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기어이, 아니 당연히 병이 나고야 말았다. 영주권 한 장 달랑 들고 한 달 반 동안 호주 멜버른의 곳곳을 헤매고 다녔을 그였다. 채 5살이 안 된 아들 덕에 난 한국에 남았다. 남편의 '큐' 사인이 떨어지면 비행기에 몸을 싣기만 하기로 합의했다.

수십 년간 밀려있던 공부를 벼락치기 하는 심정이었을까. 집 구하기, 직업 찾기, 아이 유치원 등록하기, 운전면허증 바꾸기, 의료보험 등록하기, 전기, 가스, 인터넷, 수도 연결하기 등. 멜버른 공항에서 만난 남편의 수척해진 얼굴과 희끗희끗한 머리를 보며, '두 번 다시 이민은 감행하지 않기'로 또다시 합의했다.

'저러다 잘리는 거 아냐?'

출근한 지 일주일 만에 '죽을 만큼 아프다'는 남편을 두고 걱정이 앞섰다. 집 근처 GP(General Practitioner, 가정의학과)를 찾아갔다(호주에서는 응급실을 제외하면 무조건 GP를 먼저 방문해야 한다).

당황하다 못해 허탈했다. 멜버른에 와서 처음으로 병원이란 곳을 방문한 우리에게 의사는 말했다.

"몸살이나 감기는 약이 아니라 휴식으로 회복해야 해요(물론 합병증이 있으면 처방함). 출근하지 말고 집에 가셔서 푹 쉬시고 이틀 뒤에도 불편하다면 다시 방문하세요."

한국의 타이레놀과 유사. 열나거나 진통이 심할때 복용함.
▲ 호주 국민약 파나돌 한국의 타이레놀과 유사. 열나거나 진통이 심할때 복용함.
ⓒ 이혜정

관련사진보기


의사는 회사에 제출하라며 소견서 한 장을 쥐여줬다. 한 주먹의 약과 진통제 주사까지 기대하고 갔는데, 호주의 엄격한 의료시스템만 확인하고 왔다. 남편은 의사 말에 따라 집에서 '시체 놀이'를 하며 호주인의 '국민 약'인 파나돌(한국의 타이레놀과 유사, 처방 없이 약국에서 구매 가능)을 복용했고, 4일간 결근했다.

믿을 수 없었다. 일주일 출근한 신입 주제에 '의사 소견서 제출'도 필요하지 않고, 직원들의 커뮤니티 공간에 '결근 메시지'만 남기면 된다니. 남편에게 전화통화라도 하라고 다그쳤다. 사장이든 팀장이든 결재 라인에 있는 상사에게.

법적 권리를 누리는 게 당연한 사회

남편이 핸드폰 안의 직원 커뮤니티를 잠금 해제해 보여줬다. 지난 금요일 회사 직원들의 근태가 눈앞에 펼쳐졌다.

'컨디션이 별로라서'
'아픈 부인을 대신해 아이를 돌봐야 해서'
'금요일에는 회사에서 일이 집중이 안 돼서'
'휴가를 떠나서'
'출근길에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 나서 근처 도서관에서 일하려고'

저런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출근을 하지 않는다니!

"다들 미친 거 아냐? 저따위로 일하고도 월급을 받는다고?"

순식간에 남편 회사의 사장으로 빙의가 됐다. 정확히 어디서 배운 것인지 모르나, 한국 사회 곳곳에 만연한 '갑'의 말들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게다가 호주는 세계에서 최저임금이 가장 높기로 유명한 곳이 아니던가.

남편 회사의 사례는 호주에서 보편적이다. 정규직의 경우 1년에 20일(주말 포함 4주)이 정기휴가(annual leave)로, 10일이 병가(sick&carer's leave)로 보장된다. 여기서 병가는 아픈 가족을 돌봐야 하는 경우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병가를 다 사용한 경우에도 더 쓸 경우가 발생하면 무급으로 사용 가능하다.

또한 호주는 서로의 신뢰를 중요시하는 사회여서 병가를 쓸 때 별도의 의사 소견서를 제출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다수의 직장인은 본인이 아프거나 컨디션이 별로일 때 남아 있는 병가를 언제나 죄책감 없이 쓴다.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 안에서 놀거나 쉬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다. 호주에서 만난 한 지인은 발목 인대가 늘어났다고 10일 정도 병가를 내기도 했다.

그 뒤로도 비슷한 일은 계속됐다. 밤새 기침과 콧물, 열로 고생한 아들을 데리고 병원을 방문해도 '다 나을 때까지 결석시키고 푹 쉬게 하라'는 말만 돌아왔다. 심지어 학교에서도 환절기가 되면 가정통신문을 보내왔다. 아이들이 아플 경우는 학교를 보내지 말고 집에서 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본인뿐만 아니라, 함께 생활하는 교사나 다른 학생들의 웰빙(wellbeing)을 위해서라고 했다. 

약으로 견디지 않아도 되는 삶

(호주는)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 안에서 놀거나 쉬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다.
 (호주는)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 안에서 놀거나 쉬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다.
ⓒ unsplash

관련사진보기


일 년 넘는 멜버른 생활 동안 아들은 중이염으로 딱 한 번 항생제를 처방받았다.

"왜 약이 항생제 하나뿐이죠?"

나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오지(Aussie, 호주인을 일컫는 말) 약사 앞에서 결국 한국인 티를 냈다. 한국에서 처방받는 아이의 감기약은 거의 '종합선물세트'이지 않은가. 항생제, 위장약, 해열제, 알레르기 약, 콧물약, 기침약이 마구 섞인.

한국에선 '약값이 저렴하니 일단 받자'는 심정으로 의사가 처방해주는 약을 꼬박꼬박 받아왔었다. 의사의 처방이 과하다 싶어 몇 번 잘난 척을 한 적 있지만, 의사들의 일그러진 표정을 본 후부터 말 잘 듣는 환자가 됐다.

멜버른의 느슨한 일상과 노동 문화는 우리 가족을 병원 문턱으로부터 자유롭게 했다.

"내일 출근해야 하니 빨리 낫게만 해주세요."

한국에서 수도 없이 입에 달고 살았던 비참한 구걸(?)이 필요하지도 않고 통하지도 않는 사회는, 약물에 절어 있던 나의 몸을 해독시켰다. 한 달이 멀다 하고 항생제와 각종 약을 소화해야 했던 나의 위도 자유를 찾았고, 일 년에 한두 번 찾아오던 위경련의 끔찍한 기억도 희미해졌다.

"엄마, 나 오늘 컨디션 안 좋으니까 집에서 쉴래."

대신 꾀병 부리는 아들을 설득시켜 학교 보내는 행복한 고민에 빠져 산다. 멜버른에서 아이 키우는 엄마들 중 여럿이 가진 고민이다.

덧붙이는 글 | 호주의 휴가정책은 호주 노사문제 중재기관인 공정근로옴부즈맨 사이트(https://www.fairwork.gov.au/leave)를 참고했습니다. 이 글은 개인 브런치(brunch)에도 실었습니다.



태그:#약 대신 휴식, #호주, #멜버른, #멜버른의 노동문화, #멜버른의 약처방
댓글7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