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어머니라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아닙니다. 어머니는 정말 여장부셨습니다. 중국에서 아기를 업은 채 말을 타고 다니며 독립문서를 전달하셨다고 하니... 지금 생각해도 여자의 몸으로 어찌 그러한 일을 하셨을까 싶습니다."

오항선(吳恒善, 1910.10.3.~ 2006.8.5.) 애국지사의 아들인 권혁우(74) 광복회 부산 남부 연합지회장은 기자를 만나자 마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실타래 풀듯 풀어놨다. 지난 10일 오후, 기자는 오항선 지사의 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자 부산 남구 못골로(대연동)에 있는 광복회 연합지회 사무실을 찾았다.

18세부터 시작한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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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장즘 오항선 지사의 건국훈장 애국장 훈장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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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오항선)은 98세(실제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만,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속옷을 빨아 입을 정도로 정정하셨습니다. 몸도 건강하셨지만 정신은 더욱 또렷하셨지요. 저희들에게 자주 당신이 독립운동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셨기에 마치 제가 독립운동을 한 것처럼 그 당시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이는 권혁우 지회장 곁에서 부인 이용순(68)씨가 시어머니(오항선)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다. 사이좋은 고부간의 지난 시간들을 엿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오항선 지사 부모의 고향은 황해도 신천으로 부모님은 일찍이 만주로 진출해 오항선 지사는 1910년 10월 만주 길림성 석두하자에서 태어났다. 독립군을 돕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린 나이지만 조국을 일제에 빼앗기고 망국노로 이국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실에 일찍 눈을 떴다. 그러나 독립군의 뒷바라지를 하던 아버지가 조선을 침탈한 일제에 항거해 자결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거기다가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 오해산 역시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일찍부터 철이 들었던 오항선 지사는 18세 때부터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김좌진 장군의 부하가 돼 무기 운반과 은닉 및 연락 책임을 도맡아 목숨을 건 독립운동에 전력을 다했다. 오항선 지사는 1929년 1월 신민부 소속 독립운동가 40여 명이 길림성에서 회의를 하고 있을 때, 하얼빈에 있는 일본 영사관원과 중국군의 습격을 받아 유정근 등 12명이 체포되자 숨겨둔 무기를 안전한 곳으로 운반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김좌진 장군 동지들에 경제지원-무기운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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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남구신문에 실린 오항선 지사의 독립운동 이야기. 2005.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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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김좌진 장군이 죽자 부인 나혜국과 함께 장군 부하 동지들의 경제생활을 지원했으며, 그해 1월에는 암살당한 김좌진 장군의 복수를 모의한 고강산·김수산 등 6명에게 권총을 전달했다. 무기를 전달하는 과정은 목숨을 내놔야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오항선 지사는 두려움 없이 무기 운반의 임무를 완수했다.

오항선 지사는 1930년 10월 독립군 활동을 돕던 중, 자신의 집에서 남편 유창덕과 함께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는 1931년에 4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아 길림성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7개월 만에 출소했다. 그러나 그해 10월 남편 유창덕이 일본군에게 사살되는 불행을 겪게 된다. 그의 나이 31세 때의 일이다.

홀로 돼 독립운동을 이어가던 오항선 지사는 1935년 안중근의 누이동생인 안성녀의 아들 권헌 선생과 재혼해 함께 독립운동에 힘썼다. 권헌 선생은 당시 중국에서 인쇄소와 정미소를 운영하며 독립군에게 군량미를 조달하는 등 조국독립의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광복을 맞아 꿈에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을 때는 빈털터리였다. 중국 내에서 기반을 잡아 활동하던 모든 것들을 중국 땅에 두고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시어머니는 안중근 의사 여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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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항선 지사의 시어머니는 안중근 의사 여동생 안성녀 여사다. 2005년 8월 2일 <중앙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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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녀 안중근 의사 아들 준생씨의 장례식 모습. 동그라미 속 인물이 안성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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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한 칸도 없이 시작한 부산 생활은 꿈에 그리던 조국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항선 지사는 시어머니인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 안성녀 여사와 1남 2녀의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키우느라 삵바느질 등 온갖 거친 일을 마다않고 닥치는대로 해야 했다. 그래서일까? 자신의 며느리에게만은 그러한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없는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도 며느리가 사회봉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해줬다.

