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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초 입동을 코앞에 둔 경북 봉화는 추색이 완연하나, 사람들 일손은 겨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봉화 겨울의 밤은 길고 낮은 짧다. '하늘도 세 평'이라는 승부역 역무원의 시구를 빌릴 것 없이, 좁디좁아 믿을 수 없는 것이 봉화의 하늘이다. 어느 날 갑자기 닥칠 겨울에 앞서 사람들 손이 한발 먼저 움직이고 있다.  

봉화 만추

입동을 하루 앞둔 11월 6일, 봉화는 추색이 완연하나 봉화사람들 일손은 겨울을 타기 시작했다.
▲ 청암정의 늦가을 입동을 하루 앞둔 11월 6일, 봉화는 추색이 완연하나 봉화사람들 일손은 겨울을 타기 시작했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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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마을이라 까치구멍 집을 짓고 살던 설매리 사람들은 가을걷이를 일치감치 끝냈다. 배추만은 서리 맞아 속이 찰 때까지 홀로 남겼다.
▲ 설매리의 늦가을 추운 마을이라 까치구멍 집을 짓고 살던 설매리 사람들은 가을걷이를 일치감치 끝냈다. 배추만은 서리 맞아 속이 찰 때까지 홀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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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가 매서운 날씨로 치면 봉화에서 제일가는 상운면 설매리. 보온이 환기나 통풍보다 중요해 까치구멍같은 집을 짓고 살던 마을이다. 가을걷이를 일찌감치 끝내 벼 밑동만 남은 설매리 논밭은 활량하다. 그나마 배추만은 서리를 맞아야 속이 차고 아삭거리는 맛이 난다며 밭에 홀로 남겼다.  

하늘은 좁고 낮은 짧지만, 한낮 햇볕은 곱고 따사롭다. 호박, 무청, 가지, 튀각용 고추, 감, 무…. 집집이 나물이나 반찬이 될 만한 것은 모조리 내다 말리고 있다. 무청은 옛집 처마 그늘에서 숨죽고 무는 검게 바랜 춘양목 마루에서 질깃한 말랑무로 변신 중이다. 반쯤 말린 감이 반찬이 될 거라고는 봉화의 한 음식점에서 처음 먹어보고 알았다.

사랑채 처마 밑에 대발 대신 곶감이 대롱대롱. 마루에는 안채 후원에서 딴 대추가 동글동글.
▲ 만산고택 곶감 말리기 사랑채 처마 밑에 대발 대신 곶감이 대롱대롱. 마루에는 안채 후원에서 딴 대추가 동글동글.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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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양면 만산고택 사랑채 처마 밑에서 곱게 깎인 감은 대발처럼 대롱대는데, 그 모양이 일품이다. 누구 작품일까 생각하고 있는데, 막 춘양성당에 다녀온다며 인사말을 건네는 종부를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후덕하고 손재주 있게 생긴 종부의 솜씨인 게로군.

누정(樓亭) 고을 봉화

봉화는 태백(太白)과 소백(小白), 양백(兩白) 바로 아래에 있는 땅이다. 예로부터 산이 깊고 물이 풍부해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살기 좋은 고을이라 했다. 사화를 피하거나 병자호란이나 을사늑약 같은 시대의 아픔을 멀리하고 숨어 살기를 자처한 선비들이 줄을 이어 봉화에 숨어들었다. 이들과 관련 있는 누정(樓亭)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봉화는 정자의 고을로 전국 600여 개의 정자 중에 봉화에만 103개 남아있다.'

바래미마을 만회고택에 들렀을 때 종손이 내게 건넨 첫마디다. 그의 말투에는 봉화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103개 정자에는 정(亭), 사(舍), 당(堂), 각(閣), 헌(軒), 서당(書堂)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정자는 외지고 풍광이 수려한 산하에 화룡정점 격으로 들어서기 마련인데, 봉화는 좀 다르다. 닭실마을 청암정, 황산마을 도암정, 창마마을 장암정, 춘양면 의양리 한수정, 법전리 버저이마을의 경체정과 이오당 등 수많은 봉화 정자들은 마을이나 마을 주변 언덕에 들어서 추모, 후학양성, 학습, 교류공간으로 이용됐다. 어차피 봉화는 두메산골 고을이기 때문에 풍경이 수려한 곳에 세운 다른 고을 정자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봉화 정자는 마을 곁에 둔 경우가 많다. 한수정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천가에 있어 옛 정취는 지금과 사뭇 달랐을 거로 짐작된다.
▲ 한수정(寒水亭) 정경 봉화 정자는 마을 곁에 둔 경우가 많다. 한수정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천가에 있어 옛 정취는 지금과 사뭇 달랐을 거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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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광이 수려한 협곡에 있다. 태백오현이 모여 결의를 다지고 풍류를 즐기던 장소다.
▲ 와선정(臥仙亭) 정경 풍광이 수려한 협곡에 있다. 태백오현이 모여 결의를 다지고 풍류를 즐기던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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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선정(臥仙亭)은 숨어 살기 좋다는 봉화에 가장 어울리는 정자가 아닌가 싶다. 춘양 중심에서 약 10여 리 떨어진 협곡 벼랑에 서 있다. 문수산 협곡을 흐르는 폭포와 냇물, 노송이 빚어내는 풍광이 수려한 곳이다. 지금도 찾는 이가 없어 스산하기만 한데, 이 정자가 세워질 때에는 오죽했을까. 병자호란 후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둔한 태백오현(太白五賢), 심장세, 홍우정, 정양, 강흡, 홍석이 이곳에서 모여 시론을 논하고 풍류를 즐기며 대명절의를 지켰다. 

