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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1일 새벽, 현대미포조선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다가 노동조합(금속노조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고용승계에서 제외되어 해고를 당한 이성호·전영수씨가 울산 북구 염포동 현대중공업 출근길에 있는 성내삼거리 인근 20m 교각에 올랐습니다. 이들은 블랙리스트 철폐와 하청노동자 노동기본권 보장, 대량해고 중단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을 시작하여 지난 7월 26일 고공농성 107일 차에 고용승계에서 배제된 조합원들의 복직 합의를 이루어내고 지상으로 내려왔습니다.

9월까지 복직한다는 합의가 있었지만, 두 노동자를 포함한 4명의 동양산업개발 해고 노동자들은 가을이 지나도록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제 12월 1일, 이성호·전영수 씨가 공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사측은 100일이 넘는 시간동안 고공농성장을 지켰던 함께 해고된 다른 두 명의 노동자들에 대해 조선업 경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복직을 미루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름 무더위와 열대야를 견디면서 이루어낸 복직 합의가 잘 이행되도록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지난 여름 고공농성을 했던 이성호·전영수 씨가 땅으로 내려오던 날과 이들이 땅으로 내려온 이후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 기자 말

고공농성 마치는 날, 내려오기 직전 모습
 고공농성 마치는 날, 내려오기 직전 모습
ⓒ 이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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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감이 교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

7월 26일 새벽 6시 30분에 전영수씨에게 전화를 거니 민중가요가 들려온다. 일찍 통화하기로 전날 이야기 했던 터라 나름 일찍 연락을 했는데, 마침 아침 선전전 중이라고 한다. 전화 인터뷰는 8시로 미루어졌다. 오후 1시 30분, 이성호․전영수 씨가 107일 만에 고공농성을 마치고 땅을 밟기로 예정되어 있다.

휴가 전에 합의가 될 수도 있을 거란 예상은 했는데, 그 날이 이 날일 거란 예상을 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전날 고공농성 마무리 소식을 접하고 갑자기 마음이 바빠졌다. 급하게 위에 연락을 하니 25일은 지회 방침 상 인터뷰가 어렵다고 하여 내려오는 날 아침에 전화 통화를 하기로 했다.

8시, 전영수 씨에게 다시 전화를 하니 아침 선전전을 마치고 식사까지 마쳤다고 한다. 고공농성 마지막 메뉴는 다슬기탕이었다고 했다.

"밤에 잔다고 누웠는데 잠이 잘 안 오더라고요. 어제는 바람도 많이 불어 잠이 잘 올 줄 알았는데... 만감이 교차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느낌입니다."

전영수 씨는 내려간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다고 했다. 더운 날씨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하던 아내도 내려간다는 소식을 전하자 많이 기뻐했다고 한다.

"가방 하나 메고 올라와서 가방 하나 들고 내려가려 했는데, 가방이 하나가 늘어서 폼이 안 나오겠습니다. 가방 하나는 내 짐 아닌 척 미리 내려 보낼까 봐요."

화기애애한 농담도 오고간다. 그동안 통화한 중에 목소리가 가장 밝다. 100여 일을 생활하다 보니 짐이 많이 늘었다고 했다. 중간에 바람이 많이 불었던 날 짐을 한 번 내렸는데, 금세 다시 늘었다.

"지회에서 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최선의 방법으로 해결이 돼서 마음은 편합니다. 밑에 동지들 고생 많았는데, 휴가 전에 타결이 돼서 다행이고요."

현대미포조선 사내하청업체 동양산업개발이 폐업하면서 고용승계에서 배제되었던 조합원 4명에 대해 2017년 9월까지 복직하기로 전날 오후에 합의했다. 동양산업개발 문제 이전에 현대중공업에서 해고된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해고자들은 이미 복직이 되었거나 8월부터 순차적으로 복직할 예정이라고 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먼저 해고가 된 하청지회 조합원들보다 자신들이 먼저 복직을 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지상으로 내려와 하창민 지회장과 포옹하는 이성호(왼쪽), 전영수 씨
 지상으로 내려와 하창민 지회장과 포옹하는 이성호(왼쪽), 전영수 씨
ⓒ 이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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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팔리게 다시 쫓겨나면 안 됩니다"

영수씨에게 이번 고공농성이 그의 인생에서 갖는 의미를 묻자 자신이 갖고 있던 편견을 깬 계기가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혼자 개인적으로 옳다 그르다 판단하면서 저도 모르게 스스로 갇혀 있던 벽을 넘은 것 같습니다. 좀 더 성숙해졌어요. 위에서 하루하루 배우고 반성해서 자양분이 쌓였습니다. 앞으로 사람들을 좀 더 편하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영수 씨는 너무 쿨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까칠하게 보이기도 했던 자신이 좀 더 둥글어졌다고 이야기한다. 조합원들에게 실망을 하고 화도 내고 짜증도 냈는데, 조합원들의 마음을 잘 몰랐던 것 같다고 했다.