"정말 시어머님(오항선 지사)은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저희들 역시 맨손으로 고국에 돌아오신 부모님 밑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생을 하며 살아왔지요. 그러나 가진 것이 없는 생활이었지만 어머님은 당신이 집안 살림을 맡아하시면서 며느리인 저를 내보내 사회봉사에 전념하도록 후원해주셨습니다. 수십 년 동안 적십자봉사단 등에서 제가 봉사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시어머님 덕입니다."

독립운동이 국가를 위한 일이라면 적십자 활동 등의 봉사활동은 사회를 돕는 일이다. 시어머니는 독립운동에 평생을 쏟고, 며느리는 사회봉사에 평생을 쏟은 고부간의 헌신이 유달리 돋보였다. 어디 그뿐인가. 오항선 지사의 시어머님인 안성녀 여사는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평생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으니 오항선 지사로서는 늘 마음이 바늘방석에 앉은 듯했다.

부산시장 지팡이로 내려 친 할머니,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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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 고생으로 한 세상을 살아온 오항선 지사의 아들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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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선 지사의 아들인 권혁우 지회장은 안성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어렴풋이 하고 있었다. 광복의 기쁨을 안고 건너온 조국 땅에서 너무나 살아갈 길이 막막해 한번은 안성녀 할머니가 어린 손자 혁우를 데리고 부산시장실을 찾아갔다고 한다.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귀국해 방 한 칸도 없이 살아가서야 되겠느냐고 시장에게 의논 겸 도움을 요청하러 간 것이다.

허름한 옷을 입은 웬 할머니가 어린 손자를 데리고 와서 시장을 면담하겠다고 하니 비서실에서 행색만을 보고 '시장님이 안 계신다'고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안성녀 할머니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렇다면 시장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사실 시장은 시장실 안에 있었다. 시장실 안에 있던 시장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안성녀 할머니는 지팡이로 대뜸 시장을 후려쳤단다.

그러면서 "내가 누군지 아나? 시장이 있으면서 왜 없다고 하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느라 오만 고생을 하고 돌아와서 방 한 칸도 없이 살아야 하는 사정을 말하러 온 늙은이에게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고 혼줄을 냈다고 한다.

독립투사 오라버니 안중근의 피가 흐르는 여동생답게 안성녀 여사는 정정당당히 시장을 면담하고자 했으나 그들의 졸렬한 처사에 호통을 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장실을 나와 버렸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인 안성녀 여사의 손자이자 독립운동가 오항선 지사의 아들인 권혁우 지회장과 부인 이용순씨는 장시간 동안 당시 할머니와 어머니가 살았던 시대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줬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이들도 오항선 할머니를 존경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항선 지사가 틈틈이 했던 말 "역사 반복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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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오항선 지사의 독립운동과 할머니 안성녀 여사에 대한 이야기를 기자에게 들려주는 권혁우-이용순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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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오항선 지사는 틈나는 대로 "일제에 억압받던 과거의 역사를 후손들이 되풀이하지 않도록 청년들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해 독립운동은 지속돼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2005년 98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기까지 오항선 지사가 한시도 정신을 놓지 않고 운명하는 그 순간까지 대한민국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가슴이 뭉클했다. 오항선 지사에게 조국, 대한민국은 목숨 그 자체였음을 대담을 마치면서 가슴으로 느꼈다.

오항선 지사는 국가로부터 독립운동의 공훈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오항선 지사에 앞서 독립운동을 한 시어머니 안성녀 여사는 후손들이 여러 번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하고 있지만 번번이 반려되고 있다면서 권혁우 광복회 부산 남부 연합지회장은 안타까워했다.

두 부부가 내민 빛바랜 사진과 할머니 안성녀 여사와 어머니 오항선 지사의 이야기가 실린 오래된 신문 기사만이 "그날의 활약"을 대변할 뿐 검소한 사무실의 작은 창밖은 짧은 늦가을 해가 어느새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