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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 남파고택의 초당채. 현재 고택에 살고 있는 종손(박경중)의 6대조인 박승희가 1884년에 지었다고 전해진다.
 나주 남파고택의 초당채. 현재 고택에 살고 있는 종손(박경중)의 6대조인 박승희가 1884년에 지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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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나주는 고대 영산강 문화를 꽃피웠던 고장이다. 고려 성종(983년) 때 12목 가운데 하나인 나주목(羅州牧)이 설치돼 1000년 동안 이어지기도 했다. '천년목사고을'로 불리는 이유다. 그만큼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다.

한 달도 채 안 남은 2018년은 '전라도'라는 지명이 탄생한 지 1000년이 되는 해다. 1018년 전주 일원의 '강남도'와 나주 일원의 '해양도'를 합해 '전라도'라 명명했다. 그 중심은 전주와 나주였다.

나주에 독특한 역사문화 유산이 지천인 이유다. 나주목의 객사로 사신과 관리들이 묵어가던 금성관을 비롯해 목사내아, 정수루, 남고문 등이 있다. 나주향교의 역사도 깊다.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남파고택의 안채 앞에서 풍물놀이패가 지신밟기를 하고 있다. 고택의 안채는 박경중의 고조인 남파 박재규가 1917년에 지었다고 전해진다. 언뜻 관아 건물과 비슷하게 생겼다.
 남파고택의 안채 앞에서 풍물놀이패가 지신밟기를 하고 있다. 고택의 안채는 박경중의 고조인 남파 박재규가 1917년에 지었다고 전해진다. 언뜻 관아 건물과 비슷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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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 샛골나이 기능보유자 고 노진남의 남편 최석보 어르신이 샛골나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나주 샛골나이는 목화솜에서 씨앗을 분리하고 솜을 부풀려 무명실을 만들고, 그 실로 무명베를 짜는 과정을 옛 방식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나주 샛골나이 기능보유자 고 노진남의 남편 최석보 어르신이 샛골나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나주 샛골나이는 목화솜에서 씨앗을 분리하고 솜을 부풀려 무명실을 만들고, 그 실로 무명베를 짜는 과정을 옛 방식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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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나주의 종가 옛집을 찾아간다. 남파고택과 나주임씨 대종가 그리고 샛골나이 등이다. 종가와 고택은 우리가 모를 뿐더러, 왠지 모를 중압감이 느껴져 찾기가 다소 부담스럽다. 하지만 알고 보면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이다.

남파고택으로 간다. 나주 시내 중심가에 있는 밀양박씨 청재공파의 종갓집이다. 남도의 상류주택 구조를 지닌 전형적인 양반집이다. 전남도내 단일 건물 가운데 가장 큰 개인주택이다.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제263호)로 지정돼 있다.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문간채, 초당채 등 8동이 남아 있다. 남도를 대표하는 종갓집 가운데 한 곳이다.

남파고택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집이 초당채다. 현재 이 집에 살고 있는 종손(박경중)의 6대조인 박승희(1814∼1895)가 1884년에 지었다. 안채는 고조인 박재규(1857∼1931)가 1917년에 지었다. 관아와 비슷하게 생긴 건물이다. 한때 '박경중가옥'으로 불렸다. 박재규의 호를 따 '남파(南坡)고택'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남파고택에 보존돼 있는 민구류와 공예품들. 시대별로 골고루 갖추고 있어 가치가 높고, 호남지역사는 물론 한국근현대사 연구의 귀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남파고택에 보존돼 있는 민구류와 공예품들. 시대별로 골고루 갖추고 있어 가치가 높고, 호남지역사는 물론 한국근현대사 연구의 귀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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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파고택에 보존돼 있는 옛 나무도시락. 나무로 만든 서랍을 열면 밥과 반찬을 담을 수 있는 세 개의 사각 나무접시가 들어 있다.
 남파고택에 보존돼 있는 옛 나무도시락. 나무로 만든 서랍을 열면 밥과 반찬을 담을 수 있는 세 개의 사각 나무접시가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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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도 건물이지만, 이 집에 보존돼 있는 근현대 유물의 가치가 드높다. 가구와 공예품을 중심으로 1000여 종, 1만여 점에 이른다. 그것도 시대별로 골고루 갖고 있다. 호남지역사는 물론 한국근현대사 연구의 귀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고택의 옛 주인 남파는 재테크가 남달랐다. 1904년 1552마지기였던 토지를 17년 만에 2912마지기로 늘렸다. 남파는 근검절약도 솔선했다. 물건을 살 때마다 물건값과 구입 시기, 구입처, 용도 등을 꼼꼼히 적었다.

한편으로는 소작인들에게 소를 나눠줘 기르도록 했다. 자립심을 키워주려는 배려였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쌀 수백 석도 선뜻 내놓았다. 마을주민들이 휼민비를 세웠다. 한말 의병활동을 하다 붙잡힌 주민들을 풀어주는 데도 일조했다.

 옛 장독대와 어우러진 나주 남파고택. 남도의 상류주택 구조를 지닌 남파고택은 밀양박씨 청재공파의 종갓집이다.
 옛 장독대와 어우러진 나주 남파고택. 남도의 상류주택 구조를 지닌 남파고택은 밀양박씨 청재공파의 종갓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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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파고택에 살고 있는 종손 박경중 씨가 집안의 내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 씨는 나주문화원장과 전남도의원을 지냈다.
 남파고택에 살고 있는 종손 박경중 씨가 집안의 내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 씨는 나주문화원장과 전남도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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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의 집안사람들은 독립운동에도 깊이 관여했다. 고택의 사랑채를 지은 박경중의 증조 박정업(1884∼1936)이 1900년대 초에 만든 태극기가 3.1운동 때 사용됐다. 해방 이후 기념식에도 게양됐다. 지금도 색상이 선명하다.