"올라와서 조합원들하고 개인적으로 전화를 잘 안 했어요. 내려가서 편한 상태로 이야기하려고 했던 건데요. 내려가면 조합원들과 오해가 있다면 풀고, 서운한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어요."

고공농성에 연대 왔던 사람들이 다 기억에 남지만, 특히 박준씨와 연영석씨, 류금신씨, 몸짓패 '선언' 등 공연을 해준 문화 활동가들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다른 누구보다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동양산업개발에서 함께 해고가 된 하청지회 조합원 김규엽씨와 오종환씨라고 했다.

"이 두 분이 매일 밑에서 지키고 계셨어요. 식사며 물이며 필요한 걸 밧줄로 다 올려주셨고요. 매일 와서 걱정스럽게 위를 쳐다보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저도 이 두 분을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정말 고맙죠."

지난번에 다녀간 반가운 사람들이 누구인지 다음에 이야기 해주겠다고 했던 게 생각이 나서 물어보니 광화문에서 고공농성을 했던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라고 한다. 눈빛만으로도 통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열악한 환경을 버티어 주는 조합원들, 정말 고맙습니다. 내려가서 다시 시작해야지요. 연대동지들께 감사하고 그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그 마음 안고 현장 들어가서 하청노동자들 조직해야지요. 쪽팔리게 다시 쫓겨나면 안 됩니다. 다음에는 올라가도 현장에서 올라가야죠. 안에서 싸울 겁니다. 병원 입원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입원을 다 해 보네요. 환자복도 입어보고 좋은 경험 많이 합니다."

인터뷰 중에 이성호씨의 목소리가 들린다. 짐 싸는 일정 때문에 마음이 급한가 싶어 필자의 마음도 바빠진다. 그동안 신경 써주셔 고맙다며, 내려가면 술 한 잔 하기로 한 약속 꼭 지키라는 마지막 이야기로 전영수씨의 고공에서의 마지막 인터뷰가 종료된다.

고공농성을 마치고 내려올 노동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조합원들
 고공농성을 마치고 내려올 노동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조합원들
ⓒ 이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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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지막으로 복직되면 좋은데

이어서 이성호씨와 통화를 했다. 성호씨도 잠을 몇 시간 못 잤다고 했다. 내려오는 것 관련해서 예지몽을 꾸지는 못했다고 한다.

"완벽한 승리가 아니라서 그런지... 시원 섭섭해요. 작년부터 해고된 동지들이 노숙하고 있는데, 다 복직 된 거 보고 내려가야 100% 이긴 싸움인데, 복직하는 과정에서 내려가니 아쉬워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복직되면 좋은데, 지회 방침이니 따라야죠."

그는 내려가서 아직 복직 안 된 조합원들 보면서 웃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성호씨는 이제부터 싸움이 시작이라며 내려가서 잘 싸워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가족들에게 땅으로 내려간다는 소식을 알리니 모두 기뻐하고, 아이들은 아빠가 대단하다며 축하해주었다고 한다.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될 겁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다보면 이런 상황이 또 올지도 모르는데, 다음에 더 잘 싸울 수 있는 밑거름으로 삼아야죠. 107일 동안 동지들 연대에 너무 많은 감동을 받아서 눈물을 많이 흘렸어요."

이성호 씨의 별명은 '미포 눈물'이다. 성호 씨가 2015년 미포조선 하청업체 KTK에서 해고 당하고 복직 투쟁을 할 때, 울산과학대 농성장 여성노동자들을 보고 흘린 눈물이 '미포 눈물'의 시작이었다. 그 전에는 자신만 생각하며 이기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눈물 흘릴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이런 상황이 다시 오게 된다면 다시 올라갈 거라고 했다.

"당연히 올라가야죠. 노동자가 탄압 받으면 우리 목소리를 외쳐야지요. 누가 시켜서 되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제일 먼저 손 들 겁니다."

함께 고공농성을 한 전영수씨와는 2년 가까이 알고 지낸 사이라 성격을 잘 알고 있었지만, 위에 있으면서 의견이 안 맞아 말싸움을 할 때도 있었다.

