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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 정상부의 빙하.
 킬리만자로 정상부의 빙하.
ⓒ 이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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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도 되기 전에 스태프들이 차를 가져왔다. 두통과 구토증으로 한 잔도 마실 수 없었다. 결전의 시간,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무조건 정상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는 명제만 남았다. 헤드 랜턴을 켰지만 앞사람의 뒤꿈치만 보고 따라갈 뿐. 길도 잘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대열을 이뤄 반딧불이처럼 급경사를 기어올랐다. 우리 일행을 따라가는지 다른 일행의 뒤를 따라가는지도 헷갈렸다. 낮에 멀리서 봐두었던 길보다 경사가 훨씬 가팔랐다. 오히려 낮이라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급경사에 질려서 오르지 못할 코스였다. 그래서 길이 보이지 않는 새벽, 그 어둠 속에서 산행을 했을까.

중간마다 지쳐 쓰러진 사람들이 드러누워 있었다. 성벽을 오르는 병사들처럼 오르다 쓰러지는 것이 반복됐다. 전쟁이었다.

[산행 5일차] 키보산장에서 킬리만자로 정상으로

킬리만자로 정상으로 가는길에서 맞은 길만스 포인트의 일출.
 킬리만자로 정상으로 가는길에서 맞은 길만스 포인트의 일출.
ⓒ 이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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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을 지어 신에 도전했던 바빌로니아인들에게 형벌을 내렸듯, '신의 집'에 다가가려는 이들에게 내려진 형벌이 '고산증'이었다. 토하고 또 토해서 뱃속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오로지 중간에 먹은 사탕 한 알만이 에너지의 원천이었다. 걷다가 정지하면 잠이 들었다. 동행한 실바노가 등을 때렸다. 그러면 눈을 뜨고 다시 걸었다.

그리스 신화의 시시포스처럼 산을 오를 뿐이다. 바윗돌을 굴려 정상에 도달하면 다시 굴러떨어지고, 다시 굴려 올라가는 것.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운명을 어찌 이리도 잘 간파했단 말인가.

눈을 감으면 뜬 상태보다 훨씬 더 선명한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영화를 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벽 속에 갇힌 유령들처럼 돌아가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식구들의 모습도, 내가 마음에 상처를 입힌 이들도 그 자리에 있었다. 살아온 날들의 영상이 스쳐 지나갔다. 탐욕에 가득하고 비겁하고, 파괴적인, 후회로 가득한 지난날들이었다.

고통스럽고 부끄럽고 황홀했고 슬펐다. 아! 사람들이 죽기 전에 본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아! 헤밍웨이가 말한 표범의 사체가 이것이구나.

자고 나면 위대해지고
자고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표범이고 싶다


(조용필 <킬리만자로의 표범>)

하이에나! 킬리만자로에서는 만나지 못하고 사바나에서 만났다.
 하이에나! 킬리만자로에서는 만나지 못하고 사바나에서 만났다.
ⓒ 이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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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에서 초라한 내 영혼의 사체들을 보았다. 정신의 사체들은 능선 위를 날거나 널브러져 있었고 나는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내 청춘과 작별했다.

미숙했고 후회 가득했던 날들이여 안녕! 청춘이여 안녕! 내 청춘에 건배!

6시간여 동안 걸어서 길만스 포인트에 도착했다. 일행은 앞서갔고, 나는 늦은 편이었다. 갈 길도 바쁜데 계속 혼자 서서 영화를 보고 있었으니, 늦을 수밖에. 해가 떠올랐다. 머리는 멍했고 혼란스러웠다. 해가 떠오르니 환영들이 사라졌다. 빛은 어둠을 이긴다. 어둠도 빛을 이긴다.

길만스 포인트에서 최정상 우후루 피크까지는 왕복 3~4시간인데 실바노가 내 눈을 보더니 포기하란다. 눈이 풀려 보이는 거다. 초저녁에 잠들기 위해서 먹은 수면제 때문인가. 생전 처음으로 수면제와 비아그라를 먹었건만 고산증 앞에서는 쓸모없었다. 몇 년을 기다려 찾아온 곳인데 포기할 수는 없었다. 무조건 전진하겠다고 고집했다.

다리 한쪽의 무게가 1톤씩은 되는 듯했다. 정신이 반은 나가 있었지만 과거 산행의 경험으로 밀고 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5,895m 우후루 피크에 올랐다. 담담했다.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온종일 먹은 거라곤 사탕 한 알이니 기쁘고 슬픈 것을 지난 무아지경의 상태였다.

결국 사진 한 장이 남았다. 태극기와 고등학교 졸업 30주년 기념 수건을 펼치고 인증사진을 남겼다.

정상부 우후루 피크에서 인증사진.
 정상부 우후루 피크에서 인증사진.
ⓒ 이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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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구름인가 눈인가 저 높은 곳 킬리만자로
오늘도 나는 가리 배낭을 메고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며
그대로 산이된들 또 어떠리


(조용필 <킬리만자로의 표범>)

[산행 6일차] 키보에서 호롬보까지

인생은 고해(苦海) 아닌가. 기쁨을 얻기 위해 기꺼이 고난을 선택한다. 우리는 고해 위를 떠도는 조각배에 불과하다. 어디서 떠나왔는지 알지 못하고, 잠시 머무는 정박지들을 거쳐 또다시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간다. 본질은 깨닫지 못한 채 생애를 유랑한다. 떠돌다 사그라져 간다.