봉화의 오래된 마을들

어쩌면 봉화가 숨어 살기 좋다는 얘기도 한양을 중심으로 보는 편견인지 모른다. 안동, 경주를 중심으로 보면 두메일지 몰라도 문화적으로 변방은 아니다. 신라 사람들이 신성시한 태백산 아래에 있고 고구려 문물이 죽령을 넘어 처음 닿는 고을이 영주, 봉화다. 영주에 '태백산부석사'를 세우고 봉화에 태백산을 향해 앉아있는 북지리마애불을 새겼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이런 저런 사연을 안고 안동 사족(士族)들이 몰려와 집성마을을 이뤘다.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봉화에는 양반문화가 변질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고색창연한 오래된 마을이 여럿 있다.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을 중심으로 해저리 바래미마을, 거촌2리 황산마을, 거촌1리, 3리에 외거촌마을이 있다. 물야면 오록리에는 창마마을이, 법전면 법전리에는 버저이마을이 있다. 모두 봉화에서 손꼽히는 오래된 집성마을이다.

닭실마을을 빼고 봉화를 얘기하기 어렵다. 봉화에서 알아주는 가문, 안동권씨 집성마을로 봉화읍 유곡리에 있다. 내성천 가에 있는 삼계서원을 시작으로 석천계곡의 석천정사, 닭실마을 청암정은 물론 마을 밖 토일(유곡2리)에 있는 서설당, 멀리 춘양면 한수정까지 모두 안동권씨 집안과 관련 있는 옛집들이다. 

안동권씨 집성마을로 봉화읍 유곡리에 있다.
▲ 닭실마을 정경 안동권씨 집성마을로 봉화읍 유곡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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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김씨집성마을로 봉화읍 해저리에 있다.
▲ 바래미마을 정경 의성김씨집성마을로 봉화읍 해저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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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래미마을 또한 닭실과 견줄만한 어엿한 반촌마을이다. 의성김씨 집성마을로 봉화읍 해저리에 있다. 만회고택에서 토향고택, 남호구택, 소강고택, 해와고택, 김건영가옥, 개암종택, 팔오헌종택까지 반가 고택들이 촘촘하게 들어차 있다. 마을 이름은 해저(海底), '바다 밑'에서 왔다. 이름 말마따나 마을이 움푹 들어가 있어 토향고택이나 개암종택 뒤에서 쉽게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다.

황전(黃田)마을은 봉화읍 거촌2리에 있다. 마을 어귀에 도암정이 있고 마을 안쪽에 의성김씨 집안, 경암헌 고택이 있다. 커다란 연못과 해묵은 느티나무, 독바위 전설이 떠도는 덩치 큰 바위로 인해 신비로운 기운이 감돈다. 

봉화읍 거촌2리에 있는 마을로 도암정과 함께 커다란 바위가 분위기를 압도한다.
▲ 황전마을 정경 봉화읍 거촌2리에 있는 마을로 도암정과 함께 커다란 바위가 분위기를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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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촌1리는 광산김씨, 거촌3리는 원주변씨 집들이 모여 있다. 두 마을은 담으로 나뉘어 있다.
▲ 외거촌마을 정경 거촌1리는 광산김씨, 거촌3리는 원주변씨 집들이 모여 있다. 두 마을은 담으로 나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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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촌1리와 3리는 외거촌마을로 불린다. 거촌1리에는 광산김씨 집성촌으로 봉화에서 이름난 쌍벽당이 있고 거촌3리에는 원주변씨 집안, 수온당고택이 있다. 쌍벽당 자리는 명당 소리를 듣지만 지세가 약하고 부근에 물이 없어 벼슬하는 인물이 나지 않는 터라 한다. 아예 벼슬이 나지 않을 자리를 찾아 터를 잡았다는 건데, 그 깊은 뜻을 어떻게 헤아릴까.   

창마마을은 풍산김씨 집성마을로 물야면 오록리에 있다. 고인돌과 함께 삼국시대 고분군이 있어 사람이 살아온 흔적으로 따지면 이 마을을 따라오지 못한다. 노봉정사와 노봉종택, 망와고택, 화수정사, 장암정을 비롯한 반가, 정자들이 돌담과 어우러져 마을이 예스럽게 보인다.     

물야면 오록리에 있는 마을로 풍산김씨 집성마을이다.
▲ 창마마을 정경 물야면 오록리에 있는 마을로 풍산김씨 집성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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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전면 법전리에 있다. 진주강씨 집성마을로 냇물을 사이에 두고 음지와 양지마을로 나뉜다. 멀리 보이는 마을이 양지마을이다.
▲ 버저이마을 정경 법전면 법전리에 있다. 진주강씨 집성마을로 냇물을 사이에 두고 음지와 양지마을로 나뉜다. 멀리 보이는 마을이 양지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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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재미난 버저이마을은 진주강씨 집성마을로 법전면 법전리에 있다. 마을 이름은 법전의 옛 이름인 버저이에서 나왔다. 마을은 냇물을 중심으로 음지와 양지마을로 나뉜다. 음지마을에 기헌고택, 경체정이 있고 양지마을에 법전강씨종택, 해은구택있으며 마을을 살짝 벗어난 곳에 이오당이 있다.

마을들을 이렇게 건조하게 소개한 이유는 앞으로 하나하나 둘러볼 마을들이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서는 '오래된 마을 옛집 굴뚝' 주제에 맞게 봉화의 오래된 마을과 옛집을 둘러보며 굴뚝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고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는지 닭실마을을 시작으로 풀어볼 생각이다.

봉화를 둘러보기에 1박2일은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이런 사실을 봉화에 들른 지 몇 시간 만에 깨닫고 1박을 더하게 됐다.

덧붙이는 글 | 11월 6일~8일 다녀왔습니다.



태그:#봉화, #닭실마을, #바래미마을, #황전마을, #창마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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