 있었대."(204쪽). 그러면 뭐하겠어요. 난 아빠를 보지 못했죠. 엄마에게 한번은 물어본 적도 있어요. 왜 헤어졌는지. 엄마는 제대로 답을 해주지 않았어요. 서로 성격이 안 맞으면 민주주의이니까 토론을 했어야지.

사실 최근에 엄마를 속상하게 만든 일이 있었어요. 박스를 줍는 할아버지가 중학생들에게 맞아서 그만 돌아가셨어요. 그 현장에 저도 있었는데요. 그만 그 모습이 그대로 근처 블랙박스에 찍혔습니다. 영상이 인터넷에 퍼졌어요. 엄마와 함께 경찰 조서를 작성하기도 했지요. 말하기는 그렇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곳이, 인형 뽑는 기계가 있는 곳이거든요. 저는 할아버지가 쓰러진 자리에서 인형을 훔쳐 달아났어요. 그 인형이 갖고 싶었어요. 엄마는 이 일을 어떻게 느끼실까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 남편이 체험활동 교육을 하던 중 사고가 발생했어요. 아이가 물에 빠진 것이죠. 남편 권도경은 아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졌어요. 그리고 남은 저는 그 남편이 살아생전 대화를 나눈 휴대폰 속 앱 시리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프로그램화된 시리가 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있었죠. 예를 들어 고통이 무엇이냐는 질문 같은거요. 그동안 사촌 언니가 휴가를 떠난다며 비워둔 언니의 집에도 다녀왔어요.

그곳에서 대학 동기인 현석을 만났죠. 그에게는 도경이와는 헤어졌다고 둘러댔죠. 여행 동안 장미색 비강진이라는 피부병도 앓았어요. 여행을 돌아와서 보니 편지 한 통이 도착해 있네요. 남편의 장례식 때도 오지 못한 아이의 누나 편지였어요. 편지의 내용보다 먼저 보인 것은 "글씨를 잘 알아볼 수 있게 몇 번이나 연습했을 문장들이 직선 위에 불안정하게 서 있는"(265쪽) 형체였어요. 그때서야, 남편은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자각했어요.

쓰고보니 어쩌면 이 소설은 아무에게도 선물하지 않아야 하는 건 아닐까 싶다. 그래도 만약 당신이 특히 연말에 괜찮다고 위로해야 할 상대가 있다면, 힘내라는 상투적인 말을 해야 하는 경우라면,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침묵 속에 무언가를 건네주고 싶다면, 조용히 이 소설을 선물 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값싼 동정으로 수식한 말이 아니어야 한다면 더욱 그렇다.

덧붙이는 글 | 김애란, <바깥은 여름>, (문학동네/2017), 전체 270쪽, 값 13,000원



바깥은 여름 (여름 한정판 리커버)

김애란 지음, 문학동네(2017)


태그:#김애란, #이상문학상, #바깥은 여름, #침묵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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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생. 전남대학교 일반대학원 문화재협동학 박사과정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석사. 명지대 문예창작학과졸업. 융합예술교육강사 로컬문화콘텐츠기획기업, 문화마실<이야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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