독립운동과 진보단체 활동의 정수는 박준삼(1898∼1976)이었다. 박정업의 아들이면서 지금 이 집에 살고 있는 종손 박경중의 할아버지다. 박준삼은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21살 때 3.1운동에 가담했고, 옥살이를 했다.

1926년엔 나주청년동맹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창씨개명도 거부했다. 해방 후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나주지회 위원장을 지냈다. 나주지역에 학교도 세웠다. 공부를 하려는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돈을 대주기도 했다.

 옛 나주역 전경. 1929년 이곳에서 일본인 남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의 머리카락을 잡고 희롱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단이 됐다.
 옛 나주역 전경. 1929년 이곳에서 일본인 남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의 머리카락을 잡고 희롱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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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년대 초에 지어진 나주임씨 대종가. 전형적인 전라도의 사대부 가옥이다.
 1900년대 초에 지어진 나주임씨 대종가. 전형적인 전라도의 사대부 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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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발단도 이 집안과 관련 있다. 광주학생운동은 나주역에서 일본인 남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의 머리카락을 잡고 희롱한 사건이 발단이었다.

당시 일본 학생에게 머리채를 잡혔던 여학생 박기옥과 일본 학생들과 충돌한 남학생 박준채가 이 집안의 사람들이었다. 박기옥은 박정업의 동생 딸, 박준채는 박준삼의 동생이었다. 모두 이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나주임씨 대종가는 나주시 회진면 백호문학관 뒤편에 있다. 전형적인 전라도 사대부의 가옥이다. 본채와 사랑채, 부조묘 등으로 이뤄져 있다. 각각 담장으로 구분됐다. 안채가 1900년대 초에 지어졌다. 신걸산을 등지고 영산강을 바라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의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 나주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나주임씨 대종가 전경. 본채와 사랑채, 부조묘 등이 담장으로 구분돼 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에 자리하고 있다.
 나주임씨 대종가 전경. 본채와 사랑채, 부조묘 등이 담장으로 구분돼 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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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에 있는 백호문학관 전경. 평양으로 가는 길에 송도에 들러 기생 황진이의 묘에 큰절을 하고 추모시를 읊은 백호 임제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공간이다.
 나주에 있는 백호문학관 전경. 평양으로 가는 길에 송도에 들러 기생 황진이의 묘에 큰절을 하고 추모시를 읊은 백호 임제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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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씨 대종가 앞에 있는 백호문학관은 황진이와 엮이는 백호 임제(1549∼1587)를 기념하는 공간이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홍안을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느냐/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것을 슬퍼하노라'

백호가 평안도사(平安都事)직을 받아 평양으로 하는 길에 송도에 들러 황진이 묘에 큰절을 하고 읊었다는 추모 시다.

백호는 이 일로 파직됐다. 그가 기생 묘에 큰절을 하고 추모시를 읊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대신들이 노발대발했다. 평안도사의 임기를 마치고 고흥현감으로 부임한 직후 파직됐다. 그의 나이 36살 때였다.

백호는 술과 여자를 가까이 했지만, 본디 조선사회를 지배하던 사대주의를 거부했던 인물이다. 조선을 중국의 변방 정도로 여기던 나약함을 꾸짖었다. 헛된 일이나 일삼는 조정대신들과 탐욕에 물든 관리들을 비판했다.

'그런 나라에서 산 불쌍한 우리들인데, 죽는다고 뭐 슬플 것 있느냐, 나 죽은 뒤에 곡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39살에 세상을 떠났다. 비록 짧은 생을 살았지만 백호는 차가운 지성과 뜨거운 가슴을 지닌 풍류 문인이었고 사상가였다. 700여 편의 시와 산문을 남겼다.

 한국천연연색박물관에 전시된 천연염색 천. 나주는 예부터 무명베를 이용한 쪽물 염색의 본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천연염색박물관이 들어선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천연연색박물관에 전시된 천연염색 천. 나주는 예부터 무명베를 이용한 쪽물 염색의 본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천연염색박물관이 들어선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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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샛골나이 기념관을 찾은 여행객들이 옛 방식 그대로 무명실을 뽑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샛골나이 기념관은 나주시 다시면 동당리에 자리하고 있다.
 샛골나이 기념관을 찾은 여행객들이 옛 방식 그대로 무명실을 뽑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샛골나이 기념관은 나주시 다시면 동당리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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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문학관 옆에 영모정도 있다. 임복이 1556년 정자를 세우고 어버이를 길이 추모한다고 영모정(永慕亭)이라 이름 붙였다. 나주임씨들이 조상을 기리며 학문을 논했던 누정이다. 지척에 천연염색박물관도 있다.

다시면 동당리에 중요무형문화재 제28호 샛골나이도 귀하다. 샛골은 다시면 일대를, 나이는 길쌈을 일컫는 말이다. 오래전 이 일대에서 생산됐던 무명베 '샛골나이'는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궁중에도 진상됐다.

기능보유자 노진남 할머니가 지난 9월 유명을 달리했다. 지금은 고인의 남편(최석보)과 며느리(원경희)가 길쌈을 하고 있다. 옛 방식 그대로 목화솜에서 씨를 빼내고, 솜을 부풀려 고치를 말고, 물레에 돌려 무명실을 만들고, 베틀에 걸어 무명베를 짠다. 그 과정을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다.

 나주 샛골나이 기념관 내부. 기념관을 찾은 여행객들이 최석보 어르신으로부터 샛골나이에 얽힌 얘기를 듣고 있다.
 나주 샛골나이 기념관 내부. 기념관을 찾은 여행객들이 최석보 어르신으로부터 샛골나이에 얽힌 얘기를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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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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