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쓴 김효정 시민기자는 '제 4회 사람사는 세상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참여했습니다. [편집자말]
지난 12일에 서울극장에서 이루어진 폐막식으로 노무현 재단 주최의 '제 4회 사람사는세상 영화제(예술감독 오동진)'가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영화제가 시작된 2014년 첫해에는, '다섯 개의 민주주의: 인권, 노동, 정의, 진보, 화해'를 슬로건으로, 2015년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70년의 고독,' 2016년에는 촛불시위와 맞물려 '변화의 시작, 시민의 힘'이란 주제로, 그리고 2017년 올해의 주제는 '영화는 정치다, 정치는 영화다' 이다.

이번 영화제가 '성공적'으로 치러졌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일단, 1,2,3 회에서 단편을 포함해 불과 20 여 편 남짓 하던 상영작 수가 올해에는 두 배수에 가까운 45편으로 늘었다. 체 게바라의 생전 육성을 들을 수 있는 다큐멘터리 <체 게바라: 뉴맨>과 성 정체성과 인종 차별로 고통 받는 아파트 이웃들이 '헌법 과외'를 주고 받으며 마음의 거리를 좁혀가는 <헌법: 증오에 관한 러브 스토리>를 포함한 국내외 작품들에 많은 관객들이 자리를 채우고 GV 에 참여했다.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국가에 대한 예의>(2017) 한 장면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국가에 대한 예의>(2017) 한 장면 ⓒ 권경원


그럼에도 유수의 다른 영화제들에 비해 현저히 적은 상영작 수 인 것을 감안하면 늘어난 상영작 수 만이 성공적이라고 여겨지는 하나의 요인일 수 는 없을 것이다. 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점은 미국과 일본, 중국 등 메이저 영화 산업국 뿐만 아닌 크로아티아, 네덜란드, 덴마크, 불가리아 등의 비 메이저 국가들에서 제작된 보석 같은 영화들이 포진해 있다는 점이다.

특히 올해 선댄스 영화제 초청작이었던 <더 굿 포스트맨> 은 이 중에서도 눈에 띄는 수작이다. 영화는 터키 국경 불가리아의 한 작은 마을에서 평생을 우체국장으로 살아 온 노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다. 노인은 시리아에서 넘어오는 난민들을 고발하던 일을 도맡아 하다가 점차적으로 이들을 마을에 정착시키고자 동분서주 한다. 연민으로 시작된 일이 그에게는 곧 사명이 되고 결국 그는 시장직에 출마해 정책적으로 난민을 돕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더 굿 포스트맨>은 다큐멘터리의 틀 안에서 난민들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하고자 고군분투하는 한 노인의 도전기를 생생하지만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이번 사람사는세상 영화제에서 주목 받았던 또 다른 작품은 앞 서 언급한 크로아티아 영화, <헌법: 증오에 관한 러브스토리> 다. 마치 법정 장르 같은 제목을 하고 있지만 사실상 게이 교수와 세르비아 인 부부가 서로가 가진 편견을 넘어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을 담은 코믹하고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다. 오랜 기간 동안 유고 슬라비아의 통치를 받고 독립 후에도 프로파간다 영화 정도만 제작되던 크로아티아는 현재도 5편에서 10편 남짓의 극영화가 만들어 질 정도로 작은 영화산업을 가진 나라다.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제작된 이 영화가 퀴어와 인종차별의 이슈를 전면에 내걸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임과 동시에 시대가 요구하는 이 문제들의 당위성을 시사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재의 파격성과 더불어 <헌법: 증오에 관한 러브스토리> 는 괄목할 만한 수준의 시네마토그래피와 음악을 선보인다. 특히 현악기의 사용이 두드러지는데, 비올라의 섬세하고 예리한 선율이 동유럽 특유의 어둡고 바랜 빛의 하늘과 수 백 년을 살아낸 건물들 사이를 베고 지나가듯 훑고 나면 서러움 가득한 주인공들의 풍자 섞인 대사들 마저 처연하고 아련하게 들린다.

<헌법: 증오에 관한 러브스토리>는 올해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고 미국의 각종 영화 단체에서 많은 상금을 수상했다. 이 작품이 초청된 유럽 영화제들만큼의 아성은 아닐지라도, 사람사는세상 영화제의 관객들이 가슴에 새기고 떠났을 작품이 된 것은 확실하다.

4일 간의 길지 않은 영화제는 권경원 감독의 <국가에 대한 예의> 로 막을 내렸다. <국가에 대한 예의>는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로 관련 인물들의 기억과 증언을 촘촘히 담아낸 작품이다. 거대한 국가적 음모와 인권 학대의 만행이 90분의 러닝 타임 동안 숨쉴 틈 없이 이어지지만, 강기훈과 운동을 함께 했던 동료들에 의해 지금껏 지속되는 사회 곳곳의 운동 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래도, 그럼에도, '사람 사는 세상' 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올해 사람사는세상 영화제의 또 다른 특이사항이라면 개막식 만큼이나 많은 인사들이 폐막식 까지도 자리를 빛내주었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영화제에서 폐막 행사는 개막 행사 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인원이 참여한다는 점을 고려 했을 때 이는 이례적인 일이다. 본선 심사위원인 변영주 감독, 김규리 배우, 최재원 영화제작자를 포함하여 권칠인 감독, 김홍준 교수 (한예종), 원동연 대표 (리얼라이즈 픽쳐스), 곽영진 (영화평론가) 등의 영화인들이 폐막을 축하하고 내년의 영화제를 축복했다.

매년 수많은 영화제가 생기고 개최된다. 대부분이 그 전통과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크고 작은 이유들로 존속 되지 못했거나 못하게 되는 영화제들도 있을 것이다. 이제 막 4회를 맞은 사람사는세상 영화제 역시 갈 길이 더 먼 신생 영화제 중 하나다. 그럼에도, 이 영화제가 크게 성장할 만한 잠재력을 보여준 것은 올해 보여진 좋은 영화들 뿐만 아니라 객석 하나하나를 채워주고 환호해준 영화제의 관객들이다.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정치인을 향한 그리움을 넘어 인간과 세상에 대한 예의와 그것을 담아낸 용기 있는 영화들에 대한 열정이 사람사는세상 영화제의 가장 큰 동력이다.

노무현 사람사는세상영화제 노무현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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