"갈수록 지치니 말 끝마다 톡톡 쏘게 되더라고요. 그 순간뿐이고, 시간 지나면 씩 웃고 풀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더 가까워진 거 같아요."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위에 있으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많이 느끼기도 했다. 이곳에 있으면서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여러 번 했다.

"19년 동안 함께 살면서 아내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한 게 결혼 초에 몇 번도 안 될 거예요. 근데 이 위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세 번 했습니다. 고맙고 사랑한다고... 정말 소중한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 힘들게 투쟁하는 동지들이 많은데, 용기 잃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연대 동지들 하청지회 동지들, 너무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 진짜 하고 싶습니다."

현수막 등 짐이 많다고 했다. "12시까지 짐정리가 끝날지 모르겠다"며 성호씨가 웃는다.
내려가면 병원에 갔다가 107일 만에 면도와 이발을 하고, 꿈에 그리던 사우나에 갈 계획이라고 했다. 연대해준 동지들에게 인사하러 다녀야해서 병원에 얼마 못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도 한다.

성호씨는 어릴 때부터 공부 하는 게 싫어서 가출도 했었는데, 내려가면 책을 많이 읽으면서 활동하고 싶다고 했다. 위에 있을 때 고공농성장에 연대 온 이들이 올려주어 벨 훅스의 <페미니즘>을 읽으면서 반성을 많이 했다고 한다.

"위에서 꾸준하게 윗몸 일으키기랑 제자리 걸음을 많이 해서 공중에서는 지장이 없었는데, 내려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전영수 동지 눈치가 보여서요... 짐정리 때문에..."

더운데 시원한 물 마셔가며 하라는 성호씨의 인사를 끝으로 성호씨와의 고공에서의 마지막 인터뷰가 종료된다. 두 하청노동자가 107일 만에 땅을 밟은 느낌이 어떨지 궁금해진다.

땅을 밟고 발언하고 있는 전영수, 이성호 씨
 땅을 밟고 발언하고 있는 전영수, 이성호 씨
ⓒ 이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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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한 달 남짓 시간이 흘러 이성호 전영수씨의 안부가 궁금해서 연락을 했다. 두 사람 다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던 고공농성 때보다 전화통화 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이성호씨는 그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 만나느라 정신이 없다고 했다. 울산과학대와 현대중공업 정규직 고공농성 등에 연대도 다니고 있다고 했다. 결국 일주일 만에 그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성호씨는 그사이 운전면허증도 땄다고 했다. 얼마나 바빴는지 아직 집에 가서 가족들을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전영수씨 역시 지회 일정이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아는 형님, 동생과 술 한 잔 하고 들어왔다는 영수씨와 통화를 했다.

영수 씨는 고공농성을 마치고 땅을 밟던 날, 주저앉고 키가 작아진 느낌이 들어 이상했다고 이야기했다. 내려와서도 한동안 방에서 못자고 거실 바닥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방에서 자다가도 다시 밖에 나가서 잤다. 성호씨는 내려와서 시각적인 불편함을 느꼈다고 했다.

"땅을 밟으니 사람이 작아 보이더라고요. 와이드 화면처럼 작으면서 커져 보이는... 사람이 바닥에 붙어서 가는 거 같고, 차도 퍼져 보였어요. 오래 가지는 않더라고요."

영수씨와 성호씨는 7월 26일 날 내려와 병원에 입원했다가 일주일 만에 퇴원했다. 다행히 몸에 큰 문제가 있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 다 근력이 떨어져 운동은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내려올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정확히 표현을 못하겠어요. 그냥 덤덤하면서도 울컥하는... 지금은 거기에 있었나 싶기도 해요. 뭔가 안 되서 올라간 거니까 좋은 시간이나 편한 시간은 아니었죠. 한 달이 지나니까 좋았던 시간도 아니고 나빴던 시간도 아니었던 거 같아요. 107일 동안 대단한 투쟁 하고 온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더라고요. 아무나 할 수 없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겁니다."

영수씨는 고공농성 했던 107일의 시간이 그립다기 보다는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라고 했다. 모든 해고자들이 복직하는 걸 보고 내려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말 많이 울 거라 예상했던 '미포눈물' 이성호씨는 내려오는 날 별로 울지 않았다고 했다. 영수씨도 이 점이 의외였다고 이야기한다.