사바나의 길.
 사바나의 길.
ⓒ 이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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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온 '우짜노 김 선생'이 묻는다.

"여행이 뭡니까?"

전 세계 다 쏘다니신 도사님이 소생에게 던질 질문은 아니나 현문우답이 필요했다.

"개를 묶어 놓으면 싫어하잖습니까. 묶인다는 것은 동물들에게도 죽음이지요. 자유가 곧 생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개처럼 쏘다녀야지요."

"…"

갑자기 일행을 개떼로 만들어 버리는 '이 작가(필자)'의 저렴한 수준에 우짜노 선생은 경악을 금치 못하는 눈치였다.

내려가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9~10시간을 걸려 올라간 길을 불과 2~3시간 만에 스키를 타는 양 미끄러져 내려왔다. 3명의 가이드가 이 작가를 떠메다시피 함께 해주었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도 서너 시간 이상을 구르고 넘어지며 더욱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일행의 목숨을 간수해준 잘생긴 가이드 사나이들.
 일행의 목숨을 간수해준 잘생긴 가이드 사나이들.
ⓒ 이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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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산장에 도착하니 모두 생존해 있었다. 서로의 얼굴을 보니 반가웠으나 몸은 완전히 소진되어 말문이 터지질 않았다. 고산증은 계속됐고, 탈진한 몸을 이끌고 호롬보 산장까지 가야 했다. 만주벌판을 횡단해도 이토록 멀지 않을 것 같았다.

오르면서 즐겼던 풍경들이 고통스러운 사막횡단으로 바뀌었다. 출애굽기였다. 구토는 계속되고, 임 원장은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었다. 몸을 완전히 불태워 버려서 남은 에너지가 없는 것이다. 가이드 '자파티'가 고맙게도 임 원장을 지켰다.

자파티와 함께 걷는 임 원장(왼쪽).
 자파티와 함께 걷는 임 원장(왼쪽).
ⓒ 이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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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변호사도 말이 없었다. 얼굴과 손등까지 새까맣게 타고 입술은 부르터 진물이 흘렀다. 그는 탈진한 데다 복통까지 왔는데도 무사히 하산했다. 대단한 정신력의 소유자다.

홍 반장이 최고의 정력 왕이었다. 기력이 모두 소진한 하산길에서도 홍 반장은 유머를 잃지 않고 힘을 북돋웠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역시 장어의 위력은 대단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작가도 평소 장어를 좋아했지만 홍 반장을 보며 더욱더 많이 먹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됐다.

자연과 하나 된 홍 반장.
 자연과 하나 된 홍 반장.
ⓒ 이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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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롬보에 도착하니 안도감이 느껴졌다. 몸 상태는 여전히 최악이었으나 조금씩 음식을 먹으며 컨디션을 되찾아갔다. 저녁 식사에는 숨겨둔 소주까지 등장해서 지독한 산행을 조금이나마 위로했다. 평소 술이라면 사양치 않는 이 작가는 한잔도 할 수 없었다. 이런 것이 진정 슬픈 것이다.

20대 후반 세 쌍의 연인들이 정상을 가고자 호롬보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들은 호롬보의 운해를 보며 깔깔거리며 젊음을 만끽하고 있었다. '지금은 긴 머리를 휘날리며 서로 사진을 찍고 사랑을 확인하지만 내일이면 너희들은 생사의 기로를 헤매리라.' 마음속으로 애도를 표했다.

연인들은 배낭여행을 함께 떠나보면 평생 서로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겪다 보면 상대를 깊이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인데, 킬리만자로는 너무도 어려운 시험장소다.

5~6일 머리도 감지 못하고, 고산증이 오면 제 몸도 가누기 힘든데 상대에게 어찌 최선을 다할 수 있단 말인가. 연인들이 사랑을 확인하기에는 적당한 곳이 아니다. 십중팔구는 '찢어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그 연인들의 최후 모습이 궁금했으나 확인할 길이 없다. 우짜노 선생이 준 김치를 먹고 아주 좋아했었는데 그 뒤 우찌 됐을꼬!

인생은 끝이 없는 길 위에 있다.
 인생은 끝이 없는 길 위에 있다.
ⓒ 이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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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와 적도 사이에서
천국과 지상의 사이에서

신의 존재를 알고 싶다면 킬리만자로에 오르라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욕망과 허무 사이에서

신의 부재를 확인하고 싶다면 킬리만자로에 오르라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정신의 사체들을 확인하라

못다한 삶의 노래를 부르라

피와 땀의 대가, 킬리만자로 등정확인서.
 피와 땀의 대가, 킬리만자로 등정확인서.
ⓒ 이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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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킬리만자로 산행기, #하이에나, #키보산장, #킬리만자로의 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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