"하청지회 하창민 지회장이 발언 첫마디부터 우는 거예요. 얼마나 많이 눈물을 흘리시는지 저는 울지를 못했어요. 동지들 만난 건 반가웠지만, 복직 안 된 조합원들한테 미안해서... 다 복직되고 내려왔어야 했는데... 내려오고 나서 성내 삼거리를 10번 이상 지나갔어요. 고가 도로 위를 지나갔는데, 저한테는 거기가 고통스런 장소가 아니었으니까 별 생각이 들진 않았어요. 힘들었으면 생각이 많았을 텐데, 알려서 복직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요. 농성할 때는 거기가 왕복 4차선인 줄 알았는데, 2차선이더라고요. 생각보다 좁았어요. 지금은 위로 다니니까 좋죠."

성호씨 역시 100% 이겨서 내려오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했다. 이제 두 사람에게 내려가면 가장 먼저 또는 꼭 하고 싶었던 버킷리스트를 확인할 시간이다. 영수씨에게 그의 버킷리스트 1번이었던 '일상생활'을 많이 했는지 묻자 그는 생각 외로 담담하게 답변한다.

"고공농성 하면서 일상생활을 못해서 아쉬움이 많죠. 근데 순식간에 다 하면 안돼요.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천천히 조금씩 하고 있어요."

8월 초에 여름휴가를 맞아 성호씨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하청지회 조합원 단합대회가 있었다. 바닷가에 가서 수영도 하며 신나게 놀았다고 했다. 밤새 술 먹으며 이야기도 많이 하고, 축하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가 그토록 꿈꾸었던 조합원 단체 사진도 찍었다고 한다. 성호씨의 버킷리스트 1번, 영수씨와 함께 사우나를 갔는지 물었다.

"영수 동지가 병원에서 바로 면도하고 병원 샤워실에서 먼저 씻은 거예요. 사우나는 영수 동지하고 같이 못가고, 퇴원하고 혼자 갔습니다."

한마디로 영수씨가 '배신을 때린'거다. 이 상황에 대해 영수씨는 '쿨' 하게 반응한다.

"병원 샤워실에서 때 벗기고, 수염은 가위로 자르고 했죠. 사우나 같이 가는 것도 좋지만, 서로 생활이 다르니까요."

내려와서 첫 술을 마신 날도 잊을 수 없는 날이다. 퇴원하던 날, 두 사람이 함께 술을 마셨다고 했다. 영수씨는 첫 술을 넘길 때의 느낌을 "아~~" "하~"로 표현했다. 두 사람 모두 100여일 만에 마시는 술이 잘 안 넘어갔다고 이야기한다. 술 안 마셔도 되는 체질이 된 거 같으니 이참에 술을 끊지 그랬냐고 하자 영수씨가 정색을 한다.

"저는 술 끊으라 하면 인생 끊습니다."

통화 당시, 두 사람은 9월 말에 출입증을 받고 10월 추석 연휴가 끝난 후에 복직할 예정이라고 했다. 성호씨는 빨리 복직하고 싶다고 한다.

"빨리 복직해서 동료들과 술 한 잔 하면서 하청지회 가입 시키고, 하청노동자 현실을 알리고 싶어요. 현장에서 억울한 일 당하지 않게 힘을 모아야죠. 노동법 공부도 하려고 생각중입니다. 가족한테도 더 잘 해야죠."

다시 일을 시작하면 힘들지 않겠냐고 하니 힘들어도 견딜 수 있다고 한다. 영수씨는 복직해서 현장 노동자들을 어떻게 만날지 고민이라고 했다. 고공농성 때부터 이어지고 있는 고민이다.

"지금도 현장은 여전히 임금이 삭감되고, 밖에는 해고 된 조합원들이 있는 상태에요. 전화를 해도 안 받는 동료들이 있어요. 마음이 아프죠. 복직해서 들어가는 의미가 크지만, 기대감은 별로 없습니다. 기대를 해서도 안 되고요. 노동조합도 같이 하고, 자연스럽고 편하게 웃으면서 일하는 현장이 되면 좋겠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 어떻게 하청노동자들을 만날지 고민하고 있어요. 밑에가 좋죠. 사람은 역시 땅바닥을 밟고 살아야 해요."

영수씨는 고공농성 한 것에 대한 후회는 없지만, 역시 땅이 좋다며 아직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를 걱정한다. 공장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첫 걸음에 따스한 겨울 햇살이 함께 하기를 바란다.


태그:#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울산 고공농성, #비정규직, #현대미포조선, #이성호 